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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에세이 2008. 6. 3. 00:13
느 날 TV를 보다가 다이아몬드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내용은 빤하다. 다이아몬드를 통해서 여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는 내용이다. 저게 먹히나?

먹힌다. 적어도 영화 [색, 계]를 보면 이장관(양조위)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이장관과 왕가지(탕웨이)사이의 보는 사람까지도 집어 삼킬듯한 '色'과, 그 '色'이 물질로 형상화 된 바로 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다. 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은 참으로 압도적이다. 내가 영화를 보고 있던 극장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탄성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감정을 좀 더 자유롭게 표출하는 한국의 극장에서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여인네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그 장면에서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을 것은 당연 지사다.

다시 다이아몬드 광고로 돌아가서. 그 광고를 보면서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에 사로 잡혔다. '내가 과연 다이아몬드를 여자에게 사 줄 만한 경제적 능력을 갖추게 되는 날이 올까?' 이런 생각을 내쫓기 위한 방법은 바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떠올리면서 '그래, 다이아몬드라는 것이 결국 제 1세계가 제 3세계에 대해 자행하는 착취의 결과물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진보적이긴 하나, 어째 좀 재미 없고 패배적이다.

이 시점에서 떠올려야 하는 또 다른 다이아몬드는 바로 [이수일과 심순애]에 나오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다.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신파극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내용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그 시절에 대부호였던 김중배가 이수일의 연인이었던 심순애에게 물질 공세를 퍼붓고, 특히 다이아몬드를 선사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이 등장한다. 이수일이 심순애를 매몰차게 내치면서 말한다. "순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단 말이더어냐아?" 심순애가 이수일의 바짓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흑흑흑. 아니어요. 수일씨이. 아니어요." 아이구야.

잠시 이수일이 얼마나 찌질한 인간 인지 증명하는 것을 뒤로 한 채,

영화 [물랑 루즈][각주:1]를 살펴 보자.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 영화를 봤을 것이다. 물랑 루즈를 들락거리는 모든 남자들의 로망인 여신 샤틴(니콜 키드만), 그에게 다이아몬드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극장을 지어주겠다면서 무차별 물량 공세를 퍼붓는 '부르주아 귀족' 공작. 허나 그러한 샤틴을 사로 잡는 것은 다름 아닌 돈 한 푼 없는 '보헤미안 예술가'인 시인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 지지고 볶고 노래 부르고 한 끝에 죽어가는 샤틴의 사랑을 얻은 것은 크리스티앙. '공작'은 돈은 돈 대로 대준 끝에 끝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자기 이름도 말할 겨를 없이 끝까지 그저 '공작'으로 남은 채로 불쌍하고 쓸쓸하게 극에서 퇴장한다.

자, 수일아. 그래, 순애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해서 자넨 대체 뭘 했나? 보아하니 도시락 폭탄을 제조하는 지하실 앞에서 휘휘거리며 망을 보는 사람들에게 물을 떠다 주지도, 하얼삔역을 사전 답사하는 사람들의 도시락을 챙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였으니 인간과 사회에 질문을 하여간 던져 보는 학문의 장에 뛰어 들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구나. 그럼 대체 순애의 마음이 저렇게 흔들릴 때까지 뭘 했나? 하루에 조금씩 시간을 내어 기타를 연습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되든 안 되든 머리 싸매가며 순애를 휘어 잡을 시를 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뭘 했나? 이도 저도 안 되면 시인 이 상이 금홍이 데리고 술 먹는 자리에 어떻게든 껴서 한 수 배워 보려고 노력을 하든가. 이수일은 이후 '보헤미안'이 되어 '부르주아'를 상대하는 길을 택하지도, 독립 운동에 투신하는 '투사'가 되어 아우라를 내뿜는 길을 택하지도 않은 채, 그도 또한 '부르주아'가 되기 위한 길을 걷는다. 

이후의 내용은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나열해 보자면. 이수일은 결국 '그 시절'에 고리대금업자의 밑에 들어가 악착 같이 돈을 모으려는 선택을 한 와중에 그 고리대금업자가 죽어 버려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고, 오호 횡재라, 한편 심순애는 자신의 '죄'를 뉘우친 채 - 여자가 다이아몬드를 보고 헷가닥 하는 것이 죄라면 남자가 섹시한 여자를 보고 헷가닥 하는 것은 정말이지 큰 죄다. - 대동강에 투신 자살, 아이고 맙소사, 하려다, 수일의 친구인 '낙관'에게 구출 되고, 등장인물 이름 한 번 참, 두 사람은 낙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남녀관계에 왠 제3자? 이게 뭐 KBS [사랑과 전쟁]인 줄 아나, 다시 재결합. 끝. 아아. 누가 [이수일과 심순애]를 신파극이라고 했는가. 정말이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버금가는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극 자체를 벗어나 극의 바깥을 살펴 보아도,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이수일과 심순애]는 1897년부터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 되었던 [곤지키야샤]라는 소설을 한국어로 번안한 작품이다. 또한 [곤지키야사]는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문 소설 [여자여, 약한 것]을 각색한 것이다. 물론,  21 세기를 살아가는 지혜는 약한 것이 여자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에 사로 잡혔던 19 세기적 사고 방식을 극복하는 것이다. 


  1. (2009년 06월 03일) 한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니 결국 이 영화 [물랑루즈]가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돈을 댄 사람은 '공작'이 아니던가. 그리고 영화 관람비를 내는 것은 '보헤미안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 영화 관람비를 통해서 돈을 번 건 '공작'이 아니던가. 어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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