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에세이 2009. 3. 17. 08:02

무라카미 하루키.

1989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는 어떤 면에서 한국의 구십 년대 식, 을 정의한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불었던 하루키 열풍에서 나는 한 발 비껴 나가 있었다. 당시 [상실의 시대]를 한 번 슥 읽어 보았는데 반 쯤 읽다가 덮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2005년에서 2006년 사이, 하루키를 너무나도 좋아하던, 어떤 이, 의 영향으로 다시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고,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쳐 [해변의 카프카]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남은 문제라면, 그 두 권의 책 내용이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스를 타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하루키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예외 없이 전부 여자였다. 내가 주로 여자, 들을 관찰해서 인지, 아니면 여자, 들이 하루키를 남자들에 비해서 좀 더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예전에 잠깐 몸 담았던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 안내일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학생증을 제시하고 있노라니 마침 그 여자가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었는데, 나도 그 책을 읽었노라며 척, 을 했더니 한국에서도 하루키가 번역이 되었냐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새삼스럽게 하루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 달 전에 하루끼가 '예루살렘상' 을 받은 것을 언급하고 싶어서다. '예루살렘상'은 이스라엘에서 2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북페어'의 실행 위원회가 개인의 자유와 존엄 등을 테마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게 주는 상, 이라고 한다.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침공했고, 위키 백과에 따르면, 2009년 1월 7일 까지 12일 동안 이스라엘인은 총 13명 사망, 523명 부상. 팔레스타인인은 총 1380명이 사망하고 5380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본에 있는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체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문제 삼고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그 상을 거부해 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단체로부터 그런 공개 서한을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다들 알 다시피, 결국, 하루키는 그 상을 받는 것을 선택했다. 이제, 하루키가 과연 예루살렘에 날아 가서 상을 받으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그리고 그가 한 말을 뽑아 대강 내 식대로 번역을 해 보자면,

"When I was asked to accept this award I was warned from coming here because of the fighting in Gaza. I asked myself: Is visiting Israel the proper thing to do? Will I be supporting one side?" the Jerusalem Post quoted him as saying. "I gave it some thought. And I decided to come. Like most novelists, I like to do exactly the opposite of what I'm told. It's in my nature as a novelist. Novelists can't trust anything they haven't seen with their own eyes or touched with their own hands. So I chose to see. I chose to speak here rather than say nothing."

"내가 이 상을 받아 들일 것을 요청 받았을 때, 가자 지구에서의 '전쟁' 때문에 이 곳에 오는 것을 경고 받았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것이 적당한 건가? 한 쪽 편을 들게 되는 건 아닐까? ... 몇 가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부분의 소설가들처럼, 나는 내가 말한 것의 정확히 반대 쪽에 있는 것을 하기를 좋아한다. 소설가로써 그런게 내 안에 있다. 소설가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거나 손으로 직접 만지지 전까진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와서) 보기로 선택했다.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보다 (뭔가) 말하기로 했다."

Murakami went on to compare humans to eggs. "If there is a hard, high wall and an egg that breaks against it, no matter how right the wall or how wrong the egg, I will stand on the side of the egg. Why? Because each of us is an egg, a unique soul enclosed in a fragile egg. Each of us is confronting a high wall. The high wall is the system which forces us to do the things we would not ordinarily see fit to do as individuals."

"단단하고 높은 벽과 계란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벽이 얼마나 옳고 계란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에 관계 없이, 나는 계란쪽 편을 들 것이다. 왜냐고? 왜냐면 우리 개개인은 모두 계란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영혼 하나하나가 깨지기 쉬운 계란 하나하나에 들어 있다. 우리 모두는 높은 벽을 마주하고 서 있다. 그 높은 벽은 우리에게 개인으로써 하기에는 잘 맞지 않은 어떤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We are all "human beings, individuals, fragile eggs", according to the author. "We have no hope against the wall: it's too high, too dark, too cold," he said. "To fight the wall, we must join our souls together for warmth, strength. We must not let the system control us – create who we are. It is we who created the system."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개인이고, 깨지기 쉬운 계란이다... 우리에겐 그 높고 어둡고 차가운 벽에 대항하는 희망이 없다. 그 벽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다같이 영혼을 따뜻하고, 강하게 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시스템'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게 놓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자. 우리가 바로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다."


저 기사를 읽고 나서, 바로 즉각적인 반응 하나가 내 속에서 솟구쳤는데, 영어로 된 글을 읽어서인지 왠일로 영어로 된 문장 하나가 솟구쳤다. 다음과 같다. 별로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What the HELL are you talking about?



나중에 그가 한 연설의 전문, 을 보게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읽어 보니 느낌은 또 달랐다. 확실히 그는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상을 받으러 갔다면 상을 주는 사람들 앞에서 답례 연설로써 뭘 더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 앞에서 말을 비비꼬는 것이 소설가가 가진 자질은 아닐 것이다.


덧. 어느 블로거가 번역한, 문예춘추 2009년 4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제1부.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 (2009/04/10)


일본.

그의 소설에는 분명 국적없는 개인, 으로 다가오는 매혹이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결국, 일본인이다. 한국을 식민지 삼았던 일본,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원폭 피해자로써의 일본, 을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중동에서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깡패 짓을 하고 있는 유태인/이스라엘,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나치의 학살 당사자라는 피해자로써의 자신들을 끈질기게 이야기 한다. (물론 하루키 본인은 일본인, 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것을 대단히 혐오하겠지만) 하루키가 이스라엘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예전에 동경을 여행 할 때 메이지 신궁을 구경하면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던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신사'와 '신궁'은 좀 다르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역시 그 곳은 단순히 '종교적이며 경건한' 공간만이 아닌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독일과 비교를 좀 해보자면, 

흔히 독일은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자신들의 과오. '나치'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고 그런 독일을 좀 일본이 본 받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면 독일, 이라는 나라는 일본, 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현대 독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나치'와 철저하게 분리, 단절되어 있다. 그렇게 비록 '나치'는 자신의 '과거'이되 지금의 자신은 그 당시와 철저하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나라다. 독일이 끊임 없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나치' 시대를 철저하게 배격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대 독일에 대한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반해 현대 일본, 은 '천황제'를 지금도 유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제국'과 완전하게 정신적으로 분리, 단절 되지 않은 채로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일본 총리가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감수하고 매번 야스쿠니 신사에 존경을 표하는 것에는 저러한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고 본다. '천황'과 '야스쿠니 신사'를 부정하는 순간 그 것은 현대 독일과 달리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일본 공산당'도 일본의 현실에 맞게 변형이 되어 천황제 자체를 반대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이 완전한, 소위 '반성'을 지금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느 나라가 더 '도덕적'이냐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라인홀드 니버가 이미 1934년에 이야기 했다.) 각각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천황'과 '신사'를 넘는 새로운 일본, 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일본에서 일어 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울러, '박정희'를 뛰어 넘는 새로운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 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 생각 들이 이어져서 글을 쓰긴 썼는데, 무슨 '국가'에 대해서 섣부른 일종의 '정신 분석'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원. 아, 그리고 링크 시킨 인용 출처 들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구글 검색을 해서 나오는 순서대로 인용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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