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10.31 한국어와 영어에 대한 생각

한국어와 영어에 대한 생각

에세이 2008. 10. 31. 20:04

예전에 빔 벤더스라는 유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극장에 찾아 가서 영화를 한 편 보았고,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꽤 인상 깊게 본 영화였던 것 같은데, 지금 그때 본 영화가 무슨 영화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 받았던 느낌이 영화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물론 한국말로 감독에게 질문을 했고, 영어로 통역이 되었다. (딱 한 명의 관객이 통역을 거치지 않고 영어로 직접 질문을 했다. 나는 그가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머지 관객들이 대체 그가 빔 벤더스에게 무슨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면 안 되는 거다. 언어 생활이라는 것도 다 소통하자고 하는 짓이 아닌가.) 독일 감독이지만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미국에서 영어로 영화도 많이 만들었던 빔 벤더스는 영어로 답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관객들이 질문을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감독님 영화 아주 잘 봤구요,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하나 같이 이 어구로 질문을 시작했는데, 통역자는 그 어구를 통역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쓸데 없거나 과도한 예의라고 생각했고, 또한 소위 '감독님'에서 느껴지는 권위적인 울림에 유난히 민감해 하면서 홀로 짜증을 내었다. 극장안에서 나와 영화 자체 보다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 

쓸데없는 권위나 권위주의를 질색하기 때문에 때때로 모국어가 싫어질 때가 있다. 내게 가장 익숙한 언어, 내 생각의 집을 짓는 언어가 싫어질 때가 있다는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하여간 그러하다. 광고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는 친한 후배 하나가 있는데, 그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두고 영어 연수를 다녀 왔었다. 얼마 전에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후배는 갑자기 언젠가는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한국의 회사원들이 꿈꾸는 유학, 미국 유학이란 학문에 대한 열정 보다는 다른 이유일 경우가 많다. 나도 회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고, 한국 회사의 뭐 같은 상황에 대해선 아주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배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면서, 자신은 영어를 사용할 때 좀 더 자유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호칭, 나이와 지위를 확인한 다음에 사용하는 언어의 색깔이 달라지는 수직적인 언어가 나를 옭아 맨다고 느낀 적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직 후 제멋대로 영어를 지껄이면서 자유로움을 느낀 적도 많았다. 

한국어가 통으로 둘러치는 느낌이라면 영어는 보다 직접적으로 파고 든다.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에 'Straight Shooter' 라는 표현이 있다. (좋아하는 한국어 표현 '뻘짓'이 은어인 것처럼 저 어구도 물론 은어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요점을 말하는 것/사람을 뜻한다. 그 은어를 배우는 순간, 내가 소위 '미드'를 좋아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한국어는 복잡하다. 정보의 교환에 있어서 약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호칭과 조사를 발음하는 그 순간, 정보의 교환은 비효율적이게 마련이다. 때때로 한국어는 허술하기도 하다. 주어와 목적어는 때때로 -아니 대부분-  생략되고, 이것인지 저것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대충 따져 보니 지금 하고 있는 언어 생활의 한 반은 한국어로, 또 그 반은 영어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한국어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리 하게 된다. 한국어는 내 모국어다. 내 관념과 느낌들은 한국어로 내 속에서 구성된다. 예외 없다. 학생카드에 찍힌 바코드, 돈의 액수, 전화번호와 같은 숫자를 읽거나 기억할 때 나는 'one two three four,,,' 로 기억하지 않는다. 예외 없이 '일 이 삼 사'이게 마련이다.[각주:1] 영어는 나에게 있어 제2의 언어다.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말하자면, 겉으로 내 뱉는 언어와 달리 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각을 통한 언어 생활은 여지 없이 한국어이게 마련이다. 또한 미국에 막 도착해서 대책 없이 영어를 내뱉던 시기와는 달리, 영어든 한국어든 원래 내 성향대로 조금 생각을 하고 조심스럽게 내뱉게 된다. 때때로 일 년 전의 내 영어가 지금의 영어 보다 더 나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표현이 내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어를 내 뱉을 때 그 경험과 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이 고스란히 나와 밀착되어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뻘짓'이라는 '소리'를 발음하거나 떠올릴 때면 내가 숱하게 저질렀던 '뻘짓'들이 생각난다. 어쩌면 단어의 의미 보다는 소리 자체가 나와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반대로 영어로 이야기 할 때 느꼈던 자유로움은 온데간데 없이 허공에서 주먹질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언젠가 부터 나를 사로 잡는다. 퍽, 퍽, 소리가 나지 않는 언어 생활. 

물론 시간이 흐르고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경험이 쌓이면서 아주 조금씩 영어라는 언어와 나도 결합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어, 예전에 내게 'straight shooter' 라는 표현을 가르쳐준 ESL 선생에게 영화를 같이 보자는 '작업' 메일을 보내는 뻘짓을 한 적이 있다. (그래, 이태리와 스웨덴 피가 섞인 늘씬한 금발 백인 여자였다. 비록 다리는 굵었다만. 어쨌든 '백인'이라서 수작을 붙였던 건, '절대' 아니다.) 남자 친구도 있는 여자 였지만, 관계도 별로 심각하지 않아 보였고 대화도 잘 통하고 서로 공통점도 많다고 생각한 나는 쓸데 없는 용기를 냈던 것 같다. 답 메일이 날라 왔다. 학생과 선생이 (나보다 두 살 어렸다.) 밖에서 일대일로 만나는 것은 부적절하다, 라고. 

그 순간 그녀가 사용한 'inappropriate 부적절한' 이라는 단어는 예전에 그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계기, 그러니까 클린턴이 르완스키와 집무실에서 '뻘짓'을 한 것에 대한 표현, '부적절한 관계 inappropriate relationship' 와는 완전히 다르게 내 속에 깊숙하게 박혔다. inappropriate, inappropriate, inappropriate, 왠지 학술적인 단어로 토플 공부 할 때나 나올 법한 저 단어는 내 '뻘짓'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영어를 통해서 받아 들이는 느낌이 점점 많아지게 되는 것이 나를 풍요롭게 만들기를 바랄 뿐이다. 아울러 마치 몇 십년 외지 생활을 한 사람 마냥 가끔 한국어가 애틋하게 들릴 때가 있는 것 또한 느낄 때도 있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는 struggle 이다. 스트러글. 이라고 발음할 때, 그 struggle 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뜻과 소리 자체의 느낌이 나 자신과 내 경험들과 함께 어우러진다. 의미도 좋고 소리도 좋다. 


  1. (2009년 7월 16일 추가)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할 것과 생각이 바뀐 것이 있다. 우선 혼자 있을 때 생각하는 것이야 한국어로 하지만,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거나 영문책을 읽을 때는 생각 또한 영어로 한다.

    또한 숫자를 일이삼사, 로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기억할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읽어 보진 않은 책인 [아웃라이어]에서 말콤 글래드웰은 아시아 사람들이 수학을 잘하는 이유로 보다 효율적으로 숫자를 기억할 수 있는 셈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위가 일, 단위에서 십, 단위로 바뀌어도 한국어로는 오-십오, 이런 식으로 앞에 하나의 글자만 추가하면 되지만 영어로 이야기하면 Five-Fifteen, 이런 식으로 표현이 아예 달라진다. [본문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