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영어책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에세이 2008. 9. 17. 12:04

전차를 탔다. 옆자리에 한 동양 남성이 앉았다. 손에 들린 책을 보니 '콩나물'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한국인이구나. 그리고 행색을 보니 여행객이 틀림이 없다고 추측했다.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펴든 상태로 책은 읽지 않은채로 주위를 계속 휘휘거리면서 두리번 거리는 불안한 몸짓이 느껴졌다. 내 경험에 따르면 여행객의 몸짓이다. 그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성이 아닌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면 난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 '콩나물-'이라는 말로 시작된 책을 흘낏 쳐다 보았다. 그 책의 왼쪽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제26일, Accomplish- " 날짜 별로 암기해야 하는 중요 단어가 실려 있는 단어 책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왜 여행을 와서 단어 책 따위를 들고 있는거냐.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거냐. 줄줄이 이어지는 잡생각들. 근데 보다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옆에 앉은 한 한국인이 저 책을 들고 있는 것이 화가 날까?

어쩌면 한국적인 토양에서 자란 나도 그러한 주입된, 거짓된 영어 스트레스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단어장으로 구성된 책 몇 권쯤은 샀을 것이며,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항상 맘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문득 솟구치는 근원적 의문, 왜 영어를 해야하지에 대한 대답은 미룬채로. 아싸리 영어 점수 따위는 중요치 않아, 라고 무시해 버리는 것도. 한국식 영어 '공부'에 뛰어 들어 점수 올리기에 매진하는 것도 아닌 어물쩡한 상태로 말이다. 이 모든 건 결국 나 혼자 생각을 피워 올리는 것에서 비롯 되었지만, 결론은 내 과거, 내 과거를 둘러 싸고 있었던 환경에 대한 노여움으로 발전하는 엉뚱한 계기가 되었다. 

한 가지 더.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대체 무슨 글이 실려 있었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체 못할 반발심으로 당시엔 영어 교과서를 제대로 펴본 적이 없으니깐 말이다. 한데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독일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는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를 가로 지르는 고전을 집필했던 작가의 소설이 어려울 것이라는 단견과는 달리,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은 그의 드라이한 문체 때문에라도 영어로 된 소설 중에선 제일 읽기가 수월하다. 대체 헤밍웨이의 소설을 고등학생에게 읽히는 독일의 영어 교육과 한국의 그것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본다.


우리 집에 누군가, 가 놀러 왔다.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가 다른 주로 떠나 1년간 교환학생 과정을 이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누군가, 는 바이올린을 들고 왔다. 속에서 또 꾸역꾸역 생각들이 맴돌아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에게 이렇게 물을 뻔 했다. 그래, 바이올린 뮤지션/연주가 중에서 누굴 제일 좋아하니? 누군가, 는 과연 바이올린이 좋아서,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소리가 좋아서 바이올린을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면 한국 중산층의 유별난 서양 클래식 악기에 대한 사랑이 녀석에 까지 대물림 된 것일까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질문. 이미 내 나름대로는 후자의 것일거라는 설정을 이미 깔아 놓은 채 확인을 하고 싶다는 것.

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영화 [조이럭 클럽] 을 보다가 발견한 사실은 피아노에 대한 사랑이 한국 중산층 가정의 전유물 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살아 가는 중국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네 명 정도의 딸과 어머니들을 통해서 다루고 있는 그 영화는 어머니와 딸과의 주요한 갈등의 축으로 피아노 배우기를 소재로 다루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피아노를 배울 것을 강요하고, 딸은 그것을 괴로워 하면서 억지로 배우다가 마침내 반항하게 된다는. 억지로 피아노를 배웠던 내 어릴 적 모습이 겹쳐 지면서 난 그것이 아시아적인 무엇일 거라고 사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 영화를 고른 인도계 여자 선생이 감동적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봤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홀로 확신을 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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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박 성장기

김이박 이야기 2008. 9. 4. 19:02

김이박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로 김이박의 가정은 평범한, 아니 실은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은 중산층이다. 김이박은 어릴 적 다른 중산층들과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배웠다. 들으면 들을수록 태아의 머리가 좋아진다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태교를 했던 그의 어머니는, 사람이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지. 김이박은 피아노를 배웠다. 

김이박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모든 일엔 때가 있어, 그리고 지금은 공부할 때야. 너는 학생이야, 학생의 본분은 공부야. 김이박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가끔씩 야동을 보면서 백인 여자의 몸을 감상한 것을 빼곤. 덕분에 김이박은 사년제에 들어갔다. 김이박은 그 곳에서, 열심히 술을 먹었다. 그리고 토했다. 다시 술을 먹었다. 그리곤 다시 토했다. 그리곤 다시금 술을 먹곤, 다시금 토를 했다. 

그러다 김이박은 군대에 갔다. 고참들은, 피할 수 없으면 즐겨. 김이박은 열심히 군생활을 즐기기 위해 노력했다. 선임 비위도 적당히 맞추고, 후임도 적당히 괴롭히고, 휴가를 나가선 나이트를 가서 여자를 꼬시기 위해 노력도 하고, 미아리도 가고 청량리도 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덧 제대.

김이박은 대학에 복학 하기 전에 부모님에게 돈을 타내 유럽 여행을 갔다. 여행 책자를 옆 구리에 꼭 끼고 떠났다. 김이박은 야동에서 보았던 백인 여자들을 실제로 볼 수 있어 매우 좋았다. 에펠탑과 콜로세움 앞에서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남는 건 사진 밖에 없어. 김이박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김이박은 지금 자신이 유럽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사진을 보면서 자신이 유럽에 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았다. 

김이박은 복학을 해서 이제 졸업하면 뭘 해야하는 지를 고민했다. 인생 뭐 있냐? 김이박은 토익 공부를 시작했고,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다. 회사에서는 자기계발에 힘쓰라는 말을 했다. 무엇보다 시간 관리, 인맥 관리가 중요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김이박은 열심히 일을 했고, 야근을 했고, 지쳐갔다. 그런 김이박을 안쓰럽게 생각한 일가친척 어르신들은, 결혼을 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야. 아이를 가져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야. 김이박은 선을 보았다. 선을 본 자리에서 김이박에게 상대방 여자는 연봉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어 보았다. 김이박은 선을 보고 나와 홀로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었다. 인생 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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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박 일상기

김이박 이야기 2008. 7. 26. 09:47

김이박은 조그마한 웹 사이트 기획사에 다닌다. 그 바닥에선 알아주는 기획자가 얼마 전에 독립하면서 새롭게 차린 회사다. [성공하는 인간들의 백 가지 습관],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뱀머리 리더십], [금송아지가 온다], [인맥 마케팅] 등등 갖가지 리더십, 마케팅 서적과 경영 이론들이 줄줄히 꽃혀 있는 사장실에서 김이박은 면접을 보았다. 사장이 썼다는 책도 한 구석에 꽃혀 있었는데, 김이박은 후일 입사한 지 삼 개월이 지나서야 회사에서 버는 순수익이 사장이 썼다는 책의 인세보다도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김이박은 회사에 합격을 했던 것이다. 서울 소재의 사 년제를 나오고 글을 좀 말이 되게 쓸 줄 알고, 영어 성적이 좋고, 대학 시절 조그만 공모전에서 상도 탄 경험이 있는 김이박을 사장이 괜찮게 본 모양이다. 

오늘도 김이박은 자신을 닦달하는 거래처 이 대리의 비위를 맞춰 주느라 진땀이 빠져라 전화길 붙들고 있다 오전 일과를 마쳤다. 남녀관계보다 더 힘들고 더 무서운 건 갑을관계였다. 하지만 김이박의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는 말이 말을 낳으면서 하나도 결정되는 것은 없는 기획 회의도, 내용 보다는 PPT의 폼과 글씨의 폰트를 맞추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이는 프리젠테이션 준비도 아니었다. 바로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이었다. 그때만 되면 김 팀장의 눈치를 봐가며 메신저질과 스포츠 기사 검색에 열을 올리던 옆자리 박군도 여지 없이 진지해 지는 것이었다. 과연 오늘 점심엔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 그 어떤 회의에서 오가는 문제 보다도 더욱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는 바로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다행히도 오늘은 야근이 없는 날이다. 김이박은 오랜 만에 맞는 야근 없는 금요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종로로 향했다. 버스를 탔다. 버스 전용 차선을 타고 버스는 신나게 씽씽 달린다. 버스 안은 버스 기사가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로 매우 시끄럽다. 음악이 꿍짝꿍짝 흘러 나온다. 이어서 교통 안내 방송이 나온다. 언제나 그랬듯이 교통 안내 방송의 내용은 똑같다. 이쪽도 막히고 저쪽도 막히고 저기선 차량이 오도가도 못하고 있으며, 요기선 차량들이 서행하고 있으니 우회하라는 방송이다. 버스 기사의 표정은 침울했다. 승객들은 대부분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문자도 보내고, 게임도 하고, 음악도 듣고, 다운 받은 미드도 본다. 그런데, 노선이 정해져 있는 버스에서 왜 교통 정보가 필요한 걸까.

김이박은 버스에서 내려 부랴부랴 약속장소로 항했다. 사람들로 미어 터지는 종로 길거리에서 그는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연인 한 쌍과 심하게 부딪힌다. 여자의 어깨가 김이박의 허리를 빠르게 강타하고 지나갔다. 김이박이 찡그리면서 여자를 바라보지만, 여자는 여전히 남자의 품 안에 안겨서 까르르 거린다. 그 옆에 있던 남자가 대신 대충 사과하고 지나간다. 저들은 과연 한 몸이구나.

김이박은 약속 장소인 서울 극장 앞에 도착했다. 여자 친구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무는데, 갑자기 옆에서 욕지거리가 들려 온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방금 영화를 보고 나온, 김이박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두 남자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씨발 왜 이걸 보자고 한거야. 존나 재미 없잖아. 아이 씨발. 난 존나리 재미있을 줄 알았지. 아 정말 요즘 영화가 왜 전부 이따위냐. 존나 짜증 이빠이네. 그래, 정말이지 한국영화 수준 정말 낮은 거 같아. 아 씨발 이젠 정말 한국 조폭 코메디 영화는 안 볼거야. 그러게 씨발 욕만 졸라리 하고 하나도 재미없어. 야, 씨발 술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야. 오늘은 술 먹고 좋은데 가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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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박

김이박 이야기 2008. 7. 26. 09:42

서울 근교에서 고깃집을 운영하고 부천에 거주하는 김, 은 40대 중반이다. 이리저리 직장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고깃집을 운영한지 이제 10년 째다. 아내와 아들 둘이 있다. 사교육비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럭저럭 생활은 할만하다. 그에게 있어 불만은 이 곳이 자신의 유일한 생활 터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것은 친구들과의 모임이다. 각자 생활에 바쁜 친구들과 송년 모임을 가지기 위해서 그는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 먼저 연락을 하고, 날짜와 시간을 잡고, 이리저리 준비했다.

그에겐 박, 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방송국 피디다. 광화문 근처의 원룸에 혼자 기거한다. 무지하게 바쁘고 외국도 몇 번 왔다갔다 한다고 한다. 자신에 비해서 활동 영역이 넓어 보이는 박, 을 그는 부러워 한다.

그에겐 분당에 사는 이, 라는 친구도 있다. 자신처럼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남아 이제는 부장 자리를 꿰차기 일보 직전이다. 부동산으로 제법 재미도 본 이, 는 비교적 제 시간에 도착했다. 박, 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박, 은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엔 무슨 연예인 지망생과 로맨스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모여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요즘 우리 상무가 말이야. 골프를 배워 보라는 거야. 내가 붙잡고 있는 라인이라 새겨 듣는 척 했지. 미국 가 있는 자식 놈 때문에 돈도 많이 들어가는 데 무슨 골프냔 말이야. 근데 말이야. 이게 또 무시할 순 없는 거 같단 말이야. 아무래도 인맥을 넓히는덴 골프만한게 없단 말이지. 그래서 골프 셋트를 큰 맘 먹고 샀지. 그리고 일단은 연습장에 다니는데 말야. 하다보니 이것도 재미있단 말이야. 쏠쏠하다니깐. 이, 가 말한다.

요즘 연예계가 참 시끄럽지. 애새끼들이 말이야. 기고 만장해져가지고 말이야. 예전엔 방송국에 드나 들면서 어떻게든 눈도장 찍으려고 난리 브루스를 췄는데 말이야. 요즘은 기획사다 덕션이다 뭐다 해서 전부 밖으로 돌아요 이것들이. 더러워서 나도 독립을 하던가 해야지 원. 근데 히트친게 있어야 말이지. 제길. 뭐 대박 터지는 아이템 없을까. 응?  박, 이 말한다.

이 근방에 모텔이 새로 생겼는데 말이야. 모텔 프로방스던가 뭔가. 하여간에 그 모텔이 생긴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거야. 알고 봤더니 이 것들이 무슨 인터넷 카페에서 홍보를 한다고 하지 뭐야. 요즘은 모텔도 사용 후기를 올리는 시대가 된거야. 하여간 우리한텐 잘 된 일이지 뭐야. 김, 이 말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대화는 어긋나기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가 상무 전화를 받으러 밖에 나갔다 오고, 다시 외국에 유학중인 이, 의 아들이 용돈을 보내 달라는 전화가 온 다음 부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시대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아직도 박에게 앵겨 붙는 최, 신, 임과 같은 골빈 연예인 지망생들에게서 차례로 전화가 오면서부터 일 수도 있다. 박, 은 미안하다면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 선다.

이, 는 박, 이 나가기가 무섭게 ‘문란한’ 박, 의 사생활을 한참 씹어 댄다. 박, 이 자신이 알고 지내는 ‘동생’들을 이야기할 때 열심히 경청하던 이, 가 아니다. 한편으론 돈을 주고서야지만 박, 이 만나는 ‘등급’의 여자들을 만날 수 있는 자신의 처지가 ‘더러워서’ 더욱 목소리가 커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김, 은 그저 듣고만 있는다. 그러다가 이, 가 일어선다. 김, 은 배웅하고, 자리를 정돈한다. 고깃집에 딸려 있는 방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이, 의 아내가 나와서 거든다. 아내는 치우다가 그만 쟁반 하나를 떨어 뜨린다. 김, 은 그것을 트집삼아 아내와 대판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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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our country?

에세이 2008. 7. 2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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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한 전문직 여성이 있다. 이십 대 후반 쯤 되는 그 여성은 현재 홍대 입구 근처의 원룸에 살고 있다. 그녀의 직장은 광화문 근처에 있고, 현재 그녀는 외국계 홍보 기획사에 'Assistant Director' 라는 직책을 가지고 재직 중이다. 연봉은 한 4500정도.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서 켈로그 콘프로스트와 우유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 한다. 도브 비누의 거품을 온 몸에 묻혀 가며 샤워를 한 후, 빅토리아 시크릿의 섹시한 속옷을 걸친다. 기분이 다소 좋아진 그녀는 시세이도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고, 도나 카렌 투 피스를 걸친다. 그런 후에 지난 달에 큰 맘 먹고 지른 마놀라 블라닉 구두를 신고, 셀린느 토트백을 들고 출근을 한다. 그녀는 출근을 하는 길에 PMP로 어제 다운 받았던 [sex and the city]의 가장 최근 에피소드를 본다.

그녀가 현재 담당하고 있는 클라이언트는 TOEIC/TOEFL 장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ETS라는 회사다. 한국 신문에 영어 시험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실리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 현재 그녀가 맡은 임무이다. 미국 ETS 본사 와의 힘겨운 이메일 업무 처리로 오전 일과 내내 바빴던 그녀는 점심을 근처 브런치 레스토랑에서 벨기에 와플로 간단히 해결한다. 오후 일과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인인 그녀의 상사 미셸과 현재 처리 중인 업무에 대한 미팅으로 훌쩍 지나 간다. 아차, 빼먹고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녀가 회사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신디다.

신디는 오늘, 왠일로 비교적 업무처리가 순조로운지라 여섯 시 정시 퇴근을 맞이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맞는 꿀같은 여유를 즐기기 위해 신디가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신디의 남자 친구는 톰 요크라는 영국인인데 런던 대학교에서 영어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흥국생명 빌딩에 위치한 영국 문화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삼십대 초반의 건장한 백인 남성이다. 신디는 톰과 함께 메드 포 갈릭에서 이탈리안 피자로 저녁을 먹고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를 관람한다. 한껏 예술적으로 고양된 그들은 근처 와인 바에서 캘리포니아산 베어풋 메를롯 레드 와인을 마신다. 그런 후에 광화문 미로스페이스에서 아일랜드산 영화<Once>를 본다. 인디 뮤지션의 사랑 이야기인 그 영화를 보고 낭만에 빠진 둘은 신디의 원 룸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톰이 제조한 크랜베리 보드카를 나누어 마신후에, 프랑스 일렉트로니카 밴드 <AIR>의 노래를 들으면서 둘은 섹스를 한다.

자,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 났고, 한국어를 할 줄 알며,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낸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신디'는 지금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갑자기 무슨 된장녀의 일과를 늘어 놓느냐구? 좋다. 그렇담 한 편 반대로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대학 졸업 후에 1년이 지나도록 취직을 하지 않고 있는 백수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십 대 시절에 유명을 달리 했고, 현재 그의 어머니는 김밥천국을 운영하면서 힘들게 돈을 벌고 있다. 어렵사리 그는 대학 교육을 마쳤으나, 졸업 후에 이개월 정도 웹-사이트 기획 회사에서 잠깐 일하다가, 폭압적인 직장 내 인간 관계와 거래처와의 불합리한 갑을관계에 질려 회사를 때려친 후, 현재 집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을,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그는 요즘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미드'에 푹 빠져 있다. 한 달에 삼 만원 남짓한 돈만 지불하면 무한정 다운 받을 수 있는 미드를 종류 별로 다운 받으면서, 어쨌든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으면서 돈을 벌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구나라는 새롭고도 놀라운 깨달음과 함께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미드를 보고 감상을 간간히 티스토리에 포스팅하면서 백수 생활을 한껏 즐기고 있는 중이다.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2를 어제 막 끝냈고, 요즘은 [히어로즈]에 올인 중이다. 아직도 다운 받아서 볼 수 있는 미드가 무궁무진한지라, 당분간 그는 취직할 생각이 없다. 동시에 드라마 속 미국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그는 지금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소위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는 시간은 하루 중 얼마나 될까? 진정 한국적인 것들 속에서 살고 싶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숭늉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운 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수업을 들은 후에, 인사동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한 후에, 전통 찻 집에서 차를 즐기다가, 간송 미술관에 가서 김흥도의 신윤복의 그림을 감상하며 한국적인 미에 흠뻑 빠졌다가 저녁엔 영화 [오! 수정]에 나왔던 인사동 막걸리집에서 고갈비와 막걸리를 먹으면 하루 종일 '한국'에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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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베이어 벨트

에세이 2008. 7. 20. 17:52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이 난다. 신은경 - 왜 그 [조폭마누라]에 나왔던 여자배우 말이다. - 과 얼굴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신은경과 그의 남편이, - 어쩌면 [조폭마누라]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 마트에 가서 쇼핑 카트를 몰고 다니다가 바겐 세일 코너에 가서 치열한 몸싸움 끝에 싸게 물건을 집어 든 다음 밝고 환하게 웃으면서 남편과 몸을 부딪히면서 스킨십을 하는 장면이다. 대단히 평화로운 일상적인 행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난 그 장면이 매우 경멸스러웠다. 가끔씩은 도무지 이러한 일상적인 행복에 대한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마트는 싸고 편리하다. 그런데 왜 나는 마트에 가는 것이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울까. 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해서 빨리 빠져 나오고 싶어지는 걸까. 쇼핑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다양한 물건들이 쌓여 있는 코너들을 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을 받아서? 계산대에 다가가서 검정색 고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물건들을 하나 둘 씩 올리는 것이 비인간적이어서?

언젠가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집 근처 '피트니스 클럽' (알다시피, '헬스 클럽'과 '피트니스 클럽'은 엄연히 다르다. '짱깨집'과 '차이니즈 레스토랑'의 차이 정도랄까.) 에서 클럽 회원들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그 곳을 무료로 한 달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고, 그래서 난 뱃살을 주물럭 거리며 몇 번 그 곳에 간 적이 있다.

과연 그곳은 '헬스 클럽'과 달리 '피트니스 룩'을 한 껏 차려 입은 여자들로 가득 했는데, 참으로 하늘거리는 그녀들의 생김새는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힘을 쭉 빼놓곤 했다. 그 곳엔 갖가지 형태의 기계들로 그득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계는 물론 런닝 머신이었다.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속도를 조절하고 시간을 입력하고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 말이다. 그 벨트 위에서 달리면서 땀을 쭈욱 빼다가 어느 순간 마트에서 느꼈던 그 기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고 나는 그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려 왔다. 그리곤 다시는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의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라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패션지 편집장이 신참내기 직원에게 한 소리를 하면서 대체 니가 입고 있는 그 '블루'가 그냥 '블루'인줄 아느냐면서,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짜내는 것 부터 시작해서 그 '블루'가 대중화 되어 대중적인 브랜드의 옷에 사용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설명력의 부족으로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듯)그걸 보는 순간 뭔가 저 분께서는 지금 게임의 법칙 그 자체를 꿰고 있구나, 대체 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한 큐에 설명해 주고 계시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힘든 노동의 댓가로 손에 쥔 자유 이용권, 돈을 사용하는 그 순간도 뭔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알짱거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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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에세이 2008. 6. 3. 00:13
느 날 TV를 보다가 다이아몬드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내용은 빤하다. 다이아몬드를 통해서 여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는 내용이다. 저게 먹히나?

먹힌다. 적어도 영화 [색, 계]를 보면 이장관(양조위)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이장관과 왕가지(탕웨이)사이의 보는 사람까지도 집어 삼킬듯한 '色'과, 그 '色'이 물질로 형상화 된 바로 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다. 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은 참으로 압도적이다. 내가 영화를 보고 있던 극장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탄성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감정을 좀 더 자유롭게 표출하는 한국의 극장에서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여인네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그 장면에서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을 것은 당연 지사다.

다시 다이아몬드 광고로 돌아가서. 그 광고를 보면서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에 사로 잡혔다. '내가 과연 다이아몬드를 여자에게 사 줄 만한 경제적 능력을 갖추게 되는 날이 올까?' 이런 생각을 내쫓기 위한 방법은 바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떠올리면서 '그래, 다이아몬드라는 것이 결국 제 1세계가 제 3세계에 대해 자행하는 착취의 결과물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진보적이긴 하나, 어째 좀 재미 없고 패배적이다.

이 시점에서 떠올려야 하는 또 다른 다이아몬드는 바로 [이수일과 심순애]에 나오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다.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신파극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내용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그 시절에 대부호였던 김중배가 이수일의 연인이었던 심순애에게 물질 공세를 퍼붓고, 특히 다이아몬드를 선사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이 등장한다. 이수일이 심순애를 매몰차게 내치면서 말한다. "순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단 말이더어냐아?" 심순애가 이수일의 바짓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흑흑흑. 아니어요. 수일씨이. 아니어요." 아이구야.

잠시 이수일이 얼마나 찌질한 인간 인지 증명하는 것을 뒤로 한 채,

영화 [물랑 루즈][각주:1]를 살펴 보자.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 영화를 봤을 것이다. 물랑 루즈를 들락거리는 모든 남자들의 로망인 여신 샤틴(니콜 키드만), 그에게 다이아몬드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극장을 지어주겠다면서 무차별 물량 공세를 퍼붓는 '부르주아 귀족' 공작. 허나 그러한 샤틴을 사로 잡는 것은 다름 아닌 돈 한 푼 없는 '보헤미안 예술가'인 시인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 지지고 볶고 노래 부르고 한 끝에 죽어가는 샤틴의 사랑을 얻은 것은 크리스티앙. '공작'은 돈은 돈 대로 대준 끝에 끝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자기 이름도 말할 겨를 없이 끝까지 그저 '공작'으로 남은 채로 불쌍하고 쓸쓸하게 극에서 퇴장한다.

자, 수일아. 그래, 순애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해서 자넨 대체 뭘 했나? 보아하니 도시락 폭탄을 제조하는 지하실 앞에서 휘휘거리며 망을 보는 사람들에게 물을 떠다 주지도, 하얼삔역을 사전 답사하는 사람들의 도시락을 챙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였으니 인간과 사회에 질문을 하여간 던져 보는 학문의 장에 뛰어 들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구나. 그럼 대체 순애의 마음이 저렇게 흔들릴 때까지 뭘 했나? 하루에 조금씩 시간을 내어 기타를 연습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되든 안 되든 머리 싸매가며 순애를 휘어 잡을 시를 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뭘 했나? 이도 저도 안 되면 시인 이 상이 금홍이 데리고 술 먹는 자리에 어떻게든 껴서 한 수 배워 보려고 노력을 하든가. 이수일은 이후 '보헤미안'이 되어 '부르주아'를 상대하는 길을 택하지도, 독립 운동에 투신하는 '투사'가 되어 아우라를 내뿜는 길을 택하지도 않은 채, 그도 또한 '부르주아'가 되기 위한 길을 걷는다. 

이후의 내용은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나열해 보자면. 이수일은 결국 '그 시절'에 고리대금업자의 밑에 들어가 악착 같이 돈을 모으려는 선택을 한 와중에 그 고리대금업자가 죽어 버려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고, 오호 횡재라, 한편 심순애는 자신의 '죄'를 뉘우친 채 - 여자가 다이아몬드를 보고 헷가닥 하는 것이 죄라면 남자가 섹시한 여자를 보고 헷가닥 하는 것은 정말이지 큰 죄다. - 대동강에 투신 자살, 아이고 맙소사, 하려다, 수일의 친구인 '낙관'에게 구출 되고, 등장인물 이름 한 번 참, 두 사람은 낙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남녀관계에 왠 제3자? 이게 뭐 KBS [사랑과 전쟁]인 줄 아나, 다시 재결합. 끝. 아아. 누가 [이수일과 심순애]를 신파극이라고 했는가. 정말이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버금가는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극 자체를 벗어나 극의 바깥을 살펴 보아도,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이수일과 심순애]는 1897년부터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 되었던 [곤지키야샤]라는 소설을 한국어로 번안한 작품이다. 또한 [곤지키야사]는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문 소설 [여자여, 약한 것]을 각색한 것이다. 물론,  21 세기를 살아가는 지혜는 약한 것이 여자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에 사로 잡혔던 19 세기적 사고 방식을 극복하는 것이다. 


  1. (2009년 06월 03일) 한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니 결국 이 영화 [물랑루즈]가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돈을 댄 사람은 '공작'이 아니던가. 그리고 영화 관람비를 내는 것은 '보헤미안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 영화 관람비를 통해서 돈을 번 건 '공작'이 아니던가. 어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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