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글리쉬

에세이 2009. 2. 9. 18:39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당시 잠시 고등학교 영어 교사직을 하신 적이 있었고, 그 반대 급부로 집에는 출판사에서 홍보차 보내 준 각종 어린이용 영어 교재가 쌓여 갔다. 당시 그 영어 교재들을 믿기지 않게도 흥미진진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실은 듣기를 강요한 어머니에 의해 조작된 기억일 확률도 조금은 있다.) 그래서 믿기지 않게도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가장 기대가 되던 교과 과목은 영어였다. 영어, English. 그런데 중1때 영어 선생님이, 그러니까 내 생애 첫 영어 수업 시간에 했던 말이 아직까지도 생각난다. 

"영어는 영어로는 잉글리쉬 English 라고 하지. 그런데 말야. 이게 나중엔 잉글리쉬 English가 아니라 징글리쉬가 될 거야. 징글징글하게 너희들을 평생동안 따라다닐 거야." 

징글징글하다 하여, 징글리쉬. 그것은 '콩글리쉬[각주:1]'와 함께 과연 '진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관문에는 영어가 점수로 변해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튼 당시 이 청천벽력과도 같고 저주와도 같은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는 중학교 시절에 영어'공부'를 완전히 손을 놓고 등한시했다. 또한 분명히 내가 어릴 적에 '배웠던' 영어는 꽤 흥미진진한 것이었는데, 중학교 시절에 만난 영어는 [성문 종합 영어]의 옷을 입고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내게 오형식과 관계대명사와 투-부정사와 전치사를 읊어 댔다. 영어는 언제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분석'의 대상이었고 '학문'의 일종 이었다. 동시에 단어장과 숙어장이 나를 반겼다. 물론 그 와중에 영어 공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등등의 책들은 언제나 서점에 진을 치고 있었고 대학생이 되고 나선 나도 물론 그런 책들의 저자들에게 돌아가며 인세를 보태 주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면 자기 얼굴 보다 세 배는 더 큰 귀를 가지고 활짝 웃고 계시던 어느 토익 영어 전문 강사님이 돌아가셔서 그런지, (새삼 돌아가신 분에 대한 명복을 빈다. 이제서 고백하자면, 그 학원에 한 달 다닌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짝사랑 했던 여자를 우연찮게 만나게 되어서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느 샌가 영어'공부'의 '패러다임'은 바뀐 듯 하다. 문법과 단어와 해석이 아닌 실질적인 말하기와 듣기와 읽기와 쓰기를 강조하는 것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 국제화 시대, 혹은 세계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어, 영어, English를 강조하는 외침이 징글징글하게 한국 땅에서 언젠가 부터 메아리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인과관계가 거꾸로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국제화' 시대와 '세계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 영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영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국제화'되고, '세계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와 학원에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ESL 영어 강사들, 대학교의 영어 수업을 위해서 고용되고 있는 영어권 국가 출신 교수들, 그들이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중국과 일본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별 인기 없던 한국 땅을 자꾸만 '국제적'이고 '세계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농촌에 베트남과 필리핀 출신 여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과 함께 말이다. 

아무튼 영어 산업은 지금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산업 중에 하나고 당분간 불황을 모르는 산업이 될 듯하고, 미국 경제가 엉망이 되어갈 수록 동아시아 -서서히 영어 열풍이 꺼져가고 있는 일본과는 달리 활활 타오르고 있는 한국- 에는 점점 더 영어 강사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이 현상 안에는 사실 굉장히 많은 것들이 들어 있고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의 일면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중국을 배경으로 만든 다큐멘터리가 얼마 전에 나왔는데,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제목은 Mad About English. 어서 보고 싶다.


  1. 언제 어디선가 읽었던 기사가 기억이 난다. 그 기사는 그 많은 중국 인구가 서서히 영어를 배우게 되어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인구 보다 더 많아지게 되면, 영어를 제2의 언어로 배우는 사람이 더욱 많아져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인구보다 더 많아지게 되면, 그때는 과연 어떻게 될까, 를 다루고 있는 기사였다. 그때는 콩글리쉬, 칭글리쉬, 재패니쉬가 더 이상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고, 액센트 또한 더 이상 '표준'이라는 것이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예측 기사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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