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물

에세이 2009. 2. 8. 01:42

"미국 물 좀 먹었구나?"

빈정거리듯 던지는 저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한국에 가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저 소리를 듣게 된다면 왠지 좀 슬퍼질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다음부터 녀석들이 대화 중에 불필요한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지 안 섞어 쓰는지를 주시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이 곳에 온지 한 달 도 채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이다호 (맨 처음엔 아이다, 라는 호수 이름인 줄 알았다.) 주에서 유학 중이던 친구 한 녀석이 샌프란시스코에 놀러 왔고, 어느 중국 음식점에 같이 갔었다. 음식 두 개를 주문하고, 같이 나누어 먹게 되었는데, 나는 그저 무심코 중간에 놓여진 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공용' 수저를 이용해서 내 그릇에 담았고, 다시 '내' 수저를 사용해서 먹기 시작했는데, 친구 녀석이 그 광경을 다소 짜증스럽게 바라 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서로 내색은 안 했지만, 그 순간 나보다 일 년 반은 더 미국에 살았던 녀석의 머릿 속에는 아마 저 말이 떠오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친구 녀석은 졸업을 하고 일자리를 구하는데 실패하고 작년 겨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 갔다. 막 판에 전화 통화를 하다가 꼭 시민권 가진 여자를 만나서 결혼해서 이 곳에 정착을 하라는 자신의 아쉬움이 담긴 말을 하고 돌아갔는데, 그 뒤로 그 친구와는 연락이 점차 뜸해지고 있다. 조만간 연락 한 번 해야지 싶기도 하다.)

내가 하는 많은 생각들, 행동들은 미국,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샌프란시스코, 에 살면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한국에 있을 때 부터 하던 생각들, 행동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이 곳에 내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이제 일 년 하고도 칠 개월 남짓 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내가 예전부터 개인주의에 좀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이 곳에 살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들도 있다. 개인주의의 부정적인 면,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에 좀 더 민감해지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인종에 대한 것들이다.)

좀 웃기는 예를 들자면, 홍대 클럽에 처음 가보았을 당시 내가 느꼈던 것은 삥 둘러 앉아 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이리저리 싸돌아 다녀야 하는 클럽 안에서 느꼈던 일종의 자유로움 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실은, 삥 둘러 앉아 퍼 마시는 술 자리에 동석한 여자들 보다는 클럽 안의 여자들이 더 예쁠 확률이 높기 때문 일지도 모른다. 물론 '물'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쪽수'다.) 

혹은, 예전부터 나는 한 가지 잣대로 줄 세우는 등수 매기기 보다는 각자의 독특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독특, 이라는 단어와 특이, 하다는 단어에 대해 민감한 사람들이 있는 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논평하면서 그 자식, 참 특이해,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누군가에게 그 '특이'라는 단어를 '독특'이라는 단어로 바꾸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어진다. 물론 대화의 맥을 자르는 그런 말을 하진 않는다. 다소 쓸데 없는 민감함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내가 한국 작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 김승옥인데, 신경숙이라는 소설가는 그 김승옥이라는 소설가를 매우 존경한 나머지 자신의 문학 수업을 그 김승옥의 소설을 베껴 쓰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굉장히, 대단히, 매우매우 절실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떻게 '작가'가 되어 온전한 하나의 개인으로 인정 받으려는 사람이 남의 소설을 베끼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출간 된 신경숙의 새 소설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 해] 앞 부분을 잠깐 읽어 보았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내 편견과는 달리 느낌이 괜찮았다. 특히 서술자가 이인칭 주어를 사용하면서 '너는-' , '너는-' 이라고 말하는 장치는 꽤 인상적이었다.)

연관지어서 문하생, 이라는 무협지적인 세계관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문하생이 성공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문하생은 결국 그 대가 밑에서 '뒤치닥거리'를 하는 노동자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 하산 하거라, 는 그야말로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문하에 들어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하산을 할 래야 할 수가 없다. 그거 말곤 먹고 살 길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대 투쟁'을 해야 하고 시급 혹은 주급 또는 월급을 차질 없이 정확하게 챙겨야 하는데, 대부분 언젠가는 그 '문하'를 벗어나-통해서, 자신이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의 경우와 같은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만화 산업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문하생'이라는 개념 보다는 그 밑에서 일하며 계약에 의거해서 정당한 보수를 받는 '노동자'의 개념을 갖는다고 알고 있다. 물론 우리 나라의 '발달한' 영화 산업과 방송 산업에는 지금도 '문하생'들이 몰려 들고 있다. (그리고 나도 한 때 '문하생'이 되기를 자처한 적이 있다. 다행히도 그 밑에는 빵빵한 문하생들이 많아서 그 문하에 들어가질 못 했다.)

더 진지하게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나는 상대방과 서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렇게 된 다면 마치 여기저기에서 멋지게 묘사 된 사무라이들의 대결 처럼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한 사람은 죽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면에선 그것이 진짜 '대화'인지도 모르겠다만.) 

단지 어떤 사안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물론 나도 그런 부분에 있어서 예민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의 세계관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살면 기본적으로 모든 논쟁은, 아니 모든 대화들이 상대방의 세계관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식으로 흐를 때가 많은 것 같다.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보내는, '통촉하소서 마마-' 로 시작 되는 상소문이라는 조선 시대 문화-체제의 영향, 혹은 어린 시절에 접했던 전래 동화를 비롯한 조선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과 '사극'들의 영향 때문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위 친구와 친구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 선생(혹은 교수)과 학생 사이에 '갈굼'이 존재할 때 매우 불편했다. (덧붙이자면, 말 그 자체로써는 상대방의 세계관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강렬한 이야기를 접하는 간접 체험 혹은 어떤 강렬한 직접 체험이 있으면 모를까.) 

그리고 개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규칙을 지키게 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본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예컨데, 고등학교에서 선생들이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가지고 지랄하거나 때리는 것은 무의미하고 낭비라고 본다. 그냥 학교 전체를 금연 구역으로 설정하고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발견하게 되면 제재를 가하면 된다. 이때 그 제재는 정학이 될 수도 있다. 담배를 가지고 있는 학생을 발견하게 되면 청소년에게 담배를 파는 곳을 고발하면 된다. (이렇게 쓰다 보니 개인주의라기 보다는 어떤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저대로 되었더라면 난 고등학교 때 담배를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쓰다 보니, 미국 물을 먹어서 그런지 이야기가 점점 통제가 되질 않는다. 대강 통제가 되는 것 같아 보이는 이 시점에서 마무리지을까 한다. 문맥과 상관 없이 삐져 나오는 이야기들을 담기 위해 남발한 () 괄호가 읽는 이들을 성가시게 할 것 같다. 그랬다면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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