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09.03.29 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2. 2009.03.28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1
  3. 2009.03.27 감정의 과잉
  4. 2009.03.26 두 가지 X소리
  5. 2009.03.25 영화와 관련된 두 가지 X소리
  6. 2009.03.25 Make sense, Ple-ee-ase
  7. 2009.03.24 미국 내 한국 음식점 기획안 2
  8. 2009.03.17 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9. 2009.03.04 보험
  10. 2009.03.02 소비 消費
  11. 2009.03.01 다시 들추어 본 뉴욕 관광기

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에세이 2009. 3. 29. 03:00

하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의 당선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그 동안 간헐적으로 드러났던 '시대 정신'이 구체적인 실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등장한 모습에 몸서리 쳤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정책이고 뭐고 간에 그냥 저 한 사람, 저 대표자, 가 싫다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한국 땅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 당선, 그 이후에 전개된 별의 별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미국 땅의 현실에 좀 더 신경을 쓰기로 마음 먹게 한 계기도 되었다. 앞으론 저 현실, 에 몸을 담그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 까, 하는 몽상을 하면서. 어차피, 2007년 팔월 말에 미국에 건너 오면서 몇몇 이들에게, 농담 삼아, '누군가,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미국 간다.' 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미국 '광우병' 쇠고기 수입 파문과 촛불 시위 소식, 을 전해 들은 것은 것은 2008년 오월 쯤이었던 것 같다. 그 파문, 을 접하면서 다소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나는 미국 쇠고기를 아주, 잘,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쇠고기가 한국에 수입되는 것에 대해 특별히 내가 발언할 이유가 없었다. '광우병' 쇠고기, 라는 수식어는 과장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 위험을 과장하고 있는 듯한 각종 선전물들이 거슬렸다. 미국 쇠고기가 그 미국 내 검역 기준 그대로 수입 된다면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농촌의 피폐함과 농민에 대한 걱정? 글쎄다. 아무튼 지금까지도 아직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오히려 주목했던 것은 그 이야기, 를 처음 한 어느 유학생 녀석이 그간 난 대통령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 이 없었는데 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 녀석과 쇠고기를 사다가 구워먹은 적이 있었고, 문득 그 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표현에서 예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생각났다. 

2008년 유 월 초, 대략 십 개월 만에 한국땅을 밟았다. 때맞춰서 촛불 시위가 좀 더 격렬해져 있었다. 나는 그 촛불 시위에 가고 싶었다. 가서 보고 싶었고, 가서 느껴 보고 싶었고, 가서 동참, 하고 싶었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대한 내 혐오감, 과 내 반대 의식을 가서 표출 하고 싶었다. 내 개인과는 특별히 관계가 없어 보이는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라는 이유, 는 아무래도 좋았다. 보다 더 적합한 구호나 이유가 있었더라면 나는 더욱 더 좋아했겠지만. 


두울,

촛불 시위에는 나와 내 친구 두 명이 함께 했다. 우리의 그 촛불 시위 참가, 가 관광, 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오랜 만에 만난 기념으로 홍대에서 술을 먹었다. 촛불 시위, 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광화문, 으로 향했다. 싸우러 간다거나, 비장한 각오, 이런 것은 없었다. 솔직히 나와 내 친구 두 명을 이끈 가장 강한 동인은 호기심,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내 분노, 를 과연 이 촛불 시위, 를 통해서 표출 할 수 있기는 할까, 를 고민했다. 

시청 역에 내리니 가장 먼저 나를 반겼던 풍경은 아스팔트 포장 도로 곳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잡상인' 들이었다. 종로 거리에 죽 늘어선 갖가지 길거리 음식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어쩌면 그 촛불 시위, 의 숭고함, 을 저 '잡상인'들이 망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내겐 그 잡상인, 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각주:1]

광화문 사거리에 가까이 갈 수록 열기가 느껴졌다. 함성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앞으로 앞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마침내 이순신 장군 동산 밑에 전경 버스가 일렬 횡대로 앞 길을 탁 가로 막고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곳에 이르자, 문득 밤하늘이 붉게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일렬로 늘어선 전경 버스는 왠지 이 모든 거대한 부조리, 를 상징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전경 버스 위에는 젼경 들이 마치 개미떼 처럼 포진해 있었다. 머리 속은 하얘지고,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나를 휘감았다. 저걸 뚫어야 한다. 저걸 뚫고 지나가서 청와대로 가야 한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왠지 청와대로 진격해서 그 대표자, 를 끌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이 들기 시작했다. 




깃발 들이 나부꼈고, 마이크에서는 열렬한 구호가 터져 나왔다. 다들 흥분해 있었고, 나 또한 흥분했다. 좀 더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싶어서 우회 했다. 일행 들과 삼청동 쪽으로 향했다. 교보문고 앞을 지나 우회하는 길은 좀 더 다른 풍경 이었다. 소위, 문화 시위, 답게 어느 인디 락 밴드의 공연이 한 켠에선 한창 이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종각역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안주와 맥주 캔이 눈에 띄었다. 서울 한강 고수 부지의 휴일, 같았다. 

삼청동으로 항하는 길에 군복을 차려 입은 예비역, 들의 무리가 눈에 띄었다. 군대에서 배운 대로 이열 종대로 열을 맞추어 행진, 하고 있었고, 그 오른 쪽 옆에는 소대장 역할을 맡고 있어 보이는 어느 해병 예비역, 이 인솔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친구 녀석이 장난 삼아 그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갔다. 반대편에서 걸어 오던 한 무리 중에서 어떤 여자 분께서 "군인 아저씨들, 수고 하시네요. ^^" 라고 말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환호를 보냈다. 군대 생활이 조금이나마 보상, 을 받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길을 가는데 어느 외국인 남성, 이 어느 한국인 여성, 에게 뭔가 영어, 로 말을 걸고 있었다. 이열 종대 속의 한 녀석이 그 외국인 남성, 에게 잠시 눈길을 주자, 그 소대장 역할을 맡고 있던 녀석이 그 녀석에게 타박을 주었다. "야, 뭐 들으면 뭔 소린지 아나?" 

삼청동 앞의 상황은 이순신 장군 동상 밑과는 달리 좀 더 격렬했다. 시위대와 전경 사이의 간극은 좀 더 좁았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욕설이 오갔다. 전경 버스의 철망을 뜯어내려는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한 시위자는 전경 부대의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과 계속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왜 못 지나가게 하는 거예요?" "좀 지나가자구요." "말을 안 들으니깐, 청와대 앞에 가서 얘기를 좀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세엣,

다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향했다. 이 곳도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더 격렬해져 있었다. 문득 홍대 입구를 배회할 만한 옷차림을 한 몇몇이 눈에 들어 왔다. 녀석들은 정확히 내가 한 때 생각했던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프랑스 68혁명 때는 말이야.."

어디 선가 밧줄이 등장했다. 그 밧줄은 전경 버스에 묶였고 사람들은 그 밧줄에 매달렸다. 나 또한 그 밧줄에 매달렸다. 그리고 밧줄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전경 버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뚫리는 건가. 우회하면서 본 바로는 일렬 횡대로 늘어선 전경 버스 뒤에는 다른 전경 버스들이 늘어 서 있었고, 더 많은 숫자의 전경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 밧줄을 잡아 당겨서 저 일차 벽을 무너 뜨리는 거다. 그러는 거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경 버스가 조금씩 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경 버스는 마치 연환계에 걸린 위나라 조조의 선단 처럼 굳게 서로서로 연결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힘들어 보였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더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울부짓기 시작했다. 때맞춰 노숙자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전경 버스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와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버스 위로 올라간 그 아저씨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몇 박자 지나지 않아서, 전경 들에 의해서 그는 버스 밑으로 끌려 내려 갔다. 

생각을 좀 해보기 시작했다. 결국 이 촛불 시위의 궁극의 목적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탄핵, 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라는 이유보다 나에겐 그 이유, 목적이 훨씬 더 설득력 있었고, 훨씬 더 와닿았다. 그때 스친 생각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내 스스로 그런 결론이 나자, 저 마이크를 잠시 빌려서 사람들를 선동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네엣, 

조금 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지쳐갔다. 문득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좀 휑하게 느껴질 무렵, 친구 녀석이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기분이 슬슬 나빠지고 있다면서. 기분이 슬슬 나빠지고 있다면서. 이대로 여기 계속 있다면, 결론은 이미 인터넷 방송, 들을 통해서 본 것 처럼 날이 밝게 되면 전경 들은 이제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몇 몇 사람들은 연행 되고 시위대는 뿔뿔히 흩어지게 될 예정이었다. 그 때 까지 버틸 여력이, 그리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종각역에서 택시를 잡았는데, 우리 보고 촛불 시위에 참가 했다 오는 길이냐고 묻더니만, 자기는 촛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태우지 않는다며 그냥 가버렸다. 겨우겨우 택시를 잡고 친구 집으로 향해 주린 배를 채우고 술을 좀 더 먹은 다음 잠을 청했다. 

이상이다. 


덧.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은 쿠데타, 나 체육관 선거, 를 통해서 권좌에 오른 것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투표자 중 49%의 지지를 업고 당선이 되었다. 실은 이 사실이 가장 끔찍하다. 그리고 그를 당선 시켰던 '문화적인' 환경, 은 아직도 크게 변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1.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사, 라는 것을 친구와 해 보았다. 나와 그 친구는 정든 서울, 을 떠나 멀리 지방, 으로 '유학'을 가 이제 바햐으로 산과 바다를 벗삼을 예정이었다.

    그 친구의 장사 아이디어, 는 대학 졸업식 시즌에 맞춰서 졸업식장을 돌아다니면서 셀룰로이드 필름을 팔자는 거였다. 충무로에서 필름을 싸게 도매가에 살 수 있는 곳도 이미 알아 놓았다는 말도 했다. 나보곤 자본금만 좀 투자하면 된다고 말했다. 녀석이 나를 꼬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 우리는 지방, 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울, 여자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여자들을 앞으로 만나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대충 그 여자들이 다니는 대학들과 그 주변 환경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은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연대 독수리 빌딩, 하면 아, 거기요, 하면서 아는 척을 한다든지 말이다. 왠지 몰라도 당시 내겐 꽤 설득력이 있게 들렸다.

    그리하여 우리, 는 일 월 과 이 월 대략 이 개월에 걸쳐서 대학 졸업식장 들을 배회하면서 기념 사진을 기필코 찍어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상가 이상으로 필름을 팔면서 폭리를 취했다. 곳곳에서 필름, 과 각종 먹을 거리, 를 파는 사람들에 섞여 우리도 필름,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숭고한 졸업식장, 을 개판 오분 전 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를 했다.

    그렇게 해서 구경하게 되었던 소위, 대학가, 라는 곳은 참으로 놀라운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강남역, 부근이야 어차피 유흥가, 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가, 주변에 서점이 즐비 하다던지, 고즈넉하다든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샘 솟는다든지, 하는 내 환상은 정말이지 순진무구한 착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어떤 여대, 옆 풍경이 가장 놀라웠는데, 그 곳은 모델 학원, 성형 외과, 코스메틱, 옷 가게, 화장품 가게, 로 즐비했다.

    물론 맘에 드는 대학가, 도 있긴 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쏠쏠한 수익을 남겼던 장사, 경험을 기억 하면서, 나는 그 이후로 대략 반경 오 킬로미터 이내에 논과 밭과 산과 바다 밖에 없었던 내가 다녔던 대학을 좀 더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요즘은 다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니까 더 이상 필름, 깃발이 졸업식장, 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듯 하다. [본문으로]
: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인용과 링크 2009. 3. 28. 16:04

"창작에서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은 정확을 기하는 일이다. 그 뿐 이다. 풍차가 악마로 보이거든 주저말고 악마로 묘사해야 한다. 풍차가 풍차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풍차를 묘사하는 것이 좋다. 실은 풍차가 풍차로 보이지만,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으면 예술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뻔한 궁리를 이리저리 하여 낭만적임을 자처하는 멍청한 작가도 있다. 그런 자는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하지 못한다."

[나의 소소한 일상] 中.


생활

만족스런 일을 끝내고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차 거품에
아름다운 내 얼굴이
수도 없이 
비춰져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

[잎]  中.


:

감정의 과잉

짤막한 거 2009. 3. 27. 18:02

'일반적인 한국 영화'를 보면서 가장 싫었던 것은 바로 감정의 과잉이다. 영사막에 감정의 과잉이 넘쳐 날 수록 관객인 나는 영사막에서 소외된다. 감정의 과잉이 있는 영화들은 하나 같이 배우 지들 끼리 공감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추측하건데, 영화 촬영 현장에선 현장 사람들끼리 역시 공감하고 넘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들끼리 공감을 하고 넘어갈 수록 대체로 관객은 공감을 하기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연장해서 생각해 보면, 소설이든, 칼럼이든, 에세이든, 주장이든, 논평이든 간에, 글에서 감정의 과잉이 있을 수록 읽는 이인 나는 오히려 더더욱 차가워 진다. 영화이든, 글이든, 그 속에 넘쳐나는 감정의 과잉이 보는 이, 읽는 이, 인 나의 감정의 과잉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 언뜻 무덤덤한 듯 하지만 나를 감정적으로 뒤 흔드는 그런 걸 보고,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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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X소리

짤막한 거 2009. 3. 26. 09:05
하나,

놈들, 은 어쨌든 지금 껏 이겨온 놈들이다. 깨끗하건 더럽건 그 동안 게임의 규칙이 엉망이었건 어쨌든 간에 이겨왔기 때문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거다. 그래서 놈들, 과 싸우게 되면 더욱 더 철저하게 전략적인 측면을 고민해야 한다. 더 똑똑 해져야 한다. 한데 정말로 궁금한 것은, 전략을 고민하게 되면서 놈들, 을 닮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물음이다.


두울,

민간 의료 보험 제도를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돈,돈,돈 한다. 그 돈,돈,돈은 만약 자기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한다면, 그에 따르는 비용을 (그리고 시간을) 항상 계산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꿈, 을 말할 때 돈,돈,돈을 까먹어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다 더 현실적, 이다. 여기서 현실적, 이라는 말은 시민권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서 한인 교회를 순례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참, 현실적, 이군, 이라는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말과는 달리 구체적, 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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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련된 두 가지 X소리

짤막한 거 2009. 3. 25. 15:00

하나,

경험은 오감에 의존한다. 오감은 눈, 코, 귀, 입, 손(으로 상징되는 촉각) 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경험이 모든 오감을 모두 사용하면서 기억으로 머리 속에 저장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은 오감 중에 일부분만 사용하는 경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눈, 귀, 이렇게 이감에 의존한다. 꿈은 눈, 이렇게 일감에 의존한다. 이렇게 감각들을 통해 들어와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소위 기억, 이라는 것들은 혹시 실제로 경험한 것, 영화에서 보고 들은 것, 꿈에서 본 것, 이 뒤죽박죽 제 멋대로 뒤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시 뒤죽박죽 제 멋대로 뒤섞여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두울,

기독교에서는 죽은 뒤에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인가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어구가 있다, 고 기억한다. 예전에 문득 그 심판이라는 것이 있다면, 대체 어떤 방식일까, 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 간다.'라는 표현에서 영감을 얻은 내 상상은 이러 했다. 죽은 뒤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은 영화관이다. 의자는 달랑 하나. 그리고 영사막. 영사막에서 영사 되는 것은 그 동안 살아온 내 인생이다. 태어 난 이후 부터 죽기까지의 내 인생. 그 기간이 몇 년이 되었든 간에 하여간 처음 부터 끝 까지 주욱 지켜 보는 것이다. 내 생각엔 그 보다 더 가혹한 심판은 없을 것 같았다. 혹은 내가 그러한 심판을 원하고 있는지도.


덧. 쓰고 보니 정말 X소리다. 어느 정도로 X소리냐면, 딱 블로그에 써서 발행할 정도의 X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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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sense, Ple-ee-ase

구라 2009. 3. 25. 14:30

A short conversation among Americans.

A: Blah blah blah blah blah blah. Does it make sense?
B: What's your point?
A: I mean, blah blah blah blah blah blah. Does it make sense?
B: I still don't get it. what's your point?
A: What's your point?
B: It doesn't make sense.
A: That doesn't make sense ei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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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한국 음식점 기획안

구라 2009. 3. 24. 15:06

미국 내 한국 음식점의 문제점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제대로 '현지화' 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내 한국 음식점에 드나 드는 손님들은 한국인들이 대부분 입니다. (이를테면 원더걸즈의 Tell Me 열풍이 한국에 불었을 때는 한국 음식점에서 밥을 먹으면서 텔미 텔미 테테레테테 텔 미, 를 들어야 한다, 이 말씀입니다.) 음식 또한 너무나 한국적이라서 중국 음식, 베트남 음식, 타이 음식, 일본 음식 처럼 제대로 미국화 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미국 내에서 한국 음식의 '지위'는 우리가 우습게 여기는 '동남아' 에도 못 미칩니다.

두 번째로는 메뉴가 너무 다양하다 보니까 '한국 음식'하면 떠오르는 그 무언가 - 전문 용어로는 '브랜드'라고 하죠. -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 불고기요? 그러니까 코리안 바베큐, 말씀이신가요? 잉글리쉬 잖아요. 딤섬 Dim Sum , 이나 스시 Sushi, 처럼 그 원래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제대로 '브랜드'화 된 것이라 볼 수 있죠. 아, 김치요? 물론 김치는 한국 고유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영어로도 Kimchi 라고 하지요. 하지만 어디 가서 김치 한 사발 주세요, 라고 주문하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어디까지나 김치는 반찬, Side Dish 일 따름입니다.

세 번째로는 고급화 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중국 음식 같은 경우에는 다소 싸구려 음식으로 치부되는 경향도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고급스러운 차이니즈 레스토랑, 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중국 음식은 '짱깨집'과 '차이니즈 레스토랑'으로 양분되어 있지요.) 이건 베트남, 타이 음식도 마찬 가지 입니다. 일본 음식이요? 이것 보세요. 백인들이 그러는데요. 일본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은 고급스럽고 정갈한 것들이래요. 예외란 없어요. 

자, 이렇게 문제점이 파악 되었으니 이제 해결 방안을 모색해 봅시다. 문제파악(Problem)-문제해결(Solution). (벌써 제가 말하는 품새에서 미국 실용주의 Pragmatism의 내음이 물씬 풍겨오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음식의 '현지화'를 위해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대상이 되는 고객입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인종의 전시장, 문화의 용광로, 니 어쩌니 하는 말이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미국은 이 백여 년 전 즈음에 백인들이 세운, 백인 들의 나라, 인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백인이지요. 물론 이후 아프리카에서 엄하게 흑인 들을 끌어와서 이후 그 들은 농장에서는 노예로, 공장에서는 노동자로 일했고, 이어서 히스패닉인들이 이 나라에 들어 와서 갖가지 일들을 했고, 대락 백 오십 년 전 부터는 중국인을 위시로 아시아인들이 미국에 들어 와서 험한 세상에 다리도 놓고 철도도 만들었고 사탕수수도 재배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 이라는 나라의 '아이디어'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원래 예로부터, 노동, 보다는 생각, 을 높게 쳐주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리인 것 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소개할 한국 음식점의 주 고객은 백인입니다. 

아, 백인에도 두 가지 종류의 백인이 있습니다. 그 음식점에서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미국 산 자동차가 아직도 세계에서 최고인 줄 알고 있다거나 혹은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 Bible Belt' 지방에 살면서 '창조론', 혹은 '지적 설계론'을 과학 교과서에 집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백인들이 아니라, 민주당을 지지하며 버락 오바마를 당선 시킨 다음 미국이 전 세계에 팔고 있는 잘 포장 된 수출품, '자유'와 '민주주의' 가 살아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곤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잘 교육받고-진보적이며-도심지에 사는-백인들 Well-educated liberal urban white folks 을 주 고객 대상으로 합니다. 아무래도 이 두 번째 백인들은 '문화적 다양성' 이라는 가치를 '다양한 음식점'을 순례하는 것으로 실현하고, '젠 ZEN'으로 대충 뭉뚱그릴 수 있는 '동양 종교/문화'에 일정한 호기심을 보이는 둥, (동양인, 이 아닙니다) 앞으로 소개할 한국 음식점의 잠재 고객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한국 음식점의 개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새로운' 한국 음식점의 이름은 '음(陰)과 양(陽)' , 영어로는 'Yin and Yang'  이라 합니다. 주로 도가 사상 Taoism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음양사상, 만물의 조화를 뜻하는 음양사상은, 'Yin and Yang' 이라는 어구가 미국 어느 지역 신문에서 '형용사'로 이용될 정도로 미국 내에서 알게 모르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 쯤에서 중국에서 시작되고 발전 된 음양사상, 과 도교, 가 어떻게 한국 음식점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느냐, 라는 의구심을 품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음과 양, 혹은 도교 Taoism의 상징은, 




그리고 대한민국을 상징 하는 국기, 태극기는, 


이므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음식점 간판의 맨 왼쪽에 최대한 '미니멀'하게 'YIN & YANG' 을, 그리고 그 오른 쪽 옆에는 '태극 마크'를 삽입하면 좋을 듯 합니다. 다만 태극 마크의 색상이 빨강, 파랑, 의 원색이므로 촌스럽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군요. 간판의 맨 오른 쪽에는 음식의 '컨셉'을 설명하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겠지요. 

'음과 양 YIN & YANG' 의 음식 '컨셉'은 다음과 같습니다. Organic-Authentic-Vegetarian Korean Food Restaurant.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의 세 단어 입니다. 

Organic(유기농). 
특히 백인 여자들에게 신선한 오르르가닉, 한 음식을 먹는 것은 오르르가즘, 이나 진배 없습니다. 

Authentic(진짜의/진정한)  
스시 Sushi 의 본 고장인 일본에는 정작 '캘리포니아 롤'이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메리카, 에는 진짜, 가 아닌 것들이 넘쳐 납니다. 따라서 '잘 교육 받은' 아메리칸, 들은 진짜(로 여겨지는 것)들에게는 무지하게 열광을 보냅니다. 

Vegetarian(채식주의자) 
이건 따로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그럼, 대체 이 음식점에서는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어떤 음식을 파느냐, 하면 말입니다. 간단합니다.

음, 의 음식으로 '차가운 물냉면'을 취급합니다. 종류를 다양하게 하여 최소한 여섯 가짓 수 이상은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양, 의 음식으로 '뜨거운 돌솥 비빔밥'을 취급합니다. 안에 들어가는 야채는 최대한 손님의 선택에 맡깁니다.

'음과 양 YIN & YANG' 에서는 간결하고도 알기 쉽고 음양, 의 조화를 느낄 수 있도록 딱 저 두 가지 종류의 음식만 취급합니다. 절대로 여느 미국 내 한국 음식점 처럼 이것저것 취급하지 않습니다. 음료는 '식혜'와 '수정과'. 딱 이렇게 두 종류를 취급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식혜'는 '백색'이고 '수정과'는 '흑색', 에 가깝기 때문이죠. '음과 양 YIN & YANG' 에서는 모든 것은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집니다. 

내부 인테리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바는 없으나 전체적으로 '흑'과 '백'의 '바둑알'과 '바둑판'의 '컨셉'을 잘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예컨데 테이블을 '바둑판' 모양으로 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아예 '홀'에서 일하는 '웨이터/웨이트리스'도 알맞은 비율로 '남'과 '여', '흑인'과 '백인'을 섞어 역시 '음과 양'의 조화를 느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예전에 어떤 의류 회사 광고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죠.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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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에세이 2009. 3. 17. 08:02

무라카미 하루키.

1989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는 어떤 면에서 한국의 구십 년대 식, 을 정의한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불었던 하루키 열풍에서 나는 한 발 비껴 나가 있었다. 당시 [상실의 시대]를 한 번 슥 읽어 보았는데 반 쯤 읽다가 덮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2005년에서 2006년 사이, 하루키를 너무나도 좋아하던, 어떤 이, 의 영향으로 다시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고,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쳐 [해변의 카프카]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남은 문제라면, 그 두 권의 책 내용이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스를 타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하루키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예외 없이 전부 여자였다. 내가 주로 여자, 들을 관찰해서 인지, 아니면 여자, 들이 하루키를 남자들에 비해서 좀 더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예전에 잠깐 몸 담았던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 안내일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학생증을 제시하고 있노라니 마침 그 여자가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었는데, 나도 그 책을 읽었노라며 척, 을 했더니 한국에서도 하루키가 번역이 되었냐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새삼스럽게 하루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 달 전에 하루끼가 '예루살렘상' 을 받은 것을 언급하고 싶어서다. '예루살렘상'은 이스라엘에서 2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북페어'의 실행 위원회가 개인의 자유와 존엄 등을 테마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게 주는 상, 이라고 한다.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침공했고, 위키 백과에 따르면, 2009년 1월 7일 까지 12일 동안 이스라엘인은 총 13명 사망, 523명 부상. 팔레스타인인은 총 1380명이 사망하고 5380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본에 있는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체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문제 삼고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그 상을 거부해 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단체로부터 그런 공개 서한을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다들 알 다시피, 결국, 하루키는 그 상을 받는 것을 선택했다. 이제, 하루키가 과연 예루살렘에 날아 가서 상을 받으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그리고 그가 한 말을 뽑아 대강 내 식대로 번역을 해 보자면,

"When I was asked to accept this award I was warned from coming here because of the fighting in Gaza. I asked myself: Is visiting Israel the proper thing to do? Will I be supporting one side?" the Jerusalem Post quoted him as saying. "I gave it some thought. And I decided to come. Like most novelists, I like to do exactly the opposite of what I'm told. It's in my nature as a novelist. Novelists can't trust anything they haven't seen with their own eyes or touched with their own hands. So I chose to see. I chose to speak here rather than say nothing."

"내가 이 상을 받아 들일 것을 요청 받았을 때, 가자 지구에서의 '전쟁' 때문에 이 곳에 오는 것을 경고 받았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것이 적당한 건가? 한 쪽 편을 들게 되는 건 아닐까? ... 몇 가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부분의 소설가들처럼, 나는 내가 말한 것의 정확히 반대 쪽에 있는 것을 하기를 좋아한다. 소설가로써 그런게 내 안에 있다. 소설가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거나 손으로 직접 만지지 전까진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와서) 보기로 선택했다.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보다 (뭔가) 말하기로 했다."

Murakami went on to compare humans to eggs. "If there is a hard, high wall and an egg that breaks against it, no matter how right the wall or how wrong the egg, I will stand on the side of the egg. Why? Because each of us is an egg, a unique soul enclosed in a fragile egg. Each of us is confronting a high wall. The high wall is the system which forces us to do the things we would not ordinarily see fit to do as individuals."

"단단하고 높은 벽과 계란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벽이 얼마나 옳고 계란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에 관계 없이, 나는 계란쪽 편을 들 것이다. 왜냐고? 왜냐면 우리 개개인은 모두 계란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영혼 하나하나가 깨지기 쉬운 계란 하나하나에 들어 있다. 우리 모두는 높은 벽을 마주하고 서 있다. 그 높은 벽은 우리에게 개인으로써 하기에는 잘 맞지 않은 어떤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We are all "human beings, individuals, fragile eggs", according to the author. "We have no hope against the wall: it's too high, too dark, too cold," he said. "To fight the wall, we must join our souls together for warmth, strength. We must not let the system control us – create who we are. It is we who created the system."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개인이고, 깨지기 쉬운 계란이다... 우리에겐 그 높고 어둡고 차가운 벽에 대항하는 희망이 없다. 그 벽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다같이 영혼을 따뜻하고, 강하게 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시스템'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게 놓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자. 우리가 바로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다."


저 기사를 읽고 나서, 바로 즉각적인 반응 하나가 내 속에서 솟구쳤는데, 영어로 된 글을 읽어서인지 왠일로 영어로 된 문장 하나가 솟구쳤다. 다음과 같다. 별로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What the HELL are you talking about?



나중에 그가 한 연설의 전문, 을 보게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읽어 보니 느낌은 또 달랐다. 확실히 그는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상을 받으러 갔다면 상을 주는 사람들 앞에서 답례 연설로써 뭘 더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 앞에서 말을 비비꼬는 것이 소설가가 가진 자질은 아닐 것이다.


덧. 어느 블로거가 번역한, 문예춘추 2009년 4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제1부.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 (2009/04/10)


일본.

그의 소설에는 분명 국적없는 개인, 으로 다가오는 매혹이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결국, 일본인이다. 한국을 식민지 삼았던 일본,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원폭 피해자로써의 일본, 을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중동에서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깡패 짓을 하고 있는 유태인/이스라엘,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나치의 학살 당사자라는 피해자로써의 자신들을 끈질기게 이야기 한다. (물론 하루키 본인은 일본인, 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것을 대단히 혐오하겠지만) 하루키가 이스라엘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예전에 동경을 여행 할 때 메이지 신궁을 구경하면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던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신사'와 '신궁'은 좀 다르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역시 그 곳은 단순히 '종교적이며 경건한' 공간만이 아닌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독일과 비교를 좀 해보자면, 

흔히 독일은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자신들의 과오. '나치'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고 그런 독일을 좀 일본이 본 받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면 독일, 이라는 나라는 일본, 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현대 독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나치'와 철저하게 분리, 단절되어 있다. 그렇게 비록 '나치'는 자신의 '과거'이되 지금의 자신은 그 당시와 철저하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나라다. 독일이 끊임 없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나치' 시대를 철저하게 배격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대 독일에 대한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반해 현대 일본, 은 '천황제'를 지금도 유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제국'과 완전하게 정신적으로 분리, 단절 되지 않은 채로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일본 총리가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감수하고 매번 야스쿠니 신사에 존경을 표하는 것에는 저러한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고 본다. '천황'과 '야스쿠니 신사'를 부정하는 순간 그 것은 현대 독일과 달리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일본 공산당'도 일본의 현실에 맞게 변형이 되어 천황제 자체를 반대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이 완전한, 소위 '반성'을 지금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느 나라가 더 '도덕적'이냐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라인홀드 니버가 이미 1934년에 이야기 했다.) 각각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천황'과 '신사'를 넘는 새로운 일본, 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일본에서 일어 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울러, '박정희'를 뛰어 넘는 새로운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 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 생각 들이 이어져서 글을 쓰긴 썼는데, 무슨 '국가'에 대해서 섣부른 일종의 '정신 분석'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원. 아, 그리고 링크 시킨 인용 출처 들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구글 검색을 해서 나오는 순서대로 인용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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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에세이 2009. 3. 4. 18:37

오랜 만에 잠시 만난 어느 녀석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녀석이 잠시 한국을 방문한 사이 '나이트'를 다니면서 많은 여자를 꼬셨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바람에 슬슬 지겨워질 찰나, 마지막에 만난 어떤 여자는 일종의 '보험'이라는 말을 듣고 오랜 만이라도 잠시 만난 것을 후회했다. 

'보험'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볼 때 나이는 찼으되 결혼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보험'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참 거시기했다. '보험'이라니, '보험'이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녀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을 한다는 것을 여자 꼬시는 데 십분 활용했으리라.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국에 놀러간 유학생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유학'이라는 단어 또한 한국에선 일종의 '형용사'로 기능한다. 한국에는 본래의 단어 뜻과 달리 이상한 용도로 사용되는 형용사가 참 많다. '뉴욕' , '동남아' , '서울대' , '유학' . 언젠가 형용사 사전을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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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消費

2009. 3. 2. 09:01

소비


사라지다 소
쓰다 비

써서 사라지다

음미할 수록
풍겨오는
허무한 매력

이렇게 
심오한 짓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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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추어 본 뉴욕 관광기

카테고리 없음 2009. 3. 1. 05:00

2004년 겨울,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보스턴, 그리고 마침내 뉴욕.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일기장을 들고 다니면서 대강대강 적고 나서, 관광을 끝낸 직후 한국에 돌아와 정리했던 글이다.


첫째 날.

뉴욕에 입성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911 테러를 맞은 그들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국제선 이상으로 뒤지고 또 뒤졌다. 신발까지 벗어서 검사를 그 속을 뒤지는데, 아마도 계속해서 걸었기 때문에 냄새가 지독했을 텐데, 조금 미안했다.[각주:1]

아무튼 이제 맨하탄으로 간다.

맨하탄 한 복판, 정확히 말해서 타임 스퀘어 지하철 역에서 지상으로 막 올라 왔을 때의 그 느낌. 그 느낌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그 때의 찌릿찌릿함은 헐리우드에 막 도착 했을 때의 그 느낌과는 비교가 안 됐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빌딩 벽을 가득 메운 광고판들. 아, 저기 삼성과 엘지도 보이는군. 보스턴의 한가로움과는 – 물론 보스턴 시내를 거닌 날이 일요일이긴 하나 – 정말 대비되는 바쁜 분위기. 게다가 건널목을 건너다가 차에 치일 뻔 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것과 같은 느낌. 

34th Street에서 OO이 만나다. 여전하군. Saigon Grill에서 베트남 음식 먹어 주시다. 역시 맛있다. 에드가 앨런 포 생가를 카페로 만든 곳에서 커피를 마시다. 분위기 있으셔. 거창하지만, 어줍잖게 삶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미국 여행 중 느낀 점, 안부를 주고 받고. 지금의 이 느낌을 최대한 즐겨 주시다. 


둘째 날.

본격적인 뉴욕 시내 관광. 자유의 여신상은 먼 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함. 그나마 안개가 껴서 잘 안보였지만. WTC가 있던 곳으로 가다. 폐허가 된 그곳은 여기저기에 기념물과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Reconstructing! , Rebuild! , Remember! [각주:2] 아무튼 그 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다시 세운다.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이 것을 기억하겠다. 결국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졌지. 뭐, 그 폐허를 보며서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어쨌든 미국 본토에 대한 첫 공격이 아니었던가.

American Stock Exchange에 들어가려고 시도하지만 거부당함. 9.11 이후로 견학이 금지 되었다는 가드 아저씨의 설명. Wall Street는 출근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들도 별로 없고, 빌딩 숲은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경험했고. East Village는 분위기 암울했고, 때맞춰 눈까지 내려 주시다. 근데 왜 눈이 내리는 데 우울하지? 암울한 이 곳을 벗어나서 다시 China Town으로 갔다. Dim Sum으로 점심을 때움. 맛있다. 

Soho에 가다. 옷, 빈티지, 뉴욕 스타일? (뉴욕 스타일이 있을까) Mac Center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니치 빌리지와 뉴욕대학교 그리고 필름 센터. 대학가, 옷가게들. 지나가다 Chicken Faita를 먹음. 구워서 주는데 맛있었다.

유스호스텔에서 잠시 쉬다가 그래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야경은 봐야겠고, 해서 나갔다. 11불이나 주고 올라가서 맨하탄 야경을 봤지만, 춥고 게다가 혼자라는 사실이 왠지 이건 청승이라는 생각만 자꾸 솟아오르게 했다. 담배 한 대 피고 바로 내려 왔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유스호스텔로 오는 길에 – 유스호스텔은 타임 스퀘어 한 복판에 위치함 – 42nd Street 지하철역에서 거리 공연을 보았다. 와우, 수준급인데? 멋진 Modern Rock 밴드.

유스호스텔에 돌아 오니 역시 일본애들이 한 바가지. 이래저래 이야기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그네들 봄방학이 3월 까지라는 사실. 그래서 이렇게 많았구만. 그 중에 키 150 센치미터 쯤 될까 말까 한 두 명의 여자 아이는 힙합 댄스를 배우러 뉴욕에 왔단다. 할렘에 있는 댄스 스쿨에 매일 출근 하신단다. 대단하다. 영어는 엉망인데, 넉살이 너무나도 좋으시다. 뮤양~. 그리고 일본어과를 다닌 다는 한국 여자애 한 명.


셋째 날.

늦게 일어 났다. 라이온 킹은 매진이라 결국 오페라의 유령을 예매했다. 차이나 타운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시내 관광. 성 패트릭 성당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그리고 돌아 다니는 것을 봤다. 여기 오는 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달고 돌아 다녔다. 뭔데? Ashes Wednesday란다.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그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Sony Plaza에 가다. 역시 소니. 삼성이 타임 스퀘어에 있는 소니 광고판 자리에 들어 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소니는 아예 이런 플라자를 가지고 있었군. – 지금 생각해보면 소니는 어쩌면 경영 악화로 광고판을 철수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 뭐, 그다지 즐길 거린 없었다. 초등, 중학생 정도라면 모를까.

UN빌딩은 포기하고 다시 타임 스퀘어로 왔다. 타임 스퀘어를 거닐다가 Toy’s R us에 들어 갔다. 장난감 천국에 역시 캐릭터. 캐릭터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갑자기 해버림.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봐두었던 니트를 결국 사버림. 젠장 87불이나 하는데!

OO이는 오늘 바쁘고, ㅁㅁ이는 내일 뉴욕에 오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유스호스텔에서 좀 쉬어야지. 그러나. 유스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날. 우울함에 퐁당 빠져버렸다. 여행 중 최대의 위기로 외로움을 느꼈다. 갑자기, 왜 내가 미국에 왔을까? 무얼 얻었는가?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그런 생각들이 이어졌다. 미국이란 나라를 짧은 시간이지만 보려고 간 것이다. 2주 밖에 안 되는 시간이긴 하다. 근데 생각해 보면 그냥 놀러 온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도 무언가를 꼭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온 것이긴 하지만. 

룸메이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녀석은 독일에서 DJ를 하는 녀석인데, 힙합 LP를 사기 위해 뉴욕에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 백장의 LP를 보여줬다. 각각의 LP가 중고가 많아서 싸게는 1불에도 샀다고 자랑했다. 음, 그렇군. 다른 한 녀석은 일본녀석인데 그 녀석 또한 Dance를 배우기 위해 온 녀석이었다. Jazz Dance. OO이는 XX 인스티튜드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와 삶을 나눌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어차피 결론도 안나는 생각. 갑자기 한 발자국 더 나아갈 때 한 가지를 더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1층 로비에 내려 갔다. 뭐, 특별한 거 없지. 일단 나가자. 나가는 길에 들어오는 뮤를 보고. 클럽에 가지 않겠냐고 물음. 오케이.

클럽 Lauahn으로. Party를 기대했지만 역시 수요일. 10명도 없었다. 썰렁하기 그지 없군. 너무나 늘씬하고 예쁜 바텐더를 흘낏 흘낏 훔쳐 보면서 맥주 한 병을 다 비웠다. 앞에 앉은 뮤는 그냥 그런 표정. 결국 나왔다. 나오다가 그리스 애하고 어쩌다가 이야기함.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 녀석 삼성 이재용 상무하고 골프를 쳤다고 자랑함.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무튼.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이라 조금 긴장이 되었는데, 생각 보다 안전하다고 느꼈다. 아무튼, 기분 전환이 되었다. 그나저나 힙합 클럽을 가야 쬐그만 뮤 녀석의 춤을 좀 봤을 텐데. 


넷째 날.

오랜만에 미국식으로 아침을 먹어 주시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다. 젠장 왜 또 일본이야. Japan! Japan! Japan! 왜 항상 일본 미술 전시 해 놓은 곳이 항상 클까? 정답은 그 녀석들이 돈이 많으니깐. 

아무튼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정말 컸다. 한 시간 짜리 투어에 참가했다. 할머니가 나오셨네 그랴. 노인 들이 할 수 있는, 하기에 적합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당당하고 멋있어 보였다. 

학교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이 그룹. 근데 다 교복 입은 흑인들. Private School도 백인, 흑인 따로 있나? 미술관 여기 저기에서 Suit를 입고 앉아 있는 흑인들. 저녁이 되면 Suit를 벗고 할렘으로 돌아 가겠지. Express 전철 탐. 할렘 바로 전 역에서 내림. 내릴 때 흘깃 보니 90퍼센트 이상이 Black. 

자신이 하버드 대학을 다닌 다면 그 문화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집단에 들어간 이방인이다. 둘 중 하나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집단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동화가 되던지. 아니면 떠나던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스쿨 타이], [죽은 시인의 사회], [여인의 향기] 등등.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생각을 더더욱 했던 것 같다. 분위기가 아무리 영국 귀족적 분위기건 어쩌건 간에, 거기에 다니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지 않은가. 어쨌든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버드생 한 명 만나보지 못하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

그리스 미술. 검은색 바탕에 갈색. 다 같은 형식이다. 뭔가 기념하기 위한 것들로 보인다. 그때는 아마 실용품이었을 거다. 하우저가 말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작이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본다. 거리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뉴욕의 자랑스런 말. The Capital city of Culture & Art란다. 그래 니 잘났다. 정치, 경제를 잡고 있으니깐. 자연스레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구나. 

아프리칸 미술. 아기를 업고 있는 여자와 화살통을 메고 있는 남자를 형상화 한 나무로 된 조각상을 보았다. 가이드가 Western Art와 달리 다 실생활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먹고 살 만해야 예술을 위한 예술도 하는 법.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는? 그 분도 자본주의의 혜택을 입으셨다. 물감이 대량 생산되지 않았다면 그 분은 물감도 사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의 그림들을 우리가 볼 수 있었을까?

인상주의에서 발길을 멈추다. 르누아르. 이 분은 검은색을 절대 쓰지 않았다지. 잭슨 플롯, 렘브란트, 브뢰겔, 루벤스, 다비드. 클로드 모네! 환상! 피카소는 절대 이해 안 되는 큐비즘 보다는 오히려 ‘청색시대’라고 불리는 우울한 그림들이 더 맘에 와 닿았다. 

초등학생들.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예술을 가까이 하면서 자란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오가고 있다. 

OO이를 만나기 전에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들어갔던 중국식당에서 먹었던 이상한 면. 중국식 짜장면인가? 색깔은 비슷한데 발냄새 비슷한 냄새가 심하게 나서 거의 버렸다. OO이를 만나 타카피 주스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고급 중국 레스토랑에 갔다. ㅁㅁ이를 드디어 만났다. 여전하다. 뮤지컬 시간이 늦어서 OO이를 두고 둘이 먼저 나와서 타임 스퀘어를 열심히 뛰었다. 5분 정도 늦었지만 다행히도 들여 보내 주었다. 

오우. 10분 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샹젤리제. 마에스트로 바로 뒷 자리. 재수! 무대 장치가 예술임. 역시나 많이 알아 듣지는 못했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뮤지컬이 끝나고 OO이를 다시 만나 향한 곳은 한국식 술집. 이런 저런 이야기. 


다섯 째 날.

오늘은 우드버리 쇼핑센터에 가는 날.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쇼핑 욕구를 한 번에 터트릴 시간이다. 그런데, 늦잠을 잤다. 다시 타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옆에 게이들 등장. 남자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속닥거리면서 음식을 먹는데, 속눈썹이 유난히들 기시다. 저런. 역시 맛있는 타이 아이스티. 그런데,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놓쳐 버린다. 짜증 이빠이. 우왕좌왕하다가 어쨌든 우드버리 아울렛에 떨어지다.

여기는 파라다이스. 왜 이리 싼 것일까? 

밤이 되어서야 돌아 왔다. 타운 하우스 앞에서 산 중국 음식, 그리고 맥주. 그리고 이야기. 이런 저런 걱정들. 쓸데 없는. 


마지막 날.

아침부터 무지하게 정신 없었다. 간신히 공항으로 가는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이번엔 가방을 사러 헤맸다. 토요일 오전이라 연 상점이 안 보였다. 돈도 거의 떨어지고. 아무래도 그냥 봉지에 넣어 잔뜩 싸 들고 가기엔 세관원이 두려웠다. 돈. 쓸 때는 쓰자. 

거기에 버스까지 고장. (그런데 왜 항상 여행 마지막 날은 이런 일들이 몰아 닥치는 걸까. 서둘러서 그런가?) 시간이 늦어서 조마조마 했는데, 출국심사는 불과 10분도 안 걸려서 끝나서 조금 허탈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할 필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음. 차선을 찾자. 이거 가장 크게 배운 것. 


후기. 

아직도 비행기 삯을 기억한다. 서울-샌프란시스코-엘에이-보스턴-뉴욕-서울, 이라는 구간을 무식하게도 몽땅 비행기로 연결했고, 당시 정확히 109만원 (세금 포함) 지불했다. 항공사/여행사를 이잡듯이 뒤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별로 읽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 데다가 생각 보다 읽을 거리도 별로 없는 '다시 들추어 본-' 을 끝내고 나니 그때 당시와 지금 내가 어떤 면에선 참 많이도 변했고 어떤 부분에선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 보니 유치한 구석이 너무 많아서 우스웠는데, 저런 유치한 구석을 지금은 얼마나 탈피했을까, 자문해 보아도 별로 좋은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위 문장 들은 사실 하나 마나한 소리고 결론은, 순간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어서 나름 좋았다는 거다. 이 글에 정보 가치는 거의 없지만, 읽는 누군가도 순간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면 좋을 것 같다. 


  1. 당시 난 일기장에서까지 착한 척을 하는 습성이 있었다. [본문으로]
  2. 첫 단어는 확실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확실하지 않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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