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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8.10 신윤복의 월야밀회 月夜密會
  3. 2009.07.13 미인 美人
  4. 2009.06.25 11.5%
  5. 2009.06.02 김 훈 단상
  6. 2009.05.25 돈 리 Don Lee
  7. 2009.05.18 영화가 끝나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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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9.05.01 외국인 떡실신 시리즈에 대한 생각
  10. 2009.04.21 박찬욱과 홍상수 9
  11. 2009.04.08 웨어알유프롬?
  12. 2009.04.07 다시 들추어 본 도쿄 관광기
  13. 2009.04.04 백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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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09.03.17 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16. 2009.03.04 보험
  17. 2009.02.25 재미있던 별자리 여행
  18. 2009.02.17 한국의 상징 잡설 1
  19. 2009.02.09 징글리쉬
  20. 2009.02.08 미국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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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009.01.17 영화관 내 화장실 앞
  24. 2009.01.14 비극
  25. 2009.01.13 영화 [밀크 Milk] 2
  26. 2008.12.29 가족 사진 1
  27. 2008.12.26 경건함
  28. 2008.12.20 현실과 스크린 사이 : 성적 소수자의 경우
  29. 2008.12.12 미국 종교사를 읽고
  30. 2008.10.31 한국어와 영어에 대한 생각

강남 8학군

에세이 2009. 12. 4. 18:04

홍정욱이 쓴 [7막 7장]을 가장 최근에 발견한 건 산호세 근처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친구의 아버지 책상 위에 그 철지난 책이 고이 놓여 있었다. 그 책이 자기 자랑과 치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 고백을 하자면 나는 그 책을 한국에서 유행이 되었던 당시, 꽤 재미나게 읽었다는 것이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그가 도전에 도전을 거듭해서 소위 성공을 거두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가 간략하게 묘사해 놓은 미국의 동부 문화와 서부 문화의 차이가 흥미로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서울의 강북 문화와 강남 문화의 차이를 묘사해 놓은 책은 왜 없을까. 

'국민학교'때 까지 도봉산과 북한산을 매일 보면서 등하교를 하다가 중고등학교를 강남(의 변두리)에서 다니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우리 집의 사정이 내가 강북의 국민학교를 다닐 때보다 강남의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더 어려웠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한 번도 내가 완전히 강남의 문화에 동화 되었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강남의 문화라는 것이 뭐 별건 아니다. 갖가지 브랜드 명칭을 줄줄 읊조린다든지, 대략 십 몇 만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게스'나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청바지를 입고 '캘빈 클라인' 티셔츠를 입고 추워지면 그 위에 '더플 코트'를 입는 정도랄까)

아직도 기억나는 TV에서 본 다큐멘터리가 하나 있다. '8학군'이라는 표현이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에 나온 다큐멘터리로 기억한다. 강북의 아이들과 강남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실험을 진행하는 다큐멘터리였다. 서로 다른 운동장에 각각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정해진 시간까지 운동장의 땅을 파서 뭔가를 만드는 과제를 주었다. 그 '뭔가'가 무엇인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메마른 운동장의 땅을 파야했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그 다큐멘터리는 친절하고 조곤조곤하고 간질간질한 음성해설이 없었고, 그저 그 다른 환경에서 자라난 두 집단의 아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험 결과는 예상 대로인데, 강북의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서 그 과제를 수행해내었다. 몇 명은 메마른 땅을 파기 쉽게 하려고 물을 떠왔고, 몇 명의 아이들은 또 뭔가 다른 일들을 했다. 강남의 아이들은 이기적으로 움직이다가 결국 하나 둘 씩 운동장을 떠났다. 강남의 아이들이 떠나고 난 뒤 이런저런 도구들이 어지럽혀진 채로 남아 있던 풍경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을 무렵에 나는 왜 도봉산과 북한산이 보이는 집을 떠나 강을 건너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당시 어머니는 우리 집의 형편이 어려워져서 친척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설명하셨거나, 아님 당시 다니고 있던 흑석동에 있던 교회가 너무 멀기 때문에 좀 더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던 것 같은데, 사실 둘 다 별 납득은 가질 않았던 설명이었다. 그리고 막상 다니던 교회는 이사를 간 뒤에 이름을 대면 바로 알 만한 소위 강남의 대형 교회로 옮겼으니까.

아마 '8학군'으로 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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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월야밀회 月夜密會

에세이 2009. 8. 10. 08:29



신윤복(1758~?)이 그린 [월야밀회 月夜密會]라는 그림이다. 좋아하게 '된' 그림이다. 물론 모든 그림이 어느 순간 부터 좋아하게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쓰는 건 내가 '의식적으로' 저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좋아하는 그림에 대해서 발표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엔 한국인의 숫자 보다 외국인의 숫자가 더 많았다. 그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일부러, 서양 화가의 그림이 아닌 한국 화가의 그림을 찾기 시작했고, 이 그림을 발견했다. 그리고 좋아하기 시작했다. 좋아하기로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2007년 가을 즈음이었다. 신윤복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이전이었다. 이후 서서히 그 열풍이 불기 시작할 즈음인 2008년 여름에 '간송미술관'에 저 그림을 직접 보러 갔었는데, 소장 작품 개방하는 것을 다소 까다롭게 관리하는 미술관의 규칙 때문에 저 그림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물론 '신윤복 열풍'이 불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내가 그 시점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았던 것이 한국 사회의 그 '어떤 분위기'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담, 잠시 비교적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된 그림을 소개해보자.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에곤 실레 Egon Schiele(1890-1918)의 '꽈리와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은 2004년에 출간 된 민음사판 소설 [인간 실격]을 통해서였다. 


"어느 날 나는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이 주루륵 꽃혀 있는 도서관 서가 앞에서 [인간 실격]이라는, 단호하고도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 맘에 들어 집어 들게 된다. 그리고 한 걸음에 읽어 내려가게 된다. 당시 내 감정 상태와 고민들과 맞물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쇠꼬챙이를 집어 넣고 휘휘 돌리는 듯한' 충격을 주었고, 나는 주인공 요조 ([인간실격] 주인공 이름을 따왔다고는 하는데, 왜 따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홍대 여신' 요조가 아니다. 요조의 노래는 들어 본 적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다. 그럴 시간에 역시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오지은이나 정민아의 음악을 듣는 편이 낫다) 와 다자이 오사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그제서야 책 표지에 있는 저 자화상을 쳐다 보게 된다. 주인공 요조와 저 자화상이 참 잘 어울리는 편이라고 생각했고 쳐다 볼 때마다 묘한 느낌을 주는 그림에 매혹된 나는 이제 에곤 실레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대형서점을 거닐다가 미술 코너에 에곤 실레와 관련된 책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잠깐 들춰 보게 된다. 관심은 좀 있으나 책 한 권을 (사고 싶진) 공들여 읽고 싶진 않았던 나는 그림들을 조금 감상하다 집에 와서 구글 이미지 검색을 통해서 에곤 실레의 다른 그림들을 감상하게 된다. 그러다가 에곤 실레에 대한 정보가 글쓴이의 의견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는 한 사이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더욱 에곤 실레라는 사람에 대해서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저 '꽈리와 열매가 있는 자화상'이라는 그림을 더욱 더 좋아하게 된다."


신윤복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공식적인 기록 빼고 그가 실제로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는 얘기. (그러다 보니 신윤복이 여자였다는 진부한 상상을 도발적 시도로 착각하는 듯이 보이는 드라마와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하다 못해 그의 생애 조차도 1758~? 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에곤 실레의 생애 1890~1918 처럼 1918-1890=28 이라는 간단한 산수를 통해서 만 스물 여덟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왠지 한 번 더 매혹되어 볼 만한 요소 조차도 없다. (물론, 에곤 실레라는 이름을 발음할 때 나는 소리는 신윤복이라는 이름을 발음할 때 나는 소리 보다 왠지 더 매혹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꽈리와 열매가 있는 자화상'은 그림에 찍혀 있는 낙관을 통해서 에곤 실레가 1912년, 즉 그의 나이 만 스물 두 살에 그렸던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월야밀회'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런데, 신윤복과 에곤 실레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신윤복이 김홍도의 제자였고 영향을 받았다는 '설'을 받아 들인다면, 둘 다 당대 유명한 화가였을 김홍도,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의 영향을 받아 들였으면서도, 그들의 스승들과는 다른 독특한 자기 만의 화풍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제, [월야밀회 月夜密會]를 감상해 보자.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림을 쳐다 보면 볼 수록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왼쪽의 남자는 군관 같다. 그 남자에 와락 안기어 있는 여자는 누굴까. 남자의 아내는 아닐 것이다. 같은 집에서 같이 먹고 자는 아내를 담벼락 밑에서 야심한 시각에 '어두운 밤 달빛 아래 몰래 만날 月夜密會' 이유가 없다. 오른 쪽에서 그들을 엿보고 있는 여자는 누굴까. 이들의 만남을 주선해 준 사람일까? 혹시 남자의 아내? 아님 길을 가다 이들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엿보고 있는 제3자?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 오른다.

이제, 그림의 '형식' 들을 감상해 보자. 먼저 구도. 인물과 배경의 배치가 매우 정밀하게 '계산'이 되어 있다. 왼쪽 위에는 달이 있고, 그 맞은 편인 오른 쪽 아래에는 담과 건물과 나무들이 슬쩍 보인다. 군관이 들고 있는 막대기는 위에서 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담벼락의 선과 맞닿아 있고, 그 선을 위 아래로 끝까지 연결하면 (왼쪽 공간이 조금 더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림을 전체적으로 이등분한다. 



이런 좌우 대칭 구도는 신윤복의 다른 그림 [기방무사 妓房無事]에서 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역시 이야깃 거리를 담고 있는 그림이다.



하지만, 역시 [월야밀회 月夜密會]에서 가장 중요한 구도는 사선 구도이다. 



신윤복은 그림을 그리면서 군관이 쓴 모자, 그가 들고 있는 막대기 (정확한 명칭을 모르겠다. 물론 저 남자가 군관이라는 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까지도 인위적으로 이 사선 구도에 일치 시켰다. 심지어는,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여자의 두 발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실제 사람이 취하는 자세를 옮겨 온 것이라 보기에는 대단히 어색하다. 그 두 발은 그림의 전체적인 사선 구도에 맞춰져 그려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쌍 남녀의 발들. 군관 남자에 안겨 있는 여자의 발은 그 여자가 이미 사선 구도 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문제는 군관 남자의 오른 쪽 발이다. 발 모양이 거꾸로 되어 있다.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여자의 발이 보기에 어색하다면 군관 남자의 발은 그냥 불가능한 자세다. 그런데도 저 남자의 오른 발은 뒤집혀져서 그림의 사선구도를 강조하는 기능을 하도록 그려져 있다. (이게 이 그림을 보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남자의 왼 발. 세 사람의 여섯 개의 발 중에서 유일하게 군관 남자의 왼 발 만 다른 방향으로 그려져 있고, 그 방향은 다른 모든 발들과 수직으로 되어 있다. 군관 남자의 그 왼 발은 왠지 묘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구석이 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 중의 하나인 '남근'을 한 번 사용해 보자면,) 저 발은 왠지 '남근'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으로 감상할 '형식'으로는 세부적인 선들과 색깔이 남아 있는데, 특별히 길게 할 말은 없다. 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들의 선들, 특히 군관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이 휘날리는 묘사가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도나 배치(layout)에는 비교적 민감한 편이지만 색깔에는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편이라서, 색깔에 대해서 특별히 길게 적을 말은 없다. 다만 담벼락에 기댄 여자가 오른 손에 들고 있는 붉은 어떤 것이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의 색깔과 대비되어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을 보태고 싶다. 


이상이다. 위에 적은 것들은 모두 그림을 오래오래 쳐다 보다 보니 발견하게 된 것들이다. 그럼, 이제 다시 [월야밀회 月夜密會]를 감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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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 美人

에세이 2009. 7. 13. 20:54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를 가로지르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은 번잡하고, 시끄럽고, 특색은 하나도 없는 프랜 차이즈 중심의 레스토랑으로 가득 차 있는 곳. 장점이 있다면 교통의 요지라는 것. 이건 한 이 년 전 까지의 기억이다. 서울은 워낙 모든 것들이 바뀌는 곳이니까. 바뀌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바뀌는 방향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곳이니까. 

그런 특색없는 공간에 특색있는 술집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미인'. 나이 드신 할머님과 할머님의 아들인 듯한 삼십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남자 분과 그 남자 분의 부인이 운영하던 곳으로 기억한다. 가게 바깥의 흰색 간판에는 신윤복의 미인도가 엷게 스케치가 되어 있었고, 내부 벽에는 미대를 나온 부인되시는 분이 작업한 추상화 몇 점이 걸려 있었다. 황태구이 안주와 맥주를 곁들이면 참 맛있었다. 자주 갔다. 자주라고 해봤자 다 합쳐서 열 번을 넘지는 않았겠지만. 그 곳을 발견하고 나선 각기 다른 그룹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도 모두 그 곳으로 데려 갔다. 갈 때 마다 그 안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테이블은 다 합쳐서 대략 일곱 개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한 테이블에 네 명씩 앉을 수 있다고 치고 테이블이 손님들로 꽉 차도 대략 스물 여덟 명이 들어 갈 수 있는 술집이었다. 

뭔가 강남역스럽지 않았다.


딱 한 번 스물 여덟 명을 모두 채운 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여느 때 처럼 황태구이와 맥주를 시켜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주 오랫동안 보아온 얼굴들이라서 사실 굉장히 새롭고 불꽃튀는 이야기란 없었는데, 문득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몇 명이 들어와서 맞은 편 벽의 테이블 다섯 개를 가리키면서 여길 좀 예약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많이 올 거라면서. 그리고 테이블을 모두 붙여 한 데 모은 다음 한 명은 다시 핸드폰을 붙들고 나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자리를 메웠다.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 그룹은 이내 우리의 주목을 끌었다. 모여드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우리 그룹도 남자 셋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어느 덧 열 몇 명이 모여 드는 데도 모임에 여자 한 명 없다는 사실은 무척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처음엔 같은 부대에서 근무를 한 군대 모임인가 싶었다. 하지만 테이블 마다 적당한 안주 하나씩 깔리고 술잔이 각각 놓였는데도,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 별 다른 대화가 없이 핸드폰 액정 화면을 바라 보거나 시계를 바라 보는 등 하나 같이 딴청을 피우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사람 들이 더욱 많아져 스무 명을 넘었을 무렵 드디어 모두가 기다리던 그 누군가가 등장했다. 모인 사람은 모두 남자, 그리고 그 누군가도 남자였다. 그 누군가가 등장한 이후로 그 술집에서 말을 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 밖에 없었다. 술집을 운영하는 나이 많으신 할머님과 할머님의 아들인 듯한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분과 그 남자분의 부인되시는 분도, 나와 내 친구 두 명도, 묵묵히 입을 닫은 채 그 누군가의 말을 경청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그 누군가의 말을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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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에세이 2009. 6. 25. 04:48

MUNI 버스를 기다리는데 신문 자판대에 놓여 있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San Francisco Chronicle   1면 기사 제목이 눈에 확- 들어 와서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해 보니,

 "(California) Stete's 11.5% jobless rate highest since 1941 | 실업률 11.5% 로 1941년 이후 최고조에 달해".


아니, 길거리 걸어다니는 사람들 열 명 중 한 명이 지금 직업이 없단 소리냐. 캘리포니아 주는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로 알고 있었는데, 미국 전체 실업률 9.4% 보다 더 높단 말이냐. 그래서 캘리포니아 주 재정이 파산 상태인 거냐. 그래서 다음 달 부터 MUNI 버스비를 한 번 타는데 1.5 불에서 2.0 불로, 월 정기권은 45 불에서 55 불로 인상하는 거냐. 그리고 기사에 두 번째로 달린 댓글을 보니, 

"We all know what would fix the unemployment problem, don't we? Imagine no foreigners. Yeah, I know, I can't say that. | 뭐가 이 실업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 안 그래? '외국인'이 없다고 상상해 보자구. 아, 그래, 알어.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그래, 188개의 추천과 180개의 반대가 달렸구나. 근데, 나야 여기서 순도 백 프로 '외국인'이지만, '니들'은 미국에 이민을 와서 시민권을 가지게 된 동양인들, 미국에서 태어난 동양인들 Asian-American, 도 '외국인'으로 취급하잖아. '니들'도 어차피 몇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다 이민자면서.

아니, 그리고 대공황이 공식적으로 시작된게 1929년 10월 뉴욕 주가 시장 대폭락인데, 정작 실업률이 11.7% 의 정점을 찍은 건 그로부터 대략 11년이 지난 뒤인 1941년 1월이었단 말이냐? 그렇담 2008년 9월 리만 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시작된 이번 '공황'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실업률이 무려 (캘리포니아 주 기준으로) 11.5% 에 도달 했으니 이젠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냐?  (링크 시켰던 기사 에서 "The state's peak unemployment rate was 11.7 percent in January 1941." 라는 문구를 보고 1929년 부터 시작 되어 세계 제2차 대전이 일어난 1941년 까지 이어진 대공황 당시 캘리포니아 주 실업률이 11.7% 가 최고였을거라고 '추측'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확대 해석이다. 대공황 당시 가장 높았던 캘리포니아 주의 실업률이 몇 프로였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미국 전체로는 23.6% 였다고 한다. 1941년 이전 수준으로 더 나빠질 수도 있겠다...) 근데 결국 미국이 대공황에서 빠져 나온건 1941년 12월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며 참전하게 된 세계 제2차 대전이 있고 나서 아니었나? 

음, 미국이 '악의 축'으로 꼽았던 나라 중에서 이란은 요즘 격렬한 민주화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고, 얼마 전엔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 Downtown 에서도 이란 민주화 시위 지지 시위가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란의 이번 시위는 이란의 '(누구신가, 가 그렇게도 강조하시는 목표인)국가 브랜드 향상'에 큰 공을 세우고 있지 싶다. 그래서 눈을 돌려 보니, 다른 '악의 축' 북한은 어느 덧 북한과 중국 접경지역에서 탈북자 실태를 취재하던 샌프란시스코 Current TV의 중국계, 한국계 미국인 여기자 두 명을 납치해서 12년의 강제 노동형을 때렸고, 여전히 핵 개발은 진행 중이시고, 이런 시절에 후계자 교체까지 진행하면서 권력 삼 대 세습이라는 초유의 일을 진행중이신 와중인데, 얼마전에 진행 된 한-미 정상회담에선 '강력한 대북압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지.

그래, 아무튼 실업률 11.5%라 이거지? 그래서 그저께 밤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맥도널드에 딸려있는 창고 옥상에 누군가가 올라가서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댄 것이냐? 대체로 흑인들과 소수의 동양인이 사는 이 동네에 왜 스케이트 보드를 옆에 낀 백인이 엄하게 와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단 말이냐. 불과 이십 미터 떨어져 있는 경찰서에서 아무도 오질 않길래 신고를 해야 하나, 근데 신고를 하면 무슨 '죄'가 성립이 되는 걸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매일 아침마다 "May I take your order? | 뭘 주문 하시겠어요?" 라는 낭랑한 기계음으로 내 단잠을 깨워주시는 Drive-thru 맥도널드 판매원도 여전히 주문을 받기에 여념이 없는 걸 보아 '사유지 칩입'으로 신고할 생각은 없는 듯 해 보여, 대체 무슨 말을 하나 잠시 귀를 기울여 보니 제대로 들리는 건 Fucking San Francisco 밖에 없었는데, 순간 저 인간은 무슨 이유로 San Francisco가 Fuck스러운걸까, 어차피 저리 소리를 지르는게 관심 받고 싶은 듯 하여, 밖에 나가 '대화'를 시도해 볼까 하다가, 참았는데, 아마도 1년 반 정도 전이면 대화를 시도해 봤지 싶은데, 지금 보다 호기심에 차 있던 시절이었던지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밖은 어느 덧 잠잠.

음, 창 밖을 보니 금빛 아치, 오십 개의 별과 열 세 개의 흰 색-붉은 색 띠, 가 바람에 펄럭이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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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훈 단상

에세이 2009. 6. 2. 11:45

2001년 출간 된 [칼의 노래]가 유행했을 때, 그 책을 서점에 한 걸음에 달려가서 사서 읽었다. 나중에 학교 내에서 중고책을 사고 파는 바자회가 열렸을 때 그 책을 바로 내놨다. 한 문장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 그 책에 담긴 김 훈의 감수성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이 흐른 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집을 읽었을 때는 문장들과 문장들에 담긴 사유를 좋아했다. 

어느 날 강남역 교보문고를 배회하고 있는데 주위가 소란스러워 둘러보니 단편집 [강산무진] 출간을 기념하는 김 훈의 팬사인회가 열리고 있었다. 어떤 이, 가 김 훈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싸인을 대신 받아 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뽑아 들어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었고, 말없이 책을 내밀었고, 그는 나를 한 번 쳐다 보고는 이름을 묻고는 싸인을 해 주었다. 그 때 그가 보여준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에 어떤 이, 의 이름을 대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는 그 책을 들고 집으로 왔다. 다 읽고 나서는 일주일 정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그 단편집에 담긴 허무가 날 사로잡아서 였는지, 아님 내가 그 당시에 말할 수 없이 허무했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이후 그의 장편 소설은 읽어 보려 한 적이 없었지만, 발표된 단편 소설은 모조리 다 읽었다. 

그는 분명히 유물론자이면서 이상(理想)을 믿지 않으며 가치가 들어가 있는 낱말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인데, 이상(異常)하게도 그의 문장들을 읽어 나갈 때, 어떤 정신적인 것들이 깃든다.

김 훈이 인터넷에 [공무도하]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몇 가지 면에서 주목된다.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한 김 훈이 쓰는 이번 소설의 주인공이 처음으로 기자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장편 소설 중에서 처음으로 시간적 배경이 현대로 설정되어 있다. 그의 말처럼 처음으로 '당대의 일'을 쓰고 있다. 아울러 굳이 정치적 성향으로 분류하자면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그가 현재의 '시국 상황' 아래서 연재하고 있는 이 소설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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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리 Don Lee

에세이 2009. 5. 25. 10:30

한국계 미국인 작가 돈 리의 소설 [Wrack and Ruin] 2008, [Country of Origin] 2004, [Yellow] 2001, 을 다 읽었다. 그의 소설을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건너 띄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쓰는 문장 자체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재미있고, 주제들이 하나 같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처럼 삶의 단면이 담긴 장면 하나를 찍어서 보여 주기도 하면서, 미니멀한 표현을 통해서 심층부에 깔린 본질을 잡아 내는 탁월한 솜씨는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레이몬드 카버의 흔적이 보인다. 한국 소설가 중에서는 이창동의 소설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얼마 전에 죽은 홍성원(1937-2008)의 소설집 [주말여행]과 비견 될 수 있겠다. 감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깊숙히 건드린다.

[Yellow]는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 소설 모음집으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여러가지 삶의 단면들을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 준다. 이 책은 문학사상사에서 2002년에 번역 출판 되었는데, 그 책과 관련된 언론의 상투적인 표현들, '정체성의 혼란으로 방황하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재단될 수 없다. 아무튼 단편 소설의 매력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Country of Origin]는 미스터리 소설로, 한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이에서 나온 한 미국 여자가 일본에서 시체로 발견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 된다. 대단히 흥미진진하고 복잡한 플롯과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 될 수록 조금씩 조금씩 진실이 밝혀지면서 결국에는 제목에 걸맞는 주제 의식을 보여 준다. 재미있다. 

위의 두 개의 소설에서는 물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옐로우'에서는 '국적' 보다는 '인종'에 대한 것이고, [Country of Origin]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띄고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므로 '한인 작가'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최근에 보급본으로 출간 된 [Wrack and Ruin]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 형제가 나온다. 한 명은 리버럴 아트 컬리지를 나오고 '뉴욕'에서 크게 성공한 예술가지만 그 경력을 뒤로 하고, 북 캘리포니아의 어느 조그만 가상 마을 - 작가가 설정한 - 에 조용히 살고 있고 뒷 뜰에서는 마리화나를 키우고 있다, 다른 한 명은 하버드를 나오고 투자 은행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인디 영화' 제작자로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으로 그가 자신의 형이 살고 있는 그 마을에 오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데, 풍자와 아이러니로 그득한 이 소설에는 특히 '아트 세계'에 대한 풍자가 일품이다. 이 소설에는 예술가 형이 자신이 크게 성공하는 계기가 되는 설치예술품을 한국의 창호지 문창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묘사를 제외하곤 '한국적인 요소'라곤 전혀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위치가 묘한 까닭은,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나온다. 흔히 볼 수 있는 1.5세대 나 2세대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3세대 한국계 미국인으로, 그의 아버지가 '미국 정부 외교부'에서 근무 했던 이력 때문에 어린 시절을 '서울'과 '동경'에서 보냈다고 한다. 부자는 삼 대를 가야 비로소 부를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 세대는 부를 쌓는데 전념을 해야하고, 이 세대는 그 쌓은 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면, 삼 세대 쯤 가면 이제 어릴 적 부터 풍요롭고도 여유롭게 자라났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거지에서 부자다움, 이 뚝뚝 묻어난다는 이야기다. (물론, 한국에선 아직까진 통용될 수 없는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일 세대 이민자는 어떻게든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며, 이 세대 이민자는 그런 부모를 보고 자라면서 좀 더 안정된 정착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삼 세대 쯤 가면 이제,,, 근데 여기 까지 쓰다 보니 어설픈 삼 세대 '이론'[각주:1]'에 어떤 이의 삶을 끼워 맞추는 격이 되어 버려서 그만 해야겠다.



  1. '이론'이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이자면,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이론'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이론'은 '스무 살 법칙'이다. 이 '스무 살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스무 살에 결혼하고, 예순 살에 죽는다. 간단하다. 스무 살 아리따운 여성이 마흔 살의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여자 마흔 살, 남자 예순 살까지 같이 산다. 그리고 남자는 죽고, 돈 많은 마흔 살 여자는 스무 살 잘생긴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여자 예순 살, 남자 마흔 살까지 같이 산다. 그리고 여자는 죽고, 돈이 많은 마흔 살 남자는,,, 적어도 이 세계 안에서는 돈과 미모가 공평하게 분배된다는 특징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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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에세이 2009. 5. 18. 06:22

...Movies have a hypnotic power, too. Just watch people leaving a movie theatre; they're usually silent, their heads droop, they have that absentminded look on their faces, unlike audiences at plays, bullfights, and sports events, where they show much more energy and animation. This kind of cinematographic hypnosis is no doubt due to the darkness of the theatre and to the rapidly changing scenes, lights and camera movements, which weaken the spectator's critical intelligence and exercise over him a kind of fascination. Sometimes, watching a movie is a bit like being raped.

[My Last Sigh], Autobiography by Luis Bunuel.

...또한 영화에는 최면적인 힘이 들어 있다. 극장을 떠나는 사람들을 한 번 살펴 보자. 대게 말 한 마디 없고, 고개는 떨구고 있으며, 저 마다 넋이 나간 얼굴들을 하고 있다. 연극, 투우, 운동 경기와 같이 생동하고 활기찬 것들을 보고 나온 관객들과는 다르다. 이 같은 영화의 최면적인 힘은 물론 의심할 바 없이 어둡고 컴컴한 영화관과 재 빠르게 바뀌는 장면, 조명, 카메라의 움직임 등에서 나오는 것으로, 관객들의 지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영화에) 매혹 당하게 만들어 버린다. 때때로, 영화를 보는 것은 이를테면, 강간당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마지막 한숨], 스페인 영화 감독 루이스 부뉴엘 자서전 中 중간 부분[각주:1].



극장에서 본 생애 첫 영화가 무엇이었는진 알 수 없다. 동네 친구의 아버지가 동네 친구와 나를 재재개봉관에 데리고 가서 본 제목도 기억 안나는 미국산 코메디 영화, 그리고 동시 상영된 [예스마담]일 수도 있고, 혹은 어머니 손을 붙잡고 지금은 없어진 신사동 씨네하우스에서 보게 된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일 수도 있다. 단지 난 흑백 영화 [모던 타임즈]를 보고 나온 뒤의 느낌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대낮에 극장에 들어가서 어두 컴컴한 곳에서 영화를 보고 다시 밝은 햇빛 아래로 빠져 나왔을 때, 다시 마주한 현실 세계는 물컹물컹하고 명료하지 않았다. 

[왕의 남자]를 보고 나왔을 때였다. 그 영화는 놀라운 걸작이라고까지 부를 순 없지만, 잘 만들어진 수작이었다.[각주:2]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예닐곱 층을 내려 오는 동안 둘 셋 무리지어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그 어떤 싸-한 공기가 맴돌았다.[각주:3] 난 그 순간 이 영화가 꽤나 인기를 끌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천 만 명이 넘을 줄이야.

또 다른 천 만 명을 넘게 동원한 영화 중에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가 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이은주의 얼굴을 열심히 쳐다 보았고, 장동건이 연기한 진태가 막판에 내뿜는 광기는 전혀 공감이 되질 않았다.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 1관 거의 맨 뒷줄에서 보았는데, 워낙 영화관이 커서 영화가 끝나고 줄을 지어 영화관 밖으로 빠져 나가는데 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꾸역꾸역 영사막 바로 앞까지 와 이제 막 출구로 나가려는 찰나,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언뜻 보기에 한 칠십 대 정도로 보이는 어느 노 부부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남편은 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삭히고 있었고, 부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남편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XX씨가 살아서 돌아오는 거 아니 잖아요..." 너무나도 스펙타클한 전쟁 장면이 실은 불과 몇 세대 전 한국 땅에서 일어난 현실임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는데, 그 상황과 그 부인의 '대사'가 너무나도 딱 떨어지는 것이라 지금도 사실 그게 내 정확한 기억인지 아닌지 가물가물하다. 

또 하나 기억하는 '대사'는 [올드보이]를 두 번째 봤을 때다. 첫 번째 처럼 영사막 가까이 다가가서 '강간'당하기를 기대하면서 보았는데, 두 번째 관람은 역시나 영사막에서 멀찍하니 떨어져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일어서려는 찰나, 내 앞 대 여섯 번째 줄 앞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 서더니, "...내가 만나면 아주 그냥 죽여 버릴꺼야!" 라고 나지막히 소리쳤다.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풀려난 뒤의 나이 쯤으로 보이는 그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아마, 저 아저씨가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는 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일거야. 근친상간 설정이 기분이 나쁜 거겠지. 근데 어쩌면 저 아저씨에게는 미도 나이 쯤 되는 딸이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아마도 그 딸을 보면서 적어도 한 번 쯤은 딸과 자고 싶다, 라는 괴물 같은 생각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었을지도 몰라. 물론 그 즉시 그 생각을 황급하게 치워 버렸겠지. 그래서 저렇게 과도한 반응을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난 그 즉시 이 생각을 황급하게 치워 버렸다.

종로 3가에는 서울 아트 시네마라는 극장이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장면'을 말하기 이전, 잠시 이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인사동 뒷 길 비릿한 돼지 고기 냄새를 맡으면서 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낙원상가 입구가 나온다. 극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 안에는 평소엔 마주할 일이 절대 없어 보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들어 있다. 한 부류는 나 자유롭고파, 옷 차림을 차려 입었거나 이마에 나 진지한 녀석이야, 라고 써 놓은 것이 보이는 둥 하여간 멀티 플렉스를 다니면 별로 마주치기 힘든 사람들이다. 주로 이 십대에서 삼십 대 중반 정도에 이르는 사람들로 그 들이 향하는 곳은 서울 아트 시네마, 라는 '예술 영화' 만을 전문적으로 틀어 주는 곳이다. 다른 부류는 남자는 주로 색이 들어간 정장에 보타이, 여자는 '토탈패숀'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옷 들로 한 껏 멋을 부린 차림새다. 주로 오십 대 이상 신사숙녀 분들로 그 들이 향하는 곳은 극장과 같은 층에 있는 '성인 나이트' 다. 이렇게 평소에 마주칠 일이 없는 서로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잠시 엘리베이터 안에서 함께 하는 참 재미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또한 서울 아트 시네마의 독특한 점은 홀로 와서 영화를 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마치 청담동에선 연예인을 보아도 호들갑 떨지 않고 '시크'하게 구는 것이 불문율이듯이, (그래야 연예인들이 청담동에 계속 오니깐.) 영화 감독과 배우를 보아도 역시 호들갑 떨지 않는 것이 상례라는 것. 

그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 장-피에르 멜빌[각주:4]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만든 [그림자 군단]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장-피에르 멜빌 스스로도 경험했던, 세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스에 맞서 싸웠던 '레지스탕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레지스탕스'라는 프랑스 단어에서 모락모락 풍겨오는 낭만적인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다. 폼나게 나치 일당을 때려 부수는 [인디아나 존스]류의 활극은 그 영화에 없다. 단지 조직 내의 배신자를 찾아 내어 처단하는 일에 대한 건조하고 정밀한 묘사로 영화가 꽉 채워져 있다. 아주 묵직한 영화이고 끝까지 보고 나면 진이 빠지게 되는 좋은 영화다. 그렇게 기진맥진해서 영화관을 빠져 나와 극장 내 화장실로 향했다. 단 한 남자가 입구 쪽에서 가장 가까운 맨 오른쪽 구석 소변기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 왼쪽 옆의 옆 소변기 앞에 나란히 섰고, (입구에서 가까우니까) 아직 까지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충격이 고스란히 나에게 남아 있었다. 그 충격은 남자가 화장실 안 소변기 앞에서 으레 하게 되는 일을 하는 와중에도 가시질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안 좋은 버릇 중의 하나가 소변기 앞에서도 평소와 다름 없이 괜히 두리번 거릴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문득 그 남자를 흘낏 쳐다 보게 되었다. 그 남자는 다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고개를 대략 육십 도 가량 천장으로 들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보통 소변기 앞에서는 정면을 쳐다 보거나 자신의 몸에 달린 것을 쳐다 보게 마련이지 허공을 쳐다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도 소변기 앞에서 권장 될 만한 시선 처리는 아니다. 하지만 허공을 쳐다 보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얼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남자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영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 순간 만큼은 영화를 보고 충격을 먹은 한 명의 관객으로 보였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상황들은, 모두 내 해석이 덧붙여진 것들이고, 어떤 것은 내가 기억을 재구성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Our imagination, and our dreams, are forever invading our memories; and since we are all apt to believe in the reality of our fantasies, we end up transforming our lies into truths. Of course, fantasy and reality are equally personal, and equally felt, so their confusion is a matter of only relative importance.
     In this semiautobiography, where I often wander from the subject like the wayfarer in a picaresque novel seduced by the charm of the unexpected intrusion, the unforeseen story, certain false memories have undoubtedly remained, despite my vigilance. But, as I said before, it doesn't much matter. I am the sum of my errors and doubts as well as my certainties. Since I'm not a historian, I don't have any notes or encyclopedias, yet the portrait I've drawn is wholly mine- with my affirmations, my hesitations, my repetitions and lapses, my truths and my lies. Such is my memory... 
 
[My Last Sigh], Autobiography by Luis Bunuel.

우리의 상상과 꿈은 언제나 우리의 기억을 침범한다. 우리는 줄곧 상상 속의 현실을 쉽게 믿어 버리고, 종국에는 거짓말이 참말로 둔갑한다. 물론, 상상과 현실은 모두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혼동은 (개개인에게) 상대적으로 각기 다르게 다가갈 것이다.
     비록 내가 경계는 하고 있지만,  '피카레스코'[각주:5] 소설에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주인공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미난 사건과 행동들로 차 있듯이, 이 반(半) 자서전에는 내 이야기들이 종잡을 수 없이 널려 있으며, 확실하게 잘못된 기억들 또한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말했듯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 확실함 만큼이나 내 오류와 확실치 않은 것 또한 나인 것이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나에 대한) 어떤 기록물이나 백과사전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기 묘사해 놓은 것들은, 확신과 우유부단함, 반복과 일탈, 진실과 거짓말과 함께 모두 나, 인 것이다. 말하자면, 내 기억들이다.

[나의 마지막 한숨], 루이스 부뉴엘 자서전  시작 부분.[각주:6]



  1. 내 식대로 번역해 보았다. 아직 이 책은 한국에 출간되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 아마존으로 주문했던 이 책을 이제서야 뒤늦게 들춰보고 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루이스 부뉴엘이 얼마나 유쾌한 사람이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물론 원문은 스페인어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영어판이다.) 루이스 부뉴엘에 관련된 서적은 [루이스 부뉴엘의 은밀한 매력]이라는 제목으로 문화학교 서울에서 출판 한 바 있다. (읽어 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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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은 정진영이 연기한 연산군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연산군이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장면, 창호지 창살을 손가락으로 드르륵 튕기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장면과 반군이 쳐들어 오기 직전에 광대들의 줄타기를 보면서 일순간 환하게 웃던 장면은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결국 하나의 영화는 한 두 개의 장면으로 기억이 되는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3. 물론 사람들은 대게 엘리베이터안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허나, 반례로 [여 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보고 나왔을 때가 있다. 이미 영화가 끝나갈 때 부터 객석에서는 영화에 대한 야유와 악담이 터져 나왔는데, 그 야유와 악담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태어나서 본 영화 중에 최악이야." 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 더, [여 교수의 은밀한 매력], [루이스 부뉴엘의 은밀한 매력]은 모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서 따온 것이다. 부르주아를 풍자하는 부뉴엘의 똘끼가 번뜩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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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 사람은 [백경(모비딕)]을 지은 미국 작가 허먼 멜빌 Melville을 너무 나도 좋아한 나머지 성을 멜빌로 바꾸었다.
    [본문으로]
  5. (나 처럼) 링크 여기 의 [2]. 장르별 소설 - 2. 건달소설 항목, 혹은 저기를 참고할 것. 설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소설 장르라고 느꼈다. 또한, '피카레스코'라는 발음에서 느껴지는 '우아함'과 뜻 자체는 거리가 참 멀지 않은가?
    [본문으로]
  6. 좋아하는 글들을 번역하는지라 재미는 있는데, 역시 번역은 어렵고 제대로 한 것 같지도 않다. 번역이 맘에 안 드신다면 원문을 읽으시길 바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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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받지 못한 자 감상

에세이 2009. 5. 6. 21:22

윤종빈 감독의 대한민국 군대에 관한 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각주:1]를 누구, 와 같이 보았다. 누구, 와 영화를 같이 꽤 보았는데, 그 중 한국 영화는 한 편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보니 나에겐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DVD, 윤종빈 감독의 [용서 받지 못한 자] VCD 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좀 셌고, [올드보이]는 나를 바짝 끌어 당겨 스크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만든 영화 긴 했으나, 최근에 다시 보니 별 다른 감흥도 일어 나지 않는 데다가, 그 안에는 그다지 한국적인 것도 없고 또한 한국에 가 본 일이 없는 누구, 에게 한국의 풍경, 을 보여 주기에도 적절치 않았다. 그래서 [용서 받지 못한 자]를 골랐다. VCD는 사 놓았으되 이 번이 두 번째 감상 이었다. 

[용서 받지 못한 자]가 한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어떤 이, 와 같이 보았다. 영화의 후반 부에 감독이 직접 연기한 어리버리한 신병이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하지만 차가운 대답을 들은 후에 절망한 나머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담배를 피우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야, 이제 저 새끼 좆 되겠다." 라고 내 뱉었고, 옆에서 어떤 이, 가 "왜?" 라고 물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영화관 앞 돌벤치에 앉아서 담배만 피워 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버스 정류장으로 항했고, 손을 들어 어떤 이, 에게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떤 이, 에게서 문자가 왔다. "수고 했어, 오빠." 참 고마웠던 그 문자 메세지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며칠 뒤에 같은 곳에서 감독과의 대화, 가 있었다. XX대 영화과 졸업 작품으로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옆에는 같은 학교 선후배로 구성된 스탭진들이 함께 했다. 조감독, 촬영감독, 미술감독, 등등. 질문이 오갔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뭔가 알 수 없는 '데자뷰' 현상이 느껴졌다. 나란히 앉아 있는 같은 학교 선후배인 그 들의 모습에서 문득 내무반에 정렬해 있는 병장, 상병, 일병, 이병의 모습이 느껴졌다. 

누구, 와 [용서 받지 못한 자]를 다시 보는데 몸이 무척이나 가려웠다. 오랜만에 모든 상황과 대사들이 내 몸에 바싹바싹 와서 닿았기 때문이었다. 누구, 는 나에게 역시 한국 사회, 는 대단히 폭력적인 것 같다고 말을 했는데, 별로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다시 보니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가 조금 작위적이고 관습적이었다.[각주:2] 어리버리했던 신병이 자살해 버리는 것, 그리고 그 어리버리했던 신병에게 잘 해주려고 했던 주인공 또한 자살해 버리는 것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 상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공감이 되질 않았다. 한편, 그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진행자가 두 주인공의 관계, 에서 동성애, 의 냄새가 난다고 질문을 해서 당시에는 좀 생뚱 맞았는데, 과도하게 죄의식을 느끼다가 결국 자살 해 버리는 주인공 녀석이 친구(하정우)를 통해서 계속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모습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난 카투사는 아니 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서울 용산 미8군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다. 막사의 1층과 2층은 미군들이 사용했고, 3층은 한국군이 사용했다. 막사 1층에는 미군들의 옷을 세탁하고 수선하고 구두를 닦아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미군에 고용되어 있었다. 'Out-sourcing 외부용역'이었다. 식당에서 우리들, 카투사들, 미군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은 모두 미군에 고용된 한국 사람들이었다. 눈이 오는 날이면 소대원들이 우르르 밖에 몰려 나가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제설 작업은 제설차가 대신 해 주었다. 미군은 돈이 충분했다. 

  1. 1960년에 존 휴스턴이 만들었던 영화 제목, 그리고 1992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고 주연한 영화 제목 [용서 받지 못한 자]에서 따온 것이다. 최근에 주목 받은 한국 영화 [똥파리]의 영문 제목은 [Breathless]로 이 제목은 1960년에 장-뤽 고다르가 만든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영문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2. 감독은 이에 대해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고 기억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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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떡실신 시리즈에 대한 생각

에세이 2009. 5. 1. 10:27

외국인 떡실신 시리즈, 가 인터넷 상에서 유행한다. (굳이 링크하지는 않겠다. 구글에서 '외국인 떡실신'을 쳐보면 한 바가지가 나온다) 저 시리즈가 사실이 아니라 픽션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왜 자꾸만 저런 것들이 유행하는 걸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보통 경제적인 발전과 문화적인 발전은 정비례를 이루어서 달려가게 마련이고, 경제적인 발전에 따라서 문화적인 것들도 발전하여 외국에 알려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기형적으로 경제적인 발전 정도가 그 문화적인 발전 정도에 비해서 훨씬 앞서있다. 불과 몇 십년 만에 너무나도 압축적인 경제 성장을 하느라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경제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예전 보다 더 많은 사람 들이 외국에 나올 기회가 생겼고, 외국에서 체류하는 일도 보다 더 많아 지게 되었다. 거기에 허울 좋은 IT 강국, 이라는 허명에 걸맞게 인터넷 망이 광범위하게 깔려 있고 인터넷 생활이 일상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외국의 모습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영어 열풍과 대학의 '국제화 바람' 으로 인해서 소위, 제1세계 외국인들이 여행하고 체류하는 숫자가 날로 늘어나면서 '외국'을 점점 더 가까이서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역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말해 주는 문화적인 어떤 것이 하도 적다 보니, 외국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많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외국인들이 관심이 없는 것은 상상 외로 훨씬 심하다. 마치 이건 내가 수리남, 이나 과테말라, 혹은 코트디부아르, 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과 일맥상통 하다. 쉽게 말해서, 어디서 왔어? 라는 물음에 한국, 싸우스 코리아, 라고 말한 다음엔 딱히 한국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든 경우가 다반사라는 소리다. 차라리 북한, 노쓰 코리아에 대한 이야기. 김정일과 미사일과 핵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면 모를까?

반면에, 어떤 한국인이 외국에 여행을 하거나 체류를 하게 되면, 그 경험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 어떤 한국인이 경험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어떤 실망감이 존재한다. 예컨데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 사람이 내친 김에 러시아를 여행한다고 하자, 그 사람이 한국 작가 어느 누구를 좋아하건 간에, 러시아인들이 그 사람이 좋아하는 한국 작가를 알리가 없다는 소리다.

게다가 옆에 붙어 있는 나라들, 일본, 중국이 하나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잘 나가는 나라들이라는 점이 한국인을 더욱 기분나쁘게 만든다. (나도 물론 기분이 나쁠 때가 많다.) 한국, 중국, 일본은 같은 인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 입장에서 볼 때 구별하기 쉽지 않고, 그 세 나라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이라는 문화적인 동질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자꾸 비교되기 십상이다.

이 모든 것이 중첩이 된 불일치가 발생하고, 그런 불일치를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서 저런 '외국인 떡실신 시리즈' 와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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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과 홍상수

에세이 2009. 4. 21. 05:40


영화 감독 박찬욱.

박찬욱의 영화를 대부분 좋아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올드보이]를 가장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 영화는 내게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보통 영화를 볼 때 스크린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재곤 하는데, [올드보이]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본 영화 중에서 내가 스크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본 영화다. 

그 이후에 만들어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대 실망이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내가 지금까지 그의 영화를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그래도 그의 다음 영화가 여전히 궁금, 하다. 한국에서 그의 새 영화 [박쥐]가 개봉한다고 한다.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투자를 받은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모양인데, 예전에 어디선가 얼핏 접한 바로는 그의 새 영화가 헐리우드의 투자를 받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국에서 투자 금액을 다 채우지 못한 결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선택'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그의 새 영화 [박쥐]가 궁금, 하다. 언제 어디서 보게 될 른지.


영화 감독 홍상수.

예전에 영화 감상 노트를 세 권 정도 작성한 적이 있다. 첫 째 권의 이름은 Dream, 둘 째 권의 이름은 Reality, 그리고 마지막 셋 째 권의 이름은 KINO[각주:1]였다. 제목이 유치한 까닭은 모두 스무 살 이전에 채웠던 노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과 영화에 관한 정보, 그리고 영화에 관한 간략한 감상으로 한 쪽 씩을 채웠다. 영화에 대한 별 다섯 개 짜리 별점도 어줍잖게 매겼다.

들쭉날쭉 내 편견대로 재미삼아 매기던 영화에 대한 별점을,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처음 보고 나선 '?'로 매겼다. 참 묘한 영화고, 영화가 좋았다고도, 좋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서른 살이 넘어서야 좀 이해가 가능할 것 같은 영화다, 라고 적었다. 

최근 작 [밤과 낮][각주:2]을 제외한 그의 모든 영화를, 적어도 세 네 번씩 반복해서 본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모든 인터뷰와, 그의 영화와 관련해서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영화 평론을 읽었던 것 같다. 아마 이창동을 제외하곤 한국의 유명 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일 것이다. 

이상하게 그의 영화에선 아무런 희망도 찾아 볼 수 없고, 인물들은 바닥의 끝을 드러 내며, 영화의 엔딩은 그야 말로 갑자기 불현듯 찾아 오는 데다가 아무런 결론도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모호하고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의 영화에 대해서 강한 적의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오히려 내가 혼란스러울 때 그의 영화를 보면서 도리어 위로를 받거나 머리가 맑아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건 취향, 일 따름 이다. 아무튼, 보고 싶었던 [밤과 낮]도 아직 못 봤는데, 그의 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개봉한다고 한다. 두 영화 다 언제 어디서 보게 될 른지 원.


평론가 정성일의 두 사람 비교. 

예전에 영화 평론가 정성일[각주:3],이 두 감독에 대한 을 쓴 적이 있다. 평론가 정성일은 2005년 7월에 [The DVD]라는 잡지에 기고된 이 글에서 박찬욱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 취향에서 풍겨 나오는 의문스러운 점에 관해서 논하고 난 뒤, 그 두 감독의 영화 취향에 한국 영화의 영향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나서 결국 그 들은 앞선 세대 한국 영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일종의 '아버지'가 없는 정신적 고아 신세라고 지적한 뒤, 그 결과 그들의 '한국 영화' 속에서도 정작 '한국'이 빠져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에서 '작가주의' 영화를 만드는 한국 영화 감독 들의 영화에 한국의 냄새가 나지 않는 다는 점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나는 앞선 세대 한국 영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영화 감독이 그 둘 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영화를 만드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 감독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유현목 감독을 제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감독, 하길종 감독을 제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젋은 세대 감독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영향, 이라는 것은 그냥 이것저것 보다가 받게 되는 것이지, '한국 영화사'의 맥락을 공부한 다음 일부러, 찾아 가면서 본 영화, 고전, 들은 사실 영향, 과는 별 관련이 없게 마련이다.)

조금 확장 해서 이야기하자면, 예전에 불었던 김기영 감독 재발견과 그에 대한 열풍도 영화 감독들이 '성장하면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미 장성한 뒤에 애타게 '아버지'를 찾아 해맨 결과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각주:4]

또한 평론가 정성일은 자신이 항상 되새김질 하던 프랑스 영화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의 그 유명한 말 -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 의 마지막 단계를 충실하게 실천 중이다. 어쩌면 그의 영화적 아버지도 결국 어느 '프랑스' 영화 감독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가 만드는 영화 제목은 독일 작가 괴테의 소설 제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다. (물론 그는 서른도 되기 전에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 했고, 그에 관한 책을 내기도 했다. 하여간 좀 아이러니. 하다.)

하여간, 그의 글의 논조와는 별개로, 내 주목을 끈 부분이 한 군데 있다. 평론가 정성일의 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렇게 대담을 좋아하는 저널 중에서 어떤 저널도 홍상수와 박찬욱의 대담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두 사람이 함께 칸에 있었던 2004년 실제로 수많은 저널들이 두 사람의 대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뛰었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말뜻은 서로 상대를 만나기 싫다는 것이다...


애초에 하고 싶었던 말.

보통 서로에게 무심하거나 관심 없다라는 것을 넘어서 싫다, 까지 가려면 비슷한 면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겹치는 부분이 없는 사람들끼리는 싫어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무심하게 될 뿐이다. 두 감독의 경우, 모두 삶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부조리함[각주:5], 을 다룬 다는 점에서 두 감독은 대단히 닮아 있다. 

박찬욱의 영화들을 살펴 보면, 영화사에서 기획한 작품에 고용 되어 남북 정상 회담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만나 대박을 터트렸던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의 흥행 실패로 인해서 보다 더 흥행에 신경을 썼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올드보이]와 같은 경우에는 물론 부조리함 뿐 만 아니라 비극적인 요소가 많이 첨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좀 더 자유롭게 만든 영화들,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는 보지 않아서 언급을 하지 못하겠다) [복수는 나의 것], [심판], [컷], [친절한 금자씨],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경우엔 부조리가 장면장면 그득그득하고 구조 상으로도 부조리극, 으로 분류 될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의 모든 작품이 한 마디로 말해서 부조리, 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공통된 냉소적인 정서와 부조리함, 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감독의 차이점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박찬욱 감독의 경우엔 부자연스러운 상황과 부자연스러운 대사와 부자연스러운 공간에서 부조리함을 만들어 내는 반면, 홍상수 감독은 자연스러운[각주:6] 상황과 자연스러운 대사와 자연스러운 공간에서 부조리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인물 들, [올드보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벽지, [심판]의 상황 설정, [컷]의 (너무나도 인위적으로 서구적이어서 조금 역겨운) 미장센, [친절한 금자씨]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교실 단체 살인이라는 상황 설정과 금자씨라는 인물, 그리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모든 설정들, 이 그러하다. 또한 그의 영화들에 사용되는 대사들은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들이 아니라 좀 극적인 나머지 때로는 연극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한 마디로 많은 것이 부자연스럽다. 

그에 반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흔히 그의 영화들을 수식하는 '일상적인' 이라는 형용사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단히 일상적인 장면들로 채워져 있고, 별 다른 극적인 상황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상황들을 현미경을 가져다 대고 본 다음 그의 방식대로 재조립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감독의 차이가 형식의 차이로도 이어진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보다 더 장르적이고, 대단히 스타일리쉬하고, 영상 자체에서 오는 쾌락을 다루는 것에 매우 능숙하고, 비비 꼬더라도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따르면서 극적인 구조를 포기하지는 않는 편이다. 반면 홍상수의 영화들은 뭐라고 딱히 규정할 수도 없고, 화면은 대단히 사실적이며, 영상 자체에서 나오는 쾌락을 다루는 것에도 무심한 편이다. (심지어,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영화 [강원도의 힘] DVD에선 끊임없이 마이크가 등장한다.)

좀 잡스럽게 늘어 놓은 것 같은데, 이 생각들은 예전에 어떤 녀석, 이 나보고 어떻게 박찬욱과 홍상수의 영화를 둘 다 좋아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듣고 꾸준히 생각했던 것들이 뭉쳐져서 나왔다. 지금은 그 때와는 달리 점점 더 홍상수의 영화 들에 좀 더 애착이 간다. 어쨌든, 아무래도 그 두 감독의 신작, 을 보아야지만 이 모든 것들이 좀 더 확실해 질 것 같아 보인다. 


  1. 러시아어다. 키노라고 읽는다. 극장, 영화라는 뜻이다. 물론 95년에 창간 된 영화 잡지[KINO]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2. 한국 DVD 시장의 붕괴로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본문으로]
  3. 솔직히 평론가 정성일이 쓴 많은 글들 중에서 현학적이면서 프랑스 철학 서적 번역체로 뒤범벅이 된 글들은 별로 읽을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씩은 너무 홀로 멀리 나아가서 혼자 만의 독백을 하기도 한다. 허나, 난 그가 영화에 대해서 매우 절실하고 치열하고 강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새 영화를 결국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될 것 같다. 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평론가는 김영진.
    [본문으로]
  4. 하지만, 그렇게 찾아 낸 '아버지'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 [하녀]는 대단히 세련된 '서구적인' 공간과 소도구를 통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보고 싶다면 여기, 덧붙이자면, 소위, '상업 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공간과 소도구를 통한 미장센을 잘 다루는 감독은 봉준호고, 소위, '예술 영화' 감독 중에선 홍상수, 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5. 비극과 부조리극은 엄연히 다르다. 예컨데 주인공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아 마침내 모랫 바람이 이는 절벽 위에서 원수를 만나 싸우다 그만 원수의 칼끝에 맞아 장렬히 죽게 되면 그건 비극, 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마침내 모랫 바람이 이는 절벽 위에서 원수를 만나 싸우다가 원수의 칼을 쳐서 떨어 뜨리고 난 뒤 그의 목에 복수의 칼끝을 겨누자, 그 원수가 "사실은, 내가 니 아비다." 라고 말하면서 끝나게 되면 그건 부조리극, 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그렇다고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찍는 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 현장 관찰기에 따르면, 홍상수 감독은 배우들이 자존심을 상할 수도 있을 만치, 동작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연출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의 영화 속 상황들은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그의 의도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소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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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어알유프롬?

에세이 2009. 4. 8. 08:23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한 바 BAR 에 앉아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술에 취한 녀석이 옷깃을 스치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더니만, 내 생김새를 보고 말을 걸어 왔다. "어디서 왔나? 일본인인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녀석과는 생김새가 다른 것이 가장 큰 화젯거리가 되는 거다. "아니, 한국인인데?"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한국인임을 상기시켜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외국에 나오면 내가 자꾸 한국인임을 상기시키게 된다. "그래. 북한은 좀 심각하지?" "응. 북한이 좀 심각하지." 비꼬는 감정을 담아 실어 보냈는데, 잘 전달은 안 됐을것 같다. 

너 '원래'는 어디서 왔니? Where are you 'ORIGINALLY' from? 나는 이 질문을 받아도 별 느낌이 없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양계 미국인'들은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에 지쳐있을 듯 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 가 내 앞에서 북한에서 미사일 발사를 했다는 '타임'지 기사를 펄럭이며 흔들어 댔다. 그러더니 '김정일'에 대해서 장난스레 묻는다. 내가 '김정일'을 어찌 아나. 그리고 난 '싸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그런데 그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 에 대해서 내 주변에 이야기 하면 전부 나중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러니까, 그 '중국애' 말야,,,' 아무리 대만, 에서 왔다고 말해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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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추어 본 도쿄 관광기

에세이 2009. 4. 7. 15:46

2008년 팔 월, 일본 동경에 오일 간 머물렀다.





내게 자신이 묵고 있던 기숙사 방을 제공해준 친구는 한국에서 논문 심사 준비를 해야 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과 달리 난 그 도시에 홀로 머무르게 되었다. 일본의 첫 번째 인상은 친구가 살고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공간들이 구석 구석 낭비 없이 잘 활용 되고 있었다. 화장실의 욕조는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었는데, 그 것 또한 화장실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었고, 한 개의 수도꼭지로 세면대와 욕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또한 공중 화장실에는 남성용 소변기 옆 마다 우산 걸이가 장착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디테일'했다. 순간 디자이너들이 일본에 와서 열광하고 간다는 소리가 생각 났다.

동경의 지하철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는 것을 넘어서 산 골짜기의 선사 마냥 정적이 흘렀다. 샌프란시스코의 버스 안은 곳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음악 소리로 난리 법석인데, 동경의 지하철은 정적이 흘렀다. 내 이어폰은 싸구려여서 음악들이 바깥으로 대부분 새어 나왔는데, 그 때 마다 친절한 일본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소리를 줄여 달라고 요청하고 갔다. 나중엔 지하철에서 음악 듣는 것을 포기 했다. 



시부야에는 사람이 많았다. 담배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피울 수 있었다. 처음엔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만 그 지정된 장소를 찾았다. 나중엔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정말 외로워질 때면 그 장소에 기어 들어 갔다. 한 무리의 사람 들이 잠시 같은 곳에 모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연기를 내뿜다가 다시 제 갈길 가는 느낌이 좋았다. 



메이지 신궁은 일본이 우리 나라와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전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근대화'를 시켰던 메이지 천황과 그 부인의 시체가 썩어 있는 곳이다. 그 곳을 방문하면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애써 지우자, 하늘 천, 자를 형상화 시킨 간결한 도리이의 미학이 나를 반겼다. 



관광지이지만 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고, 관광지이지만 관광지 특유의 요란하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다소 덜했다. 약간의 경건함이 느껴졌고, 그 곳에서 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다. 동전을 함에다가 던져 집어 넣고, 박수를 두 번 딱딱 치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별 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랫 동안 눈을 감고 있으려니 눈꺼풀만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참배 방법을 한 녀석에게 배웠다. 그 녀석은 내가 메이지 신궁에 들어 갈 때 부터 내 앞에서 줄곧 혼자 걸어갔다. 머리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샤기 컷을 했고, 허리에는 체크 무늬 웃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시부야를 배회할 법한 녀석이었고, 펑크 락도 좀 좋아 할 것 만 같은 녀석이었다. 그 녀석의 일상에 메이지 신궁이라는 공간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신주꾸로 향했다. 가부키초 1번가. 쾨쾨한 냄새를 벗삼아 보았던 많은 일본 만화들이 그 곳을 무대로 하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왠 흑인이 한국말로 말을 걸어 왔다. 업소 삐끼였다. 아무리 다소 불안하고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관광객의 행색이었다고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느 락 음악 공연이 열리는 곳에 도착 했다. 관객은 대부분이 이십 대 초반의 앳된 여자 애들이었고, 음악이 시작 되자 그 들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한 켠에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 되어 있었다.  

                                     
동경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에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들은 하나 같이 운동복에 가까운 복장을 하거나 자전거 택배일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복장들을 따라 가고 있는 데 반해 동경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패션에도 신경들을 쓰고 있었다. 동경은 대도시였다. 

셋째 날이 되자 문득 패션에 신경 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젠 체 하느라고, '세계로 간다' 류의 책이 싫어서, 정보가 보다 다양해서, 샌프란시스코 시립 도서관에서 빌린 '론리 플래닛' 영문판을 들고 다녔다. 슬슬 그 책에서 찾은 바 Bar 몇 군데를 들리기 시작했다. 맥주 값은 턱없이, 너무나 턱없이 비쌌다. 비싼 맥주를 먹고 나와 충동적으로 길거리에 놓여져 있는 자전거 몇 개를 잡아 당겼다. 세 번째 자전거는 중심이 약간 어긋나 있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넷째 날부턴 그 자전거를 타고 동경 시내를 돌아 다녔다. 마치 내가 이 곳에 오랫 동안 살아 왔던 사람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런 착각 속에 길을 잃었다. 그리고 펼쳐지는 서민적 풍경들. 그런데 그 서민적 풍경들이 구질구질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그 곳에서 외국인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서민적 풍경들 마저도 나에겐 이국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의 해악이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며칠 간 어딘 가에 머문다. 원래 들었던 풍문과, 보았던 영화와 사진들과 만화들이 여행의 들뜬 마음과 결합해서 현지에 대한 판타지를 마구마구 생산한다. 

어쨌든 정말로 멋진 바 Bar 하나를 발견해서 이틀 연속으로 갔다. 이름은 4, 일본어 발음으로 시-. 첫 번째 날엔 머리 색깔만 검고 이외수를 닮은 주인 홀로 있었다. 시부야역 바로 옆에 위치한, 기찻길 옆 바 Bar는 전철이 지나갈 때 마다 조금씩 떨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로 조금씩 더 떨었다. 주인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 보자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디제잉에 열중했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어 주는 바였다. 오 미터 길이의 나무로 된 바와 조그만 나무 테이블이 네 개, 조금 커다란 단체 손님용 테이블에 하나 있는 바였다. 주인이 손수 서빙을 하고 손수 음악을 섞었다. 두 번째 날엔 프랑스계 일본인 여자 바텐더가 있었고 여자 한 명이 바에 앉아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바 안으로 들어 갔다. 



                                        
그녀 옆의 옆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시키고, 먼저 바텐더에게 말을 건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여자 손님 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눈썹이 가늘었던 그녀는 화장기가 전연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치 허연 가부키 분장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평범한 오-에르, O.L, Office Lady, - 사무직에 종사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 - 라고 소개한 그녀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샌프란시스코에 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첫 대화는 쉽게 풀려 나갔다. 그리고 난 그녀 바로 옆 자리로 옮겨 갔다. 

그녀는 힙-홉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힙-합 아닌가요? 힙-홉, 홉, 홉. 끝내 힙-합을 힙-홉으로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그녀가 순간 귀여워 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내가 머리 속에 품고 있었던 귀여운 일본 여자, 라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딱 맞은 얼굴 이었다. 

난 일본식 서민 술집에 가서 꼬치 구이 냄새를 맡으면서 사케를 마시고 싶었지만, 멍청하게도 난 그 전에 그녀에게 나이를 물어 보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녀는 삼십 대 중반이었고, -얼굴은 분명 이십 대 중반인데- 애가 있는 이혼녀였다. 그래, 큰 상관은 없었지만,,, 조금 있으니 그녀에게 전화가 왔고, 그 전화는 집에서 애를 대신 봐주고 있는 자기 어머니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뒤에 내가 먼저 일어 났는지, 그녀가 먼저 일어 났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이름은 까먹은지 오래다. 단지 힙-홉, 홉, 홉, 을 힙-합으로 발음 하려고 노력하다가 관두었던 때의 귀여운 표정만이 생생하다. 

내심 마지막으로 생각해 두었던 어느 곳으로 향했다. 파티도 하고 분위기도 왁자하고 소위 '인터내셔널'들이 많이 들락거린다는 곳이었다. 들어가자 백인 남자 바텐더가 나를 반겼다. 사람들 중 십 중 팔구는 서구인이었다. 바텐더는 나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나는 젠 체 하느라고 나는 여행자요, I'm a traveler - 끽해야 동경 밤거리 방황하는 주제에 - 라고 말했다. 녀석은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발음은 그에게 troubler로 들렸다. 자전거를 하나 훔쳤으니 troubler 일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I'm a stranger, 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보다. 어쨌든 그 담에 날 반긴 건,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살았다고 하니 과도한 반가움을 표시하던, 자신을 캘리(포니아) 걸 Cali-girl 이라고 소개하던 바텐더였고, 나는 비싼 맥주를 몇 잔 또 주문하고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들을 자리를 옮겨 다니며 나누기 시작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땐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에 대한 강박이 스스로에게 조금 줄어 든다. 익숙치 않은 외국어라서 그럴 것이다. 

마지막 날이 마침 [인간 실격]을 쓴 다자이 오사무의 생일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묘는 동경 근처에 있었다. [인간 실격]은 지금까지 읽었던 중에 가장 강렬하게 읽었던 책 중의 하나다. 그 책은 내 속에 쇠꼬챙이를 쑤셔 넣고 휘젓는 듯한 충격을 주었고, 나는 십년 쯤 늦게 그 책을 발견하고, 읽은 것에 대해 분노 했다. 

누군가가 프랑스에 여행 갔을 때 고흐 무덤에 찾아가서 자신이 쓴 편지를 그 무덤 위에 올려 놓고 눈물기가 가시지 않은 촉촉한 자신의 눈을 담은 플라로이드 사진을 보여 준 일이 있었다. 나도 다자이 오사무의 묘에 가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지 않았다. 먼저 이미 누가 한 일을 내가 그대로 따라 하기 싫다는 유치한 어린 아이의 본능이 발동했다. (그 누군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고흐를 좋아하고, 하루끼를 좋아해서 한 때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쨌든 내가 좋으면 된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고민을 그쳤다고 했다. 여자라 그런지, 나보다 더 성숙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미 [인간 실격]에 대한 기억이 좀 가물가물 했다. [인간 실격]을 읽었던 기억은 십 대에 책을 접하고, 반복해서 읽고, 의지하고, 위로 받고, 그런 종류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 책에 매혹 되었던 기간은 강렬했지만 짧았고, 다시 또 다른 책과 또다른 영화와 또 다른, 또 다른 무엇에 매혹 되어 있었다. 

근데 실은, 무엇 보다 귀찮았던 거다. 굳이 그 먼길을 찾아가서 자살해 버린 일본인 묘 앞에 서기가 싫었던 거다. 그리고, 그때 엉뚱하게도 왜 김승옥은 그런 글들을 써제꼈으면서 80년 광주 이후에 충격을 받고 재미없게시리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버린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각주:1] 

샌프란시스코로 돌아 와서 동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 [Lost in Translation]을 보았다. AIR의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화면도 예쁘고, 빌 머레이의 감정 없는 얼굴 표정도 맘에 들고, 스칼렛 요한슨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는데, 문득 영화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어떤 일본인(아시아인)에 대한 비하적인 시선이 느껴져서 끝까지 보지 못했다.

이하 사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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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생각이 엉뚱한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 [르네상스인 김승옥] 에서 확인 한 바, 김승옥의 연표에 따르면 1960년, 그러니까 그가 20세 때, 4.19 이후 일본문화 개방정책으로 출판된 일본의 전후소설을 읽고 "일본 작가들의 허무주의에 입각한 탐미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다자이 오사무에게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사실은 대학생 때부터 소설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는 그때 번역되기 시작하는 일본 소설을 읽고 받은 충격이랄까 자극 때문이었어요... 내가 과거에 막연하게 헤르만 헤세 읽고 앙드레 지드 읽고 하면서 서양 문학에서 받았던 느낌과는 다르게 훨씬 실감나고 피부로 느껴지더라고요. 아, 소설이란 이런 것이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렇게 아프고 절실하게 쓸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충격적으로 받았죠." 라고 말하고 있다. 참조, [르네상스인 김승옥] 65쪽. (2009/04/06) [본문으로]
:

백현진

에세이 2009. 4. 4. 14:24

그를 어어부 밴드, 니 뭐니 하면서 잠깐 잠깐 접한 적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마도 황신혜 밴드, 하고 좀 헷갈렸고, 난 저런 풍의 밴드 이름에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에 아예 음악을 찾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홍대를 기반으로 뻘소리가 들어 있지 않는 음악 평론을 쓰는 분, 의 글을 접하고는 백현진, 의 음악을 들어 볼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주문한 앨범을 뜯고 나서 음악을 쭈욱 듣고 나니 이 백현진이라는 사람의 음악은 규정 지을 수 없다, 어떤 카테고리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느꼈다. 날 것. 적나라함. 이런 표현이 이 앨범에 가장 잘 어울린다. 가사로 말할 것 같으면 시적이면서도 서사적임과 동시에 사회성까지 두루 갖추었으며, 멜로디와 연주 또한 범상하진 않다. (물론, 어어부 밴드에 비해서는 많이 약해 진 것이라고들 한다.) 무엇보다 백현진의 창법. 죽여 준다.

규정지을 수 없음, 과 창법에서 언뜻 톰 웨이츠 Tom Waits , 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도 났다. 하지만, 톰 웨이츠의 음악이 철저하게 미국의 이야기가 담긴, 미국적인 음악이라면, 백현진의 음악은 진짜 한국적인 냄새가 흠씬 풍기는 음악이다. 무엇보다 한국, 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물경 그 것들이 서울, 의 어느 지역, 에 한한 이야기라고 할 지라도. 결국 백현진,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친숙한 지역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니깐.

아무튼, 음악에서 순대국맛, 도 나고 옛날 떡볶이 맛, 도 난다. 그러면서도 촌스럽거나 싼티나지 않는다. 

앨범에는 박찬욱, 김지운,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추천사 들이 있다. 하지만, 박찬욱, 김지운 감독의 영화 보다는 김기덕, 이창동,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좀 더 어울린다. 또한 유튜브에 내가 이 앨범을 사게 만든 결정적인 뮤직 비디오, [학수 고대했던 날]이 있다. 백현진 본인, 이 출연 했으며, 캠코더로 대충 찍은 듯 하지만 역시 범상치 않은 뮤직 비디오다. 

한 가지 더, 앨범 [반성의 시간] 에는 총 열 두 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두 곡에 외국인이 등장한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 '북미인/앵글로색슨인' 이다. 한 명은 캐나다 남성 배낭 여행객이고, 다른 한 명은 미국 남성 주둔 군인이다. (또한 둘 다 '백인'인 듯 하다) 각각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표현 된다. 열 두 곡 중 두 곡, 1/6, 꽤 적지 않은 비율이다. (2008/09/04)


덧. 백현진의 노래를 다시금 들으니, 이번엔 당구장에서 '사구'를 치다가 시켜 먹는 짱깨맛이 나는 구나. 당구장에서 '사구'를 치다가 시켜 먹는 짱깨맛, 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제는 흘러간 구십 년대의 풍경/취향, 일지도. 그 것들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예전 한국 영화 [품행제로]가 팔십 년대를 형상화 했던 것 처럼, 내 십대를 규정한 구십 년대를 형상화 하는 영화가 나오겠지. 누군가가 슬슬 지금 부터 기획해서 수년 뒤에 시기를 잘 맞춰 개봉하면 잘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2009/01/09)

덧덧. 백현진의 [반성의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좋은 글.

덧덧덧. 사분 오십 오초 부근 부터 그가 눈이 빠지도록,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9/04/03)



:

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에세이 2009. 3. 29. 03:00

하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의 당선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그 동안 간헐적으로 드러났던 '시대 정신'이 구체적인 실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등장한 모습에 몸서리 쳤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정책이고 뭐고 간에 그냥 저 한 사람, 저 대표자, 가 싫다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한국 땅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 당선, 그 이후에 전개된 별의 별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미국 땅의 현실에 좀 더 신경을 쓰기로 마음 먹게 한 계기도 되었다. 앞으론 저 현실, 에 몸을 담그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 까, 하는 몽상을 하면서. 어차피, 2007년 팔월 말에 미국에 건너 오면서 몇몇 이들에게, 농담 삼아, '누군가,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미국 간다.' 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미국 '광우병' 쇠고기 수입 파문과 촛불 시위 소식, 을 전해 들은 것은 것은 2008년 오월 쯤이었던 것 같다. 그 파문, 을 접하면서 다소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나는 미국 쇠고기를 아주, 잘,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쇠고기가 한국에 수입되는 것에 대해 특별히 내가 발언할 이유가 없었다. '광우병' 쇠고기, 라는 수식어는 과장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 위험을 과장하고 있는 듯한 각종 선전물들이 거슬렸다. 미국 쇠고기가 그 미국 내 검역 기준 그대로 수입 된다면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농촌의 피폐함과 농민에 대한 걱정? 글쎄다. 아무튼 지금까지도 아직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오히려 주목했던 것은 그 이야기, 를 처음 한 어느 유학생 녀석이 그간 난 대통령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 이 없었는데 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 녀석과 쇠고기를 사다가 구워먹은 적이 있었고, 문득 그 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표현에서 예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생각났다. 

2008년 유 월 초, 대략 십 개월 만에 한국땅을 밟았다. 때맞춰서 촛불 시위가 좀 더 격렬해져 있었다. 나는 그 촛불 시위에 가고 싶었다. 가서 보고 싶었고, 가서 느껴 보고 싶었고, 가서 동참, 하고 싶었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대한 내 혐오감, 과 내 반대 의식을 가서 표출 하고 싶었다. 내 개인과는 특별히 관계가 없어 보이는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라는 이유, 는 아무래도 좋았다. 보다 더 적합한 구호나 이유가 있었더라면 나는 더욱 더 좋아했겠지만. 


두울,

촛불 시위에는 나와 내 친구 두 명이 함께 했다. 우리의 그 촛불 시위 참가, 가 관광, 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오랜 만에 만난 기념으로 홍대에서 술을 먹었다. 촛불 시위, 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광화문, 으로 향했다. 싸우러 간다거나, 비장한 각오, 이런 것은 없었다. 솔직히 나와 내 친구 두 명을 이끈 가장 강한 동인은 호기심,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내 분노, 를 과연 이 촛불 시위, 를 통해서 표출 할 수 있기는 할까, 를 고민했다. 

시청 역에 내리니 가장 먼저 나를 반겼던 풍경은 아스팔트 포장 도로 곳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잡상인' 들이었다. 종로 거리에 죽 늘어선 갖가지 길거리 음식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어쩌면 그 촛불 시위, 의 숭고함, 을 저 '잡상인'들이 망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내겐 그 잡상인, 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각주:1]

광화문 사거리에 가까이 갈 수록 열기가 느껴졌다. 함성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앞으로 앞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마침내 이순신 장군 동산 밑에 전경 버스가 일렬 횡대로 앞 길을 탁 가로 막고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곳에 이르자, 문득 밤하늘이 붉게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일렬로 늘어선 전경 버스는 왠지 이 모든 거대한 부조리, 를 상징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전경 버스 위에는 젼경 들이 마치 개미떼 처럼 포진해 있었다. 머리 속은 하얘지고,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나를 휘감았다. 저걸 뚫어야 한다. 저걸 뚫고 지나가서 청와대로 가야 한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왠지 청와대로 진격해서 그 대표자, 를 끌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이 들기 시작했다. 




깃발 들이 나부꼈고, 마이크에서는 열렬한 구호가 터져 나왔다. 다들 흥분해 있었고, 나 또한 흥분했다. 좀 더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싶어서 우회 했다. 일행 들과 삼청동 쪽으로 향했다. 교보문고 앞을 지나 우회하는 길은 좀 더 다른 풍경 이었다. 소위, 문화 시위, 답게 어느 인디 락 밴드의 공연이 한 켠에선 한창 이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종각역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안주와 맥주 캔이 눈에 띄었다. 서울 한강 고수 부지의 휴일, 같았다. 

삼청동으로 항하는 길에 군복을 차려 입은 예비역, 들의 무리가 눈에 띄었다. 군대에서 배운 대로 이열 종대로 열을 맞추어 행진, 하고 있었고, 그 오른 쪽 옆에는 소대장 역할을 맡고 있어 보이는 어느 해병 예비역, 이 인솔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친구 녀석이 장난 삼아 그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갔다. 반대편에서 걸어 오던 한 무리 중에서 어떤 여자 분께서 "군인 아저씨들, 수고 하시네요. ^^" 라고 말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환호를 보냈다. 군대 생활이 조금이나마 보상, 을 받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길을 가는데 어느 외국인 남성, 이 어느 한국인 여성, 에게 뭔가 영어, 로 말을 걸고 있었다. 이열 종대 속의 한 녀석이 그 외국인 남성, 에게 잠시 눈길을 주자, 그 소대장 역할을 맡고 있던 녀석이 그 녀석에게 타박을 주었다. "야, 뭐 들으면 뭔 소린지 아나?" 

삼청동 앞의 상황은 이순신 장군 동상 밑과는 달리 좀 더 격렬했다. 시위대와 전경 사이의 간극은 좀 더 좁았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욕설이 오갔다. 전경 버스의 철망을 뜯어내려는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한 시위자는 전경 부대의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과 계속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왜 못 지나가게 하는 거예요?" "좀 지나가자구요." "말을 안 들으니깐, 청와대 앞에 가서 얘기를 좀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세엣,

다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향했다. 이 곳도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더 격렬해져 있었다. 문득 홍대 입구를 배회할 만한 옷차림을 한 몇몇이 눈에 들어 왔다. 녀석들은 정확히 내가 한 때 생각했던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프랑스 68혁명 때는 말이야.."

어디 선가 밧줄이 등장했다. 그 밧줄은 전경 버스에 묶였고 사람들은 그 밧줄에 매달렸다. 나 또한 그 밧줄에 매달렸다. 그리고 밧줄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전경 버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뚫리는 건가. 우회하면서 본 바로는 일렬 횡대로 늘어선 전경 버스 뒤에는 다른 전경 버스들이 늘어 서 있었고, 더 많은 숫자의 전경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 밧줄을 잡아 당겨서 저 일차 벽을 무너 뜨리는 거다. 그러는 거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경 버스가 조금씩 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경 버스는 마치 연환계에 걸린 위나라 조조의 선단 처럼 굳게 서로서로 연결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힘들어 보였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더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울부짓기 시작했다. 때맞춰 노숙자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전경 버스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와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버스 위로 올라간 그 아저씨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몇 박자 지나지 않아서, 전경 들에 의해서 그는 버스 밑으로 끌려 내려 갔다. 

생각을 좀 해보기 시작했다. 결국 이 촛불 시위의 궁극의 목적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탄핵, 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라는 이유보다 나에겐 그 이유, 목적이 훨씬 더 설득력 있었고, 훨씬 더 와닿았다. 그때 스친 생각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내 스스로 그런 결론이 나자, 저 마이크를 잠시 빌려서 사람들를 선동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네엣, 

조금 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지쳐갔다. 문득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좀 휑하게 느껴질 무렵, 친구 녀석이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기분이 슬슬 나빠지고 있다면서. 기분이 슬슬 나빠지고 있다면서. 이대로 여기 계속 있다면, 결론은 이미 인터넷 방송, 들을 통해서 본 것 처럼 날이 밝게 되면 전경 들은 이제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몇 몇 사람들은 연행 되고 시위대는 뿔뿔히 흩어지게 될 예정이었다. 그 때 까지 버틸 여력이, 그리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종각역에서 택시를 잡았는데, 우리 보고 촛불 시위에 참가 했다 오는 길이냐고 묻더니만, 자기는 촛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태우지 않는다며 그냥 가버렸다. 겨우겨우 택시를 잡고 친구 집으로 향해 주린 배를 채우고 술을 좀 더 먹은 다음 잠을 청했다. 

이상이다. 


덧.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은 쿠데타, 나 체육관 선거, 를 통해서 권좌에 오른 것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투표자 중 49%의 지지를 업고 당선이 되었다. 실은 이 사실이 가장 끔찍하다. 그리고 그를 당선 시켰던 '문화적인' 환경, 은 아직도 크게 변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1.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사, 라는 것을 친구와 해 보았다. 나와 그 친구는 정든 서울, 을 떠나 멀리 지방, 으로 '유학'을 가 이제 바햐으로 산과 바다를 벗삼을 예정이었다.

    그 친구의 장사 아이디어, 는 대학 졸업식 시즌에 맞춰서 졸업식장을 돌아다니면서 셀룰로이드 필름을 팔자는 거였다. 충무로에서 필름을 싸게 도매가에 살 수 있는 곳도 이미 알아 놓았다는 말도 했다. 나보곤 자본금만 좀 투자하면 된다고 말했다. 녀석이 나를 꼬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 우리는 지방, 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울, 여자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여자들을 앞으로 만나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대충 그 여자들이 다니는 대학들과 그 주변 환경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은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연대 독수리 빌딩, 하면 아, 거기요, 하면서 아는 척을 한다든지 말이다. 왠지 몰라도 당시 내겐 꽤 설득력이 있게 들렸다.

    그리하여 우리, 는 일 월 과 이 월 대략 이 개월에 걸쳐서 대학 졸업식장 들을 배회하면서 기념 사진을 기필코 찍어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상가 이상으로 필름을 팔면서 폭리를 취했다. 곳곳에서 필름, 과 각종 먹을 거리, 를 파는 사람들에 섞여 우리도 필름,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숭고한 졸업식장, 을 개판 오분 전 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를 했다.

    그렇게 해서 구경하게 되었던 소위, 대학가, 라는 곳은 참으로 놀라운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강남역, 부근이야 어차피 유흥가, 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가, 주변에 서점이 즐비 하다던지, 고즈넉하다든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샘 솟는다든지, 하는 내 환상은 정말이지 순진무구한 착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어떤 여대, 옆 풍경이 가장 놀라웠는데, 그 곳은 모델 학원, 성형 외과, 코스메틱, 옷 가게, 화장품 가게, 로 즐비했다.

    물론 맘에 드는 대학가, 도 있긴 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쏠쏠한 수익을 남겼던 장사, 경험을 기억 하면서, 나는 그 이후로 대략 반경 오 킬로미터 이내에 논과 밭과 산과 바다 밖에 없었던 내가 다녔던 대학을 좀 더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요즘은 다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니까 더 이상 필름, 깃발이 졸업식장, 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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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에세이 2009. 3. 17. 08:02

무라카미 하루키.

1989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는 어떤 면에서 한국의 구십 년대 식, 을 정의한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불었던 하루키 열풍에서 나는 한 발 비껴 나가 있었다. 당시 [상실의 시대]를 한 번 슥 읽어 보았는데 반 쯤 읽다가 덮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2005년에서 2006년 사이, 하루키를 너무나도 좋아하던, 어떤 이, 의 영향으로 다시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고,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쳐 [해변의 카프카]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남은 문제라면, 그 두 권의 책 내용이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스를 타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하루키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예외 없이 전부 여자였다. 내가 주로 여자, 들을 관찰해서 인지, 아니면 여자, 들이 하루키를 남자들에 비해서 좀 더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예전에 잠깐 몸 담았던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 안내일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학생증을 제시하고 있노라니 마침 그 여자가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었는데, 나도 그 책을 읽었노라며 척, 을 했더니 한국에서도 하루키가 번역이 되었냐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새삼스럽게 하루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 달 전에 하루끼가 '예루살렘상' 을 받은 것을 언급하고 싶어서다. '예루살렘상'은 이스라엘에서 2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북페어'의 실행 위원회가 개인의 자유와 존엄 등을 테마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게 주는 상, 이라고 한다.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침공했고, 위키 백과에 따르면, 2009년 1월 7일 까지 12일 동안 이스라엘인은 총 13명 사망, 523명 부상. 팔레스타인인은 총 1380명이 사망하고 5380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본에 있는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체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문제 삼고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그 상을 거부해 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단체로부터 그런 공개 서한을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다들 알 다시피, 결국, 하루키는 그 상을 받는 것을 선택했다. 이제, 하루키가 과연 예루살렘에 날아 가서 상을 받으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그리고 그가 한 말을 뽑아 대강 내 식대로 번역을 해 보자면,

"When I was asked to accept this award I was warned from coming here because of the fighting in Gaza. I asked myself: Is visiting Israel the proper thing to do? Will I be supporting one side?" the Jerusalem Post quoted him as saying. "I gave it some thought. And I decided to come. Like most novelists, I like to do exactly the opposite of what I'm told. It's in my nature as a novelist. Novelists can't trust anything they haven't seen with their own eyes or touched with their own hands. So I chose to see. I chose to speak here rather than say nothing."

"내가 이 상을 받아 들일 것을 요청 받았을 때, 가자 지구에서의 '전쟁' 때문에 이 곳에 오는 것을 경고 받았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것이 적당한 건가? 한 쪽 편을 들게 되는 건 아닐까? ... 몇 가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부분의 소설가들처럼, 나는 내가 말한 것의 정확히 반대 쪽에 있는 것을 하기를 좋아한다. 소설가로써 그런게 내 안에 있다. 소설가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거나 손으로 직접 만지지 전까진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와서) 보기로 선택했다.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보다 (뭔가) 말하기로 했다."

Murakami went on to compare humans to eggs. "If there is a hard, high wall and an egg that breaks against it, no matter how right the wall or how wrong the egg, I will stand on the side of the egg. Why? Because each of us is an egg, a unique soul enclosed in a fragile egg. Each of us is confronting a high wall. The high wall is the system which forces us to do the things we would not ordinarily see fit to do as individuals."

"단단하고 높은 벽과 계란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벽이 얼마나 옳고 계란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에 관계 없이, 나는 계란쪽 편을 들 것이다. 왜냐고? 왜냐면 우리 개개인은 모두 계란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영혼 하나하나가 깨지기 쉬운 계란 하나하나에 들어 있다. 우리 모두는 높은 벽을 마주하고 서 있다. 그 높은 벽은 우리에게 개인으로써 하기에는 잘 맞지 않은 어떤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We are all "human beings, individuals, fragile eggs", according to the author. "We have no hope against the wall: it's too high, too dark, too cold," he said. "To fight the wall, we must join our souls together for warmth, strength. We must not let the system control us – create who we are. It is we who created the system."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개인이고, 깨지기 쉬운 계란이다... 우리에겐 그 높고 어둡고 차가운 벽에 대항하는 희망이 없다. 그 벽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다같이 영혼을 따뜻하고, 강하게 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시스템'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게 놓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자. 우리가 바로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다."


저 기사를 읽고 나서, 바로 즉각적인 반응 하나가 내 속에서 솟구쳤는데, 영어로 된 글을 읽어서인지 왠일로 영어로 된 문장 하나가 솟구쳤다. 다음과 같다. 별로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What the HELL are you talking about?



나중에 그가 한 연설의 전문, 을 보게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읽어 보니 느낌은 또 달랐다. 확실히 그는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상을 받으러 갔다면 상을 주는 사람들 앞에서 답례 연설로써 뭘 더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 앞에서 말을 비비꼬는 것이 소설가가 가진 자질은 아닐 것이다.


덧. 어느 블로거가 번역한, 문예춘추 2009년 4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제1부.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 (2009/04/10)


일본.

그의 소설에는 분명 국적없는 개인, 으로 다가오는 매혹이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결국, 일본인이다. 한국을 식민지 삼았던 일본,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원폭 피해자로써의 일본, 을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중동에서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깡패 짓을 하고 있는 유태인/이스라엘,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나치의 학살 당사자라는 피해자로써의 자신들을 끈질기게 이야기 한다. (물론 하루키 본인은 일본인, 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것을 대단히 혐오하겠지만) 하루키가 이스라엘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예전에 동경을 여행 할 때 메이지 신궁을 구경하면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던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신사'와 '신궁'은 좀 다르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역시 그 곳은 단순히 '종교적이며 경건한' 공간만이 아닌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독일과 비교를 좀 해보자면, 

흔히 독일은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자신들의 과오. '나치'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고 그런 독일을 좀 일본이 본 받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면 독일, 이라는 나라는 일본, 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현대 독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나치'와 철저하게 분리, 단절되어 있다. 그렇게 비록 '나치'는 자신의 '과거'이되 지금의 자신은 그 당시와 철저하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나라다. 독일이 끊임 없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나치' 시대를 철저하게 배격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대 독일에 대한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반해 현대 일본, 은 '천황제'를 지금도 유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제국'과 완전하게 정신적으로 분리, 단절 되지 않은 채로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일본 총리가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감수하고 매번 야스쿠니 신사에 존경을 표하는 것에는 저러한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고 본다. '천황'과 '야스쿠니 신사'를 부정하는 순간 그 것은 현대 독일과 달리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일본 공산당'도 일본의 현실에 맞게 변형이 되어 천황제 자체를 반대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이 완전한, 소위 '반성'을 지금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느 나라가 더 '도덕적'이냐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라인홀드 니버가 이미 1934년에 이야기 했다.) 각각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천황'과 '신사'를 넘는 새로운 일본, 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일본에서 일어 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울러, '박정희'를 뛰어 넘는 새로운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 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 생각 들이 이어져서 글을 쓰긴 썼는데, 무슨 '국가'에 대해서 섣부른 일종의 '정신 분석'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원. 아, 그리고 링크 시킨 인용 출처 들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구글 검색을 해서 나오는 순서대로 인용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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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에세이 2009. 3. 4. 18:37

오랜 만에 잠시 만난 어느 녀석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녀석이 잠시 한국을 방문한 사이 '나이트'를 다니면서 많은 여자를 꼬셨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바람에 슬슬 지겨워질 찰나, 마지막에 만난 어떤 여자는 일종의 '보험'이라는 말을 듣고 오랜 만이라도 잠시 만난 것을 후회했다. 

'보험'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볼 때 나이는 찼으되 결혼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보험'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참 거시기했다. '보험'이라니, '보험'이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녀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을 한다는 것을 여자 꼬시는 데 십분 활용했으리라.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국에 놀러간 유학생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유학'이라는 단어 또한 한국에선 일종의 '형용사'로 기능한다. 한국에는 본래의 단어 뜻과 달리 이상한 용도로 사용되는 형용사가 참 많다. '뉴욕' , '동남아' , '서울대' , '유학' . 언젠가 형용사 사전을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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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던 별자리 여행

에세이 2009. 2. 25. 23:11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집에 굴러 다니던 김영사에서 출간 된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 이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책을 과연 내가 즐겼는지 즐기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뒤를 이어 (아마도 강원도에서 열렸던) '재미있는 별자리 캠프'라는 곳에도 따라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캠프를 과연 내가 가고 싶다고 어머니를 졸라서 가게 되었는지, 집에 그 책이 굴러다닐 수 있도록 해 주신 어머니가 나를 보낸 것인지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아무튼 난 쌍안경을 하나 챙겨 들고 비교적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캠프에 따라 나섰는데 지금으로썬 딱 세 가지 기억이 남아 있다.

하나, 캠프 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오줌으로 가득 차 터질듯한 방광을 부여 잡으며 괴로워 했는데, 그 괴로움을 못이기고 제발, 빨리 캠프장에 도착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 당시 주일학교에 열심히 참석을 하며 성경 퀴즈 대회에까지 나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오래 산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무드셀라라는 작자로, 구백 육십 구살까지 살았다, 고 성경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들에 열심히 외운 답을 말해 금상도 받고 당시 다녔던 교회의 이름도 빛냈던 개신교인, 이었기 때문이다. - 그 꼴을 보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별 이상한 놈 보겠다는 얼굴로 쳐다 봤던 기억이 난다.  

두울, 당일 저녁엔 저 책의 저자와 유명한 조경철 박사가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뭔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으로썬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시에 저 사람 들이 그렇게 별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왠지 모를 '어른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엣, 그 캠프는 KBS에서 동행 취재를 했었다. 아마도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이라는 책이 당시에 히트를 쳤던 것 같고, 그래서 그 캠프도 취잿거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의'가 끝나고 밤이 되고 드디어 별자리 관찰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몇 개의 망원경이 설치 되어 있었고 나처럼 쌍안경을 들고 온 사람들도 몇 몇 있었다. 안타깝게도 날은 흐려서 별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별자리 캠프'에 왔으니 별을 관찰하겠다고 열심히 하늘을 들여다 보았는데, 순간 쌍안경을 들고 하늘을 보고 있던 내 앞에서 환한 빛이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그 빛은 천사 가브리엘의 반짝이는 날개에서 나는 불빛이 아니라, ENG 카메라를 맨 카메라맨 옆에서 조수가 들고 있었던 강렬한 조명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러니까 밤에 별을 관찰하는 사람을 찍기 위해선 조명 불빛이 필요한 것인데, 그 조명 불빛이 쌍안경을 통해 들어 오는 통에 나는 순간적으로 천사의 강림을 느꼈다가, 이내 촬영을 하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별을 관찰하는 꿈 많은 소년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어느 아침 프로그램에서 난 쌍안경에 얼굴이 반 쯤 가려진 내 모습을 한 일 초 정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아직까지는) TV 출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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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상징 잡설

에세이 2009. 2. 17. 19:05

한국산 인삼차 봉지를 보고 있으려니 그 조악한 디자인에서 왠지 소위 '동남아[각주:1]'라는 '형용사'를 사용해서 지칭할 때 느껴지는 그 느낌이 난다. 어쨌든 오랜 만에 인삼차 가루를 찻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자 처음엔 인삼 특유의 향이 나더니만 씁쓸한 뒷맛에서는 담배맛이 난다. 인삼차가 이렇게 그윽한 줄 전에는 잘 몰랐다. 마시고 있는 커피 봉지가 떨어지면 인삼차 상자를 하나 사야겠다. 자칫하면 중독될 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마셔 본 적도 없었던 복분자주를 사서 누구, 와 함께 마셨다. 한국산 술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누구, 는 복분자주를 좋아했다. '복분자주'에서 느껴지는 정력 어쩌구 저쩌구 하는 선입견이 없는 누구, 에게 그 술은 달콤하고 맛있는 산딸기로 만든 술이었을 따름이다. 어찌나 좋아했던지 그 누구, 는 그 술병을 캘리포니아산 피노 느와르 와인 병과 나란히 진열해 놓았다. 

예전에 어깨죽지에 문신을 새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일주일 정도 잠깐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했던 문신 디자인이 하회탈이다. 하회탈을 좀 캐주얼하게 변형하여 어깨에 새기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릴 적 우리 집엔 하회탈이 걸려 있었는데, 난 그 하회탈을 바라 보면서 저게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아리송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아리송한 느낌을 좋아했던 것 같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인생은 희비극'이라는 유치한 모토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도 하곤 했다. 

한국 요리에 있어 특징이 있다면 고추장이 아닐까 싶다. 간장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널리 이용되고 있고 된장은 '미소 수프' 라는 이름의 일본 음식이 이미 있다. 

  1. 이 형용사는 '뉴욕'이라는 반대어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동남아와 뉴욕은 모두 고유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사용 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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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글리쉬

에세이 2009. 2. 9. 18:39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당시 잠시 고등학교 영어 교사직을 하신 적이 있었고, 그 반대 급부로 집에는 출판사에서 홍보차 보내 준 각종 어린이용 영어 교재가 쌓여 갔다. 당시 그 영어 교재들을 믿기지 않게도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실은 듣기를 강요한 어머니에 의해 조작된 기억일 확률도 조금은 있다.) 그래서 믿기지 않게도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가장 기대가 되던 교과 과목은 영어였다. 영어, English. 그런데 중1때 영어 선생님이, 그러니까 내 생애 첫 영어 수업 시간에 했던 말이 아직까지도 생각난다. 

"영어는 영어로는 잉글리쉬 English 라고 하지. 그런데 말야. 이게 나중엔 잉글리쉬 English가 아니라 징글리쉬가 될 거야. 징글징글하게 너희들을 평생동안 따라다닐 거야." 

징글징글하다 하여, 징글리쉬. 그것은 '콩글리쉬[각주:1]'와 함께 과연 '진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관문에는 영어가 점수로 변해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튼 당시 이 청천벽력과도 같고 저주와도 같은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는 중학교 시절에 영어'공부'를 완전히 손을 놓고 등한시했다. 또한 분명히 내가 어릴 적에 '배웠던' 영어는 꽤 흥미진진한 것이었는데, 중학교 시절에 만난 영어는 [성문 종합 영어]의 옷을 입고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내게 오형식과 관계대명사와 투-부정사와 전치사를 읊어 댔다. 영어는 언제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분석'의 대상이었고 '학문'의 일종 이었다. 동시에 단어장과 숙어장이 나를 반겼다. 물론 그 와중에 영어 공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등등의 책들은 언제나 서점에 진을 치고 있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선 나도 물론 그런 책들의 저자들에게 돌아가며 인세를 보태 주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면 자기 얼굴 보다 세 배는 더 큰 귀를 가지고 활짝 웃고 계시던 어느 토익 영어 전문 강사님이 돌아가셔서 그런지, (새삼 돌아가신 분에 대한 명복을 빈다. 이제서 고백하자면, 그 학원에 한 달 다닌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짝사랑 했던 여자를 우연찮게 만나게 되어서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느 샌가 영어'공부'의 '패러다임'은 바뀐 듯 하다. 문법과 단어와 해석이 아닌 실질적인 말하기와 듣기와 읽기와 쓰기를 강조하는 것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 국제화 시대, 혹은 세계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어, 영어, English를 강조하는 외침이 징글징글하게 한국 땅에서 언젠가 부터 메아리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인과관계가 거꾸로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국제화' 시대와 '세계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영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국제화'되고, '세계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와 학원에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ESL 영어 강사들, 대학교의 영어 수업을 위해서 고용되고 있는 영어권 국가 출신 교수들, 그들이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중국과 일본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별 인기 없던 한국 땅을 자꾸만 '국제적'이고 '세계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농촌에 베트남과 필리핀 출신 여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과 함께 말이다. 

아무튼 영어 산업은 지금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산업 중에 하나고 당분간 불황을 모르는 산업이 될 듯하고, 미국 경제가 엉망이 되어갈 수록 동아시아 -서서히 영어 열풍이 꺼져가고 있는 일본과는 달리 활활 타오르고 있는 한국- 에는 점점 더 영어 강사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이 현상 안에는 사실 굉장히 많은 것들이 들어 있고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의 일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중국을 배경으로 만든 다큐멘터리가 얼마 전에 나왔는데,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제목은 Mad About English. 어서 보고 싶다.


  1. 언제 어디선가 읽었던 기사가 기억이 난다. 그 기사는 그 많은 중국 인구가 서서히 영어를 배우게 되어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인구 보다 더 많아지게 되면, 영어를 제2의 언어로 배우는 사람이 더욱 많아져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인구보다 더 많아지게 되면, 그때는 과연 어떻게 될까, 를 다루고 있는 기사였다. 그때는 콩글리쉬, 칭글리쉬, 재패니쉬가 더 이상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고, 액센트 또한 더 이상 '표준'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예측 기사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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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물

에세이 2009. 2. 8. 01:42

"미국 물 좀 먹었구나?"

빈정거리듯 던지는 저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저 소리를 듣게 된다면 왠지 좀 슬퍼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다음부터 녀석들이 대화 중에 불필요한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지 안 섞어 쓰는지를 주시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이 곳에 온지 한 달 도 채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이다호 (맨 처음엔 아이다, 라는 호수 이름인 줄 알았다.) 주에서 유학 중이던 친구 한 녀석이 샌프란시스코에 놀러 왔고, 어느 중국 음식점에 같이 갔었다. 음식 두 개를 주문하고, 같이 나누어 먹게 되었는데, 나는 그저 무심코 중간에 놓여진 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공용' 수저를 이용해서 내 그릇에 담았고, 다시 '내' 수저를 사용해서 먹기 시작했는데, 친구 녀석이 그 광경을 다소 짜증스럽게 바라 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서로 내색은 안 했지만, 그 순간 나보다 일 년 반은 더 미국에 살았던 녀석의 머릿 속에는 아마 저 말이 떠오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친구 녀석은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구하는데 실패하고 작년 겨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 갔다. 막 판에 전화 통화를 하다가 꼭 시민권 가진 여자를 만나서 결혼해서 이 곳에 정착을 하라는 자신의 아쉬움이 담긴 말을 하고 돌아갔는데, 그 뒤로 그 친구와는 연락이 점차 뜸해지고 있다. 조만간 연락 한 번 해야지 싶기도 하다.)

내가 하는 많은 생각들, 행동들은 미국,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샌프란시스코, 에 살면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한국에 있을 때 부터 하던 생각들, 행동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이 곳에 내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이제 일 년 하고도 칠 개월 남짓 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내가 예전부터 개인주의에 좀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이 곳에 살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들도 있다. 개인주의의 부정적인 면,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에 좀 더 민감해지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인종에 대한 것들이다.)

좀 웃기는 예를 들자면, 홍대 클럽에 처음 가보았을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삥 둘러 앉아 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이리저리 싸돌아 다녀야 하는 클럽 안에서 느꼈던 일종의 자유로움 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실은, 삥 둘러 앉아 퍼 마시는 술 자리에 동석한 여자들 보다는 클럽 안의 여자들이 더 예쁠 확률이 높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물론 '물'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쪽수'다.) 

혹은, 예전부터 나는 한 가지 잣대로 줄 세우는 등수 매기기 보다는 각자의 독특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독특, 이라는 단어와 특이, 하다는 단어에 대해 민감한 사람들이 있는 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논평하면서 그 자식, 참 특이해,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누군가에게 그 '특이'라는 단어를 '독특'이라는 단어로 바꾸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어진다. 물론 대화의 맥을 자르는 그런 말을 하진 않는다. 다소 쓸데 없는 민감함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내가 한국 작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 김승옥인데, 신경숙이라는 소설가는 그 김승옥이라는 소설가를 매우 존경한 나머지 자신의 문학 수업을 그 김승옥의 소설을 베껴 쓰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굉장히, 대단히, 매우매우 절실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떻게 '작가'가 되어 온전한 하나의 개인으로 인정 받으려는 사람이 남의 소설을 베끼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출간 된 신경숙의 새 소설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 해] 앞 부분을 잠깐 읽어 보았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내 편견과는 달리 느낌이 괜찮았다. 특히 서술자가 이인칭 주어를 사용하면서 '너는-' , '너는-' 이라고 말하는 장치는 꽤 인상적이었다.)

연관지어서 문하생, 이라는 무협지적인 세계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문하생이 성공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문하생은 결국 그 대가 밑에서 '뒤치닥거리'를 하는 노동자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 하산 하거라, 는 그야말로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문하에 들어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하산을 할 래야 할 수가 없다. 그거 말곤 먹고 살 길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대 투쟁'을 해야 하고 시급 혹은 주급 또는 월급을 차질 없이 정확하게 챙겨야 하는데, 대부분 언젠가는 그 '문하'를 벗어나-통해서, 자신이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의 경우와 같은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만화 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문하생'이라는 개념 보다는 그 밑에서 일하며 계약에 의거해서 정당한 보수를 받는 '노동자'의 개념을 갖는다고 알고 있다. 물론 우리 나라의 '발달한' 영화 산업과 방송 산업에는 지금도 '문하생'들이 몰려 들고 있다. (그리고 나도 한 때 '문하생'이 되기를 자처한 적이 있다. 다행히도 그 밑에는 빵빵한 문하생들이 많아서 그 문하에 들어가질 못 했다.)

더 진지하게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나는 상대방과 서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렇게 된 다면 마치 여기저기에서 멋지게 묘사 된 사무라이들의 대결 처럼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한 사람은 죽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면에선 그것이 진짜 '대화'인지도 모르겠다만.) 

단지 어떤 사안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물론 나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 예민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의 세계관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면 기본적으로 모든 논쟁은, 아니 모든 대화들이 상대방의 세계관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식으로 흐를 때가 많은 것 같다.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보내는, '통촉하소서 마마-' 로 시작 되는 상소문이라는 조선 시대 문화-체제의 영향, 혹은 어린 시절에 접했던 전래 동화를 비롯한 조선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과 '사극'들의 영향 때문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위 친구와 친구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 선생(혹은 교수)과 학생 사이에 '갈굼'이 존재할 때 매우 불편했다. (덧붙이자면, 말 그 자체로써는 상대방의 세계관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강렬한 이야기를 접하는 간접 체험 혹은 어떤 강렬한 직접 체험이 있으면 모를까.) 

그리고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규칙을 지키게 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본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예컨데, 고등학교에서 선생들이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가지고 지랄하거나 때리는 것은 무의미하고 낭비라고 본다. 그냥 학교 전체를 금연 구역으로 설정하고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발견하게 되면 제재를 가하면 된다. 이때 그 제재는 정학이 될 수도 있다. 담배를 가지고 있는 학생을 발견하게 되면 청소년에게 담배를 파는 곳을 고발하면 된다. (이렇게 쓰다 보니 개인주의라기 보다는 어떤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저대로 되었더라면 난 고등학교 때 담배를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쓰다 보니, 미국 물을 먹어서 그런지 이야기가 점점 통제가 되질 않는다. 대강 통제가 되는 것 같아 보이는 이 시점에서 마무리지을까 한다. 문맥과 상관 없이 삐져 나오는 이야기들을 담기 위해 남발한 () 괄호가 읽는 이들을 성가시게 할 것 같다. 그랬다면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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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 생각

에세이 2009. 2. 1. 18:02
'외국'의 한국 음식점에 대한 악명이 이래저래 높은 것 같다. 손님이 먹고 남긴 잔반을 버리지 않고 재활용 한다든지, 음식 맛이 형편 없다든지, 서비스가 이래저래 불친절하다든지. 물론 한국의 한국 음식점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래도 외국에서는 다른 나라 음식점과 이래저래 비교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도 있고, 누가 경험한 것을 들은 것도 있고, 누가 경험한 것을 적어서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나도 그 '한국 음식점'들을 경험하면서 속으로 욕하기에 바빴는데, 요즘 들어서 문득 다른 생각이 부쩍 들기 시작한다. 

'한국 음식'의 특징 중의 하나가 반찬의 가짓 수가 많다는 점이고, '한국 음식점'의 특징은 그 반찬은 모두 으례히 상차림의 일부분으로 따로 가격을 매기지 않고 나온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절대 없는 법인데, 그 많은 반찬은 과연 공짜로 줄 수 있는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부쩍부쩍 들기 시작한다. 특히 그간 이런저런 다른 나라 음식점들을 다니면서 먹어 본 결과 한국 음식점처럼 반찬을 그냥 제공하는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한국에서 으례히 친절한 '인심'을 기대하면서 내뱉었던 말들을 되새기게 된다. "아줌마, 반찬 좀 더 주세요."  "여기요, 마늘 좀 더 주세요."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요. 아참, 무 많이 넣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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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상

에세이 2009. 1. 30. 22:49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바이올린을 처음으로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할 일은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를 익히는 일이다. 비록 바이올린을 만져 본 적도 없지만, 활을 켜서 정확한 도- 소리를 내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것 같다. 신디사이저의 등장은 그 정확한 도- 소리를 내는 데 까지 걸리는 시간을 뛰어 넘어 정확한 도- 소리를 똑같이 몇 번이라도 재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글 한 번을 쓰려면 먼저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가는 일 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먹을 충분히 간 다음에 붓을 들어 먹물을 묻힌 다음 한 자 한 자 써내려 갔다. 펜에 잉크를 묻히는 일은 이 보다는 덜 번거로웠을 테지만 어쨌든 손을 사용한다는 것에서는 똑 같았다. 그러던 것이 타자기가 등장하면서 한 자 한 자 쓰는 것이 아니라 쳐내려 가기 시작했다. 쓰는 것에서 쳐 넣는 것으로의 변화는 많은 시간을 절약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키보드가 있다. 타자기와 방식은 같지만, 이젠 바로 바로 수정이 가능하다. 

사진을 찍고 현상을 하는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더군다나 사진을 잘 찍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빛의 세기에 따라 조리개와 셔텨 속도를 조절해야 하며 초점도 정확하게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필름을 현상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직접 하려고 든다면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은 많은 면에서 저런 작업들을 간단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담 이전과 달리 그 남는 시간에 대체 우리는 뭘 해야 할까? 혹은 대체 우리는 뭘 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장비를 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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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내 화장실 앞

에세이 2009. 1. 17. 08:03

대개의 사람들은 영화관에 연인끼리 온다. 하지만 화장실은 목욕탕과 함께 공공 공간 중에서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어 이용해야 하는 흔치 않은 공간 중의 하나다. 영화가 끝난 영화관 내 화장실 앞은 조금 독특한 공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시점이고, 또한 연인들은 잠시 갈라져 각자의 공간으로 향해야 한다. 그 화장실 앞에는 남자들이 띄엄띄엄 서 있다. 으례 남자 보다는 여자가 화장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기 마련이고, 남자들은 동행한 여성을 기다린다. 다소 초조한 기다림의 순간순간 남자들은 서로를 흘낏흘낏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진다. 

저 녀석이 데리고 온 여자는 내 여자보다 예쁠까 예쁘지 않을까. 예쁠리가 없을거야. 저런 녀석이 예쁜 여자를 데리고 올리가 없어. (여자 화장실에서 나온 여자를 바라 보면서) 와 예쁘다. 저 여자는 대체 어떠 녀석이 데리고 왔을까. 아니, 세상에. 저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 다름 아닌 저 녀석이었어? 정말? 아니, 어떻게 뭐 저런 녀석이 저런 여자를 데리고 다닐 수 있을걸까. 이렇게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드디어 자신의 여자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고 남자는 웃음을 머금고 여자에게 다가가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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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에세이 2009. 1. 14. 18:48
그리스 비극은 따지고 보면 그리스 시대의 그리스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였다. 신과 인간, 큰 이야기, 큰 서사. 흥미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이제 좀 폐기 처분 했으면 좋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 머리를 꽝꽝 때렸지만, 그건 그 당시에 내가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빠져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번역본' 들을 읽었던 시간이 아깝다. 통속적인 것이 싫다고 역으로 경전이나 계보 안에서 헤매던 지난 시간들이 아깝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추천 목록'을 들이 미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앞에 '청소년용' 이나 '대학생이 읽어야 할' 이라는 어구가 붙으면 더욱 더 조심해야 한다. 뒤에 '100선' 따위의 숫자가 붙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읽은 책, 본 영화의 숫자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둘 씩 줏어 넘기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게다가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둘 씩 계속 줏어 넘기는 사람들일 수록 그 유명한 사람들이 뭔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조금 시간을 내어 찬찬히 살펴보면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죄다 '외국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름이 외국어라야만 한국에선 유명해진다. 영어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왠지 권위가 없게 느껴진다. 일본어의 경우에는 이름에서 약간 허무한 느낌이 나면 더더욱 좋다. 프랑스어 같은 경우엔 특이하게도 지적이고 권위도 있으면서 예술적인 냄새까지 나는 경우가 다분하다. 정말이지 프랑스어는 영어처럼 돈은 안 되지만 가오잡기에 좋은 복 받은 언어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스페인어나 이태리어도 마찬가지어야 하지만 이상하게 이 두 개의 언어는 한국에서 홀대 받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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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크 Milk]

에세이 2009. 1. 13. 09:04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활동했던 '게이' 하비 밀크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밀크 Milk]를 보았다.[각주:1]영화가 끝나가면서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도 거의 울 뻔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박수 소리가 잠시 터져 나왔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인이라면, 저 하비 밀크라는 사람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게이이건, 아니건 간에. 

하비 밀크는 마흔 살이 될 때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가 지하철에서 꼬신 녀석과 침대 위에서 자신의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면서 난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어, 그리고 오십 번째 생일을 난 기대하지 않아, 라고 말을 했는데, 그는 마흔 살이 넘어서부터 많은 것을 이루어 내었고, 마흔 여덟 살에 시청 안에서 암살 되었다. 

하비 밀크는 마흔 살에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거리로 이주해서 사진기를 파는 가게를 열었고, 그 가게는 곧 게이들의 동네 사랑방이 되었고,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출발점이 되었다. 하비 밀크는 처음에는 머리도 기르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편한 데로 대충 입었지만, '정치인'이 되고 부터는 말쑥한 정장에 머리도 짧게 깎고 수염도 다듬기 시작했다.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거리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하비 밀크가 자기와 같이 일하던 한 녀석에게 너는 운동가, Activist 니까 확성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말하곤 자신은 혼자 시청으로 뛰어가서 그 운동가 녀석이 사람들을 몰고 시청에 오기 까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 운동가가 사람들을 몰고 시청에 오자 하비 밀크는 시청 문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달랜다. 전략적인 모습이었다.

하비 밀크는 연애 지상주의자도 아니었고, 명랑 사회 이룩해보세, 라는 사람도 아니었고, '보헤미안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사십 대 초반에 조그만 사진기를 파는 가게를 열고 '커밍 아웃한 게이'로 살면서 경제적인 수입에 맞추어서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가 해낸 가장 큰 업적은 학교에서 '게이'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인 주(state)민발의안 6, Proposition 6 의 통과를 저지시킨 것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이고 시시각각 정체성이 변해가는 나라 미국에서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라는 잣대는 대단히 중요하다.) 현재 미국의 상황은 이러하다. 2008년 미국 대선때 캘리포니아 주, 에서는 '게이-레즈비언'들이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인 주민발의안 8, Proposition 8이 통과 되었고, 아시아인과 기독교인, 혹은 그 두 개의 범주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들이 이 법안을 통과하는데 한 몫 단단히 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캐나다의 브리티쉬 컬럼비아라는 주, 에서는 '게이-레즈비언'들이 결혼하는 것은 이미 합법적이다. 

이 영화 [밀크 Milk]는 여러가지 부분에서 한국의 '좌파'들에게 영감을 줄 소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일제고사를 반대하고 현장수업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무려 해고씩이나 된 교사들을 위로해 줄 여지도 있다. 이건 그냥 느낌인데 이 영화가 2009년 4월 23일 한국에 개봉되면 어느정도 눈에 보이는 반향이 있을 것 같다. (그러하더라도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 Sicko]가 개봉했을 때 처럼 미국의 상황을 빌어다가 한국의 상황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아, 그리고 영화에 대해 언급한 내용 중에 어쩌면 내가 세부적인 부분에서 잘못 알아 듣고 헛소리 하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1. 내 오른쪽 옆에는 나와 같이 영화를 보러간 - 어쩌면 새로운 여자 친구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 미국에 산지 이제 오 년 째가 되가는 한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여전히 대사를 완전하게 못 알아 먹어 상황을 보아가면서 대화를 짐작하곤 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알고 보니 동행인이 자신도 그러했다고 해서 잠시 동질감이 느껴졌다) 내 왼 쪽에는 한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와 같이 앉아 있었다. 그 흑인 남자는 레게 파마 머리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멋을 낸다고 레게 파마를 시도하지만, 흑인 남자들은 곱슬거리는 머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레게 파마를 시도 한다. 그리고 찰랑거리는 쭉 뻗은 머리를 부러워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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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진

에세이 2008. 12. 29. 12:42
십 년 전에 찍은 가족 사진이 한 장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옷을 차려 입고 사진관으로 향했고, 아직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동생들은 교복을 입고, 난 어설픈 정장을 걸치고 부모님과 함께 사진관으로 나섰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은 가족 사진이다. 그냥 저냥 팔 년 동안 지갑 속에 넣고 다니다가 이 년 전에 그 사진을 좀 자세히 들여다 보다가 문득 조금 놀라면서 그 사진이 우리 가족의 관계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진의 구도가 우리 가족 그 자체를 말하고 있었다. 그 가족 사진은 중간에서 약간 오른쪽 쯤에 어머니가 위치해 있고, 그 어머니의 둘레를 나와 동생들이 둘러 싸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왼 쪽에 홀로 계시다. 

그 구도는 사진관에서 일하는 사진사가 주문한 구도다. 물론 사진사는 가족 관계에 대한 어떤 직관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그날 입고 온 가족 구성원들의 옷 차림과 색깔을 고려해 가면서 전체 구도가 어떻게 하면 가장 보이기 좋게 나올까를 고민하면서 찍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얼마 전에 커트 코베인의 전기물을 읽는데 전기 작가가 코베인 가족의 사진을 통해서 그 가족 관계가 얼마나 위태롭고 파탄 일보 직전이었는지를 묘사하는 부분이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는 사진의 왼쪽에 위치해 있고, 딸과 어머니는 사진의 오른쪽에 위치해 있고, 마치 그 들 사이에는 어떤 선이 그어져 있는 것 처럼 찍혀 있다고 하는데, 그 사진의 구도는 그 가족 관계와 그대로 닮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금 십 년 전에 우리 가족 사진을 찍었던 사진사가 어쩌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 사이에 흐르고 있는 미묘한 공기를 포착하여 가족 사진 안에 담아 내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웨딩 촬영을 전문적으로 오랫 동안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부 화장 때부터 신랑신부 가족과 친지들의 단체 사진을 찍는 와중에 그 사람들은 어쩌면 신랑 신부가 혼수 때문에 싸웠는지 안 싸웠는지, 두 사람을 '독립 시키는 데' 필요한 재산은 어느 집안에서 더 많이 부담했는지, 아니, 더 나아가 두 사람은 앞으로 대략적으로 얼마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할 지 등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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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함

에세이 2008. 12. 26. 08:03

효도 차원에서 몇 년 만에 어머니와 교회를 갔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 이전에 경건한 공간에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조그만 교회였고, 그런데로 경건한 분위기가 풍겨왔다. 안은 전혀 통일성이 없었고 이런 저런 선들로 어지러웠다. 돈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설교가 있었고, 입교식과 세례식이 이어졌다. 이제 막 만 18살로 성인이 된 몇 명의 사람들이 기독교 교리를 받아 들이고, 앞으로 그 교리에 맞추어 살겠다고 선서를 하는 순간이다. 그 들을 바라 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순간 교차했다. 그런데, 순간 몇 명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똑딱이 디카들을 눌러 대었다. 기념촬영. 순간 저들의 손에 든 디카들을 뺏어서 벽에 던져 부수어 버리고 싶었다. 

좋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공간들이 훨씬 더 경건하고 종교적이다.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연주와 제니스 조플린의 목소리는 대단히 종교적이다. 패티 스미스는 무대 위로 신을 불러 온다. 한국 고유의 리듬이 아니라 일본의 리듬이니 어쩌니는 하지만, 사물놀이의 리듬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사방팔방 주위를 둘러 보아도 도무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으로만 이루어진 공간들이 훨씬 더 경건하고 종교적이다. 불교에 본격적으로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선불교 참선을 할 수 있는 공간에 가는 것은, 왠지 좀 겉멋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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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스크린 사이 : 성적 소수자의 경우

에세이 2008. 12. 20. 21:16

한국에서는 성적 소수자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가 유행인가 보다. 멀쩡한 신윤복은 여장남자로 둔갑하여 동성애와 이성애를 넘나드는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야오이'물은 여성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조만간 개봉할 유하 감독의 '쌍화점'은 고려 말 왕과 왕후와 호위무사간의 찐한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다. (유 하 감독은 불현듯 과거로 돌아갔다. 그 이유가 조금 궁금하다.) 게이-레즈비언-트렌스 젠더-바이 섹슈얼.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한국에서 금기시 되지 않고, 드라마, 영화의 소재로 전면적으로 활용 된다. 그런데, 미디어에서 범람하는 성적 소수자들에 비례하여 한국 사회는 과연 그러한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시선이 예전보다 개선이 된 것일까?

살아 오면서 주변에서 그러한 성적 소수자를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얼마 전 내가 몇 년 동안 알아 왔던 어떤 이가 성적 소수자라는 것을 알고 놀랬다. 그렇다면, '그 많던 '게이'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한국 땅에서 드라마나 영화와는 다르게 그러한 성적 소수자를 살아가면서 잘 마주칠 수 없는 까닭은 마치 한국 땅에서 길가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잘 마주칠 수 없는 것과 일맥상통할 지 모른다. 반대로, 미국 땅에서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도심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은 마주칠 수 있다. 왜? 미국에는 한국보다 장애인이 더 많아서?

이유는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은 외출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부터, 공공 시설을 이용하는 것, 문화 생활을 즐기는 것에 있어서 장애인들은 여전히 불편하다. 그리고 무엇 보다 '정상인'들의 시선을 그 들이 어떻게 감내하고 다니는 지 나로써는 짐작조차 안 된다. 성적 소수자들도 마찬가지다. 미국 땅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처럼 한국 땅에도 그런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다만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숨어 있다는 것. 길거리에는 '정상인'들로 그득한데, 스크린과 브라운관에는 '비정상인'들로 넘쳐 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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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종교사를 읽고

에세이 2008. 12. 12. 23:21

'미국종교사'라는 책이 있다. 번역서가 아닌 직접 저술한 책이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알라딘의 책 소개를 그대로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미국의 역사와 정치를 살펴볼 때 종교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 중 ‘시민종교’로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그간 미국의 정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 미국의 정치나 여러 정책들에 미치는 영향력도 상당하다.

이 책은 국내에 몇 안되는 미국 종교사 통사이며, 한국 사람에 의한 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지은이는 이 책을 쓰면서, 그 동안 역사 속에서 소외되어 왔던 소수자들에게 좀 더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했다고 밝힌다.

따라서 이 책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계 주민, 여성, 이민자, 새로운 종교, 사회적 소수자 등의 종교적 경험이 이전까지의 어떤 미국 종교사 통사보다 더 균형 있게 언급되어 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각주를 줄이고 비교적 평이하게 기술했기 때문에 미국이나 종교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의 글은 그 책을 읽고 이런저런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보려고 노력했던 글의 일부분이다. 딱히 서론과 본론과 결론이 있는 글도 아니고, 그냥 생각들이 듬성듬성 흩뿌려진 그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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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나는 항상 대한민국의 오천 년 역사를 자랑스러워 할 것을 고등 교육을 통해서 주입 받았으나, 실은 오천 년 전에 한반도에 거주 했던 사람들과 지금의 우리들, ‘한국인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만든 것은, ‘미국선교사들일본인, 그리고 이승만그리고 무엇보다도 박정희와 그가 추진했던 근대화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 대한민국은 기껏해야 백 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정체성을 만들어 왔을 뿐인데, 어쩌면 이러한 관점이 이백 년 동안 국가 정체성을 구축해 온 미국을 대한민국이 기를 쓰고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내 생각으론, 대한민국이 미국의 진정한 실체, 혹은 바람직한 면을 모방하고 있다기 보단, 그 풍문과 소문을 따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저항문화이자 빈곤지역 흑인들의 정서를 담고있는 힙합을 우리 나라에 소개한 것이 주로 유학파였던 관계로 그 힙합 문화는 압구정이라는 부자 동네를 중심으로 고급스러운 양키문화로 포장되었으며, 역시 블루스에서 태동하여, 자유롭고 분방한 흑인들의 리듬을 담고 있는 재즈 역시 고급 문화로 여겨져청담동에서 가장 열렬히 소비 되어 왔다. 또한 미국 중산층을 날카롭게 해부한 영화 '아메리칸 뷰티' 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이창동의 영화처럼 매우 적나라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영화 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 미국 교외의 전형적인 풍경이 나를 사로잡는 바인데, 그 풍경은 일산과 분당의 외곽지역의 소위 전원 주택들이 열심히들 흉내 내고 있는 바다.

...(중략)

미국이 비록 남의 나라 역사이긴 하지만미국 현대사에 흥미를 느낀다그 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기는 1960년대이다그 시기에 미국의 모순은 절정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미국이 베트남 전에 참전하면서반전 시위가 극렬하게 일었고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거센 반문화 운동히피 운동이 일어 났다또한 진보적인 것으로 유명한 버클리 주립 대학에서는 ‘Civil Right Movement’가 시작 된 것으로 알고 있고또한 이 곳 샌프란시스코는 게이-레즈비언 인권 운동이 있었던 도시로 유명하고지금도 여전히 미국 내에서 게이-레즈비언의 비율이 가장 높다.

게다가 그 시기의 반문화 운동은 동양의 종교특히 인도의 힌두교와 일본에 의해 소개 된 선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어떻게 보면유럽과는 달리 미국은 동양과 서양이 보다 더 격렬하게 만나서 조우한 곳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어쨌든 이 곳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내에서 아시안의 비율도 가장 높은 도시이기도 하며시내 중심가에는 ‘Asian Art Museum’이 건재 하다.

히피와 동양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반문화 운동은, 대한민국 보수 교회 내에서는소위 사탄의 음악, 문화로 정의 내려진 바 있는데, 그것의 여파로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 그런 음반들이 어머니에 의해서 쓰레기통에처박히기도 했다. 결국 그것은 이 곳에서는 ‘Bible Belt’로 불리고 있는 미국 남부의 대단히 보수적인 개신교 그룹의 견해와 일맥 상통하는 바다. 물론, 가장 진보적이고, ‘뉴욕보다도 훨씬 더 ‘liberal’한 도시에 살고 있다고 스스로들 자부하는 샌프란시스칸들에게 그러한 보수 개신교 그룹은 종종 웃음거리가 된다.

아마도 그 당시에 가장 아이러니칼한 상황은, 서구에서 규정한 -에이지라는 개념을 그대로 대한민국에 수입해서 그것을 다시 사탄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대체 누구의 눈으로, ‘상황들을보고 있는가

영화를 예로 들자면, 헐리우드 영화를 볼 때에도, 요즘 부쩍 커진 아시아 시장, 특히 중국 시장을 의식 해서 인지, 아시아인, 정확히 말하면, 동아시아인의 외모를 한 배우들이 부쩍 출연하고, 우리 나라의 몇몇 유명 배우도 캐스팅이 되었는데, 그런 영화를 볼 때 간혹 내 스스로에게도 놀라는 것은, 백인, 주로, 앵글로 색슨족과 나란히 서 있는 동아시아인을 보고 있는데, 그 동아시아인이 오히려 낯설어 보이는, 다시 말해서, '타자'로 느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러한 관점들이 내 안에도 주입되어 있다는 것에 일종의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중략)  

저자의 책 '미국 종교사' 를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맨 앞의 유럽인들이 기독교를 들고 미 대륙에 진출하기 이전에 다양한 소위 원시적인종교들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을 기술한 것과, 기독교가 그 다양성들을 파괴했다는 것, 그리고 그 종교들에 대한 간략한 묘사였다. 또한 종교또는 종교성이라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면서 풍요로운 경험을 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정의 한다면, 과연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믿어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과연 그 시절, 기계 문명 이전의 시기 보다 더욱 풍요로운 종교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이것을 예술, 또는 예술을 통한 새로운 경험이라는 영역으로 확장한다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예술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예술과 가까이 살고 있다는 현대인들이 과연 그 때 그 시절의 사람들보다 삶에 대한 통찰이 더욱 크고, 삶에 있어서더욱 많은 것을 누리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지를 반문해보았는데, 명확한 대답을 하기가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시스템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인지라, 그 시스템을 만들어 낸것이 결국엔 인간 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시스템은 인간을 억압하는데, ‘제도권안에서 존재하는 종교라는 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아니라, 또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를 반문해 본다.

언뜻 스치는 단상이긴 하지만, 21세기에는 어쩌면 각 종교 간에 드리워져있는 장막들, ‘말씀교리제도로써 갈려 있는 그 숱한 종교들의 경계들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 과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튼 한 역사가가 20세기에가장 역사적인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서구세계에 불교가 전래된 것이라고 답한 것이 자꾸 머리 속을 맴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종교를 택할지, 어떤 식으로 종교적인 경험을 하게될지는 모르겠다. 인상 깊게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로 종교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박상륭의 소설 혹은 잡설 '죽음의 한 연구' 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제목에 걸맞게 주인공이 죽는 장면에 대한 묘사였다. 그 죽음이라는 것이 무슨 대단하고도 큰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건너는 것이 유달리 까다로웠던 미국 입국 심사대 보다 도 훨씬 더 부드럽게 훌쩍 지나가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읽은 지 오래 되어 자세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주인공이 마치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죽음이라는 활짝 열려 있는 문 앞에서 전혀 망설임 없이 그냥 걸어가던 속도로 훌쩍 지나가는 듯한느낌이라고 내 방식대로 다시 묘사를 할 수 있겠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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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영어에 대한 생각

에세이 2008. 10. 31. 20:04

예전에 빔 벤더스라는 유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극장에 찾아 가서 영화를 한 편 보았고,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꽤 인상 깊게 본 영화였던 것 같은데, 지금 그때 본 영화가 무슨 영화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 받았던 느낌이 영화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물론 한국말로 감독에게 질문을 했고, 영어로 통역이 되었다. (딱 한 명의 관객이 통역을 거치지 않고 영어로 직접 질문을 했다. 나는 그가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머지 관객들이 대체 그가 빔 벤더스에게 무슨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면 안 되는 거다. 언어 생활이라는 것도 다 소통하자고 하는 짓이 아닌가.) 독일 감독이지만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미국에서 영어로 영화도 많이 만들었던 빔 벤더스는 영어로 답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관객들이 질문을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감독님 영화 아주 잘 봤구요,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하나 같이 이 어구로 질문을 시작했는데, 통역자는 그 어구를 통역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쓸데 없거나 과도한 예의라고 생각했고, 또한 소위 '감독님'에서 느껴지는 권위적인 울림에 유난히 민감해 하면서 홀로 짜증을 내었다. 극장안에서 나와 영화 자체 보다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 

쓸데없는 권위나 권위주의를 질색하기 때문에 때때로 모국어가 싫어질 때가 있다. 내게 가장 익숙한 언어, 내 생각의 집을 짓는 언어가 싫어질 때가 있다는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하여간 그러하다. 광고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는 친한 후배 하나가 있는데, 그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두고 영어 연수를 다녀 왔었다. 얼마 전에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후배는 갑자기 언젠가는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한국의 회사원들이 꿈꾸는 유학, 미국 유학이란 학문에 대한 열정 보다는 다른 이유일 경우가 많다. 나도 회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고, 한국 회사의 뭐 같은 상황에 대해선 아주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배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면서, 자신은 영어를 사용할 때 좀 더 자유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호칭, 나이와 지위를 확인한 다음에 사용하는 언어의 색깔이 달라지는 수직적인 언어가 나를 옭아 맨다고 느낀 적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직 후 제멋대로 영어를 지껄이면서 자유로움을 느낀 적도 많았다. 

한국어가 통으로 둘러치는 느낌이라면 영어는 보다 직접적으로 파고 든다.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에 'Straight Shooter' 라는 표현이 있다. (좋아하는 한국어 표현 '뻘짓'이 은어인 것처럼 저 어구도 물론 은어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요점을 말하는 것/사람을 뜻한다. 그 은어를 배우는 순간, 내가 소위 '미드'를 좋아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한국어는 복잡하다. 정보의 교환에 있어서 약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호칭과 조사를 발음하는 그 순간, 정보의 교환은 비효율적이게 마련이다. 때때로 한국어는 허술하기도 하다. 주어와 목적어는 때때로 -아니 대부분-  생략되고, 이것인지 저것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대충 따져 보니 지금 하고 있는 언어 생활의 한 반은 한국어로, 또 그 반은 영어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한국어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리 하게 된다. 한국어는 내 모국어다. 내 관념과 느낌들은 한국어로 내 속에서 구성된다. 예외 없다. 학생카드에 찍힌 바코드, 돈의 액수, 전화번호와 같은 숫자를 읽거나 기억할 때 나는 'one two three four,,,' 로 기억하지 않는다. 예외 없이 '일 이 삼 사'이게 마련이다.[각주:1] 영어는 나에게 있어 제2의 언어다.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말하자면, 겉으로 내 뱉는 언어와 달리 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각을 통한 언어 생활은 여지 없이 한국어이게 마련이다. 또한 미국에 막 도착해서 대책 없이 영어를 내뱉던 시기와는 달리, 영어든 한국어든 원래 내 성향대로 조금 생각을 하고 조심스럽게 내뱉게 된다. 때때로 일 년 전의 내 영어가 지금의 영어 보다 더 나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표현이 내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어를 내 뱉을 때 그 경험과 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이 고스란히 나와 밀착되어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뻘짓'이라는 '소리'를 발음하거나 떠올릴 때면 내가 숱하게 저질렀던 '뻘짓'들이 생각난다. 어쩌면 단어의 의미 보다는 소리 자체가 나와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반대로 영어로 이야기 할 때 느꼈던 자유로움은 온데간데 없이 허공에서 주먹질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언젠가 부터 나를 사로 잡는다. 퍽, 퍽, 소리가 나지 않는 언어 생활. 

물론 시간이 흐르고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경험이 쌓이면서 아주 조금씩 영어라는 언어와 나도 결합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어, 예전에 내게 'straight shooter' 라는 표현을 가르쳐준 ESL 선생에게 영화를 같이 보자는 '작업' 메일을 보내는 뻘짓을 한 적이 있다. (그래, 이태리와 스웨덴 피가 섞인 늘씬한 금발 백인 여자였다. 비록 다리는 굵었다만. 어쨌든 '백인'이라서 수작을 붙였던 건, '절대' 아니다.) 남자 친구도 있는 여자 였지만, 관계도 별로 심각하지 않아 보였고 대화도 잘 통하고 서로 공통점도 많다고 생각한 나는 쓸데 없는 용기를 냈던 것 같다. 답 메일이 날라 왔다. 학생과 선생이 (나보다 두 살 어렸다.) 밖에서 일대일로 만나는 것은 부적절하다, 라고. 

그 순간 그녀가 사용한 'inappropriate 부적절한' 이라는 단어는 예전에 그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계기, 그러니까 클린턴이 르완스키와 집무실에서 '뻘짓'을 한 것에 대한 표현, '부적절한 관계 inappropriate relationship' 와는 완전히 다르게 내 속에 깊숙하게 박혔다. inappropriate, inappropriate, inappropriate, 왠지 학술적인 단어로 토플 공부 할 때나 나올 법한 저 단어는 내 '뻘짓'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영어를 통해서 받아 들이는 느낌이 점점 많아지게 되는 것이 나를 풍요롭게 만들기를 바랄 뿐이다. 아울러 마치 몇 십년 외지 생활을 한 사람 마냥 가끔 한국어가 애틋하게 들릴 때가 있는 것 또한 느낄 때도 있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는 struggle 이다. 스트러글. 이라고 발음할 때, 그 struggle 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뜻과 소리 자체의 느낌이 나 자신과 내 경험들과 함께 어우러진다. 의미도 좋고 소리도 좋다. 


  1. (2009년 7월 16일 추가)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할 것과 생각이 바뀐 것이 있다. 우선 혼자 있을 때 생각하는 것이야 한국어로 하지만,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거나 영문책을 읽을 때는 생각 또한 영어로 한다.

    또한 숫자를 일이삼사, 로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기억할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읽어 보진 않은 책인 [아웃라이어]에서 말콤 글래드웰은 아시아 사람들이 수학을 잘하는 이유로 보다 효율적으로 숫자를 기억할 수 있는 셈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위가 일, 단위에서 십, 단위로 바뀌어도 한국어로는 오-십오, 이런 식으로 앞에 하나의 글자만 추가하면 되지만 영어로 이야기하면 Five-Fifteen, 이런 식으로 표현이 아예 달라진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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