미인 美人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를 가로지르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은 번잡하고, 시끄럽고, 특색은 하나도 없는 프랜 차이즈 중심의 레스토랑으로 가득 차 있는 곳. 장점이 있다면 교통의 요지라는 것. 이건 한 이 년 전 까지의 기억이다. 서울은 워낙 모든 것들이 바뀌는 곳이니까. 바뀌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바뀌는 방향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곳이니까. 

그런 특색없는 공간에 특색있는 술집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미인'. 나이 드신 할머님과 할머님의 아들인 듯한 삼십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 분과 그 남자 분의 부인이 운영하던 곳으로 기억한다. 가게 바깥의 흰색 간판에는 신윤복의 미인도가 엷게 스케치가 되어 있었고, 내부 벽에는 미대를 나온 부인되시는 분이 작업한 추상화 몇 점이 걸려 있었다. 황태구이 안주와 맥주를 곁들이면 참 맛있었다. 자주 갔다. 자주라고 해봤자 다 합쳐서 열 번을 넘지는 않았겠지만. 그 곳을 발견하고 나선 각기 다른 그룹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도 모두 그 곳으로 데려 갔다. 갈 때 마다 그 안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테이블은 다 합쳐서 대략 일곱 개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한 테이블에 네 명씩 앉을 수 있다고 치고 테이블이 손님들로 꽉 차도 대략 스물 여덟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술집이었다. 

뭔가 강남역스럽지 않았다.

딱 한 번 스물 여덟 명을 모두 채운 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여느 때 처럼 황태구이와 맥주를 시켜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주 오랫동안 보아온 얼굴들이라서 사실 굉장히 새롭고 불꽃튀는 이야기란 없었는데, 문득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몇 명이 들어와서 맞은 편 벽의 테이블 다섯 개를 가리키면서 여길 좀 예약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올 거라면서. 그리고 테이블을 모두 붙여 한 데 모은 다음 한 명은 다시 핸드폰을 붙들고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자리를 메웠다.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 그룹은 이내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모여드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 그룹도 남자 셋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어느 덧 열 몇 명이 모여 드는 데도 모임에 여자 한 명 없다는 사실은 무척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처음엔 같은 부대에서 근무를 한 군대 모임인가 싶었다. 하지만 테이블 마다 적당한 안주 하나씩 깔리고 술잔이 각각 놓였는데도,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별 다른 대화가 없이 핸드폰 액정 화면을 바라 보거나 시계를 바라 보는 등 하나 같이 딴청을 피우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사람 들이 더욱 많아져 스무 명을 넘었을 무렵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그 누군가가 등장했다. 모인 사람은 모두 남자, 그리고 그 누군가도 남자였다. 그 누군가가 등장한 이후로 그 술집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 밖에 없었다. 술집을 운영하는 나이 많으신 할머님과 할머님의 아들인 듯한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분과 그 남자분의 부인되시는 분도, 나와 내 친구 두 명도, 묵묵히 입을 닫은 채 그 누군가의 말을 경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그 누군가의 말을 들어 보자.

"...말을 걸 때도 전략이 필요해요. 뭐뭐가 어디있죠? 라는 질문은 제일 잘 먹히고 무난한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뭐뭐가 상대 여자 분도 잘 모르는 곳이 되어선 곤란해요. 강남역 사거리에서, 저기 죄송한데요. 교보문고가 어디죠? 라는 질문은 나쁘지 않아요. 아무튼 일단 말을 걸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꼭 좋은 차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예요. 돈이 없을 땐 그에 맞는 나름의 컨셉을 세우는 것이 필요해요. 차가 없을 때는 뚜벅이족으로써 누릴 수 있는 것들을 강조 하세요. 같이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음악을 같이 듣는다든지 말이죠. 학창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어요...  

...너무 비싼 명품을 사 입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보세스러운 옷은 피하세요. XXX라는 브랜드 옷은 추천할 만 합니다... 키. 중요하죠. 중요해요. 저만 해도, (신발을 벗어서 안 쪽을 보여주며) 키높이 깔창을 항상 깔고 다녀요. 이 몇 센티미터의 차이가 굉장히 중요해요. 이 깔창도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요... 

...우리 클럽의 레전드 분, 그 분은 정말 대단한 분이시죠. 그 분은 평균적으로 한 달에 열 명 정도를 꼬시고 있어요. 근데 그게 별 게 아니예요. 다 전략 이예요...

...자세한 내용을 수록한 CD를 나누어 드릴 께요. 장당 삼 만원입니다. 더 많은 전략과 정보들이 상세하게 들어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이 년도 넘은 기억이라 자세한 내용은 생각 나질 않는다. 그자리에서 자세한 내용이 담긴 CD를 구입할 걸 그랬나 보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끝나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술집에서 빠져 나갔고, 테이블에는 별로 손도 대지 않은 안주와 술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나가자 우리와 술집 운영진들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내 그 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주 내용은 '내 살다살다 정말 희안한 광경을 다 본다.'라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설교가 진행되고 있을 무렵에 그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뜯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다들 멀쩡했다. 근육질인 사람, 지적으로 보이는 사람, 등 종류도 다양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당시 그 모임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자를 꼬시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표정들이 아니라, 뭔가 다들 굉장한 절실함이 맴돌고 있었다는 것. 대단히 진지한 분위기였고, 그 누군가의 옆에서 누군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열심히 노트 필기를 하던 한 사람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돌이켜 보니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 오른다. 저게 '먹힐까?' 남자들끼리 하는 여자 분석이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저 모임의 누군가가 만약 여자라면? 그 CD엔 얼마나 유용한 정보들이 들어 있을까. 대체 그 누군가는 얼마를 벌었을까. '레전드'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다단계 업체에서 항상 이야기한다던 한 달에 수 백 수 천을 버는, 실체는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똑같은 걸 보니 정형화 된 수법인 듯 하고. 남중-남고-대학-군대-복학생으로 이어지는 테크를 탄 한 남자가 여중-여고-여대를 나온 한 여자를 만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등등.

그 술집은 없어졌다. 일 년 전에 그 술집에 같이 자주 드나들던 친구 녀석과 국제 통화를 하는 와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그 술집이 있던 빌딩이 '재개발'에 들어 가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뭔가 강남역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