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베이어 벨트

에세이 2008. 7. 20. 17:52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이 난다. 신은경 - 왜 그 [조폭마누라]에 나왔던 여자배우 말이다. - 과 얼굴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신은경과 그의 남편이, - 어쩌면 [조폭마누라]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 마트에 가서 쇼핑 카트를 몰고 다니다가 바겐 세일 코너에 가서 치열한 몸싸움 끝에 싸게 물건을 집어 든 다음 밝고 환하게 웃으면서 남편과 몸을 부딪히면서 스킨십을 하는 장면이다. 대단히 평화로운 일상적인 행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난 그 장면이 매우 경멸스러웠다. 가끔씩은 도무지 이러한 일상적인 행복에 대한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마트는 싸고 편리하다. 그런데 왜 나는 마트에 가는 것이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울까. 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해서 빨리 빠져 나오고 싶어지는 걸까. 쇼핑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다양한 물건들이 쌓여 있는 코너들을 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을 받아서? 계산대에 다가가서 검정색 고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물건들을 하나 둘 씩 올리는 것이 비인간적이어서?

언젠가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집 근처 '피트니스 클럽' (알다시피, '헬스 클럽'과 '피트니스 클럽'은 엄연히 다르다. '짱깨집'과 '차이니즈 레스토랑'의 차이 정도랄까.) 에서 클럽 회원들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그 곳을 무료로 한 달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고, 그래서 난 뱃살을 주물럭 거리며 몇 번 그 곳에 간 적이 있다.

과연 그곳은 '헬스 클럽'과 달리 '피트니스 룩'을 한 껏 차려 입은 여자들로 가득 했는데, 참으로 하늘거리는 그녀들의 생김새는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힘을 쭉 빼놓곤 했다. 그 곳엔 갖가지 형태의 기계들로 그득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계는 물론 런닝 머신이었다.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속도를 조절하고 시간을 입력하고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 말이다. 그 벨트 위에서 달리면서 땀을 쭈욱 빼다가 어느 순간 마트에서 느꼈던 그 기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고 나는 그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려 왔다. 그리곤 다시는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의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라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패션지 편집장이 신참내기 직원에게 한 소리를 하면서 대체 니가 입고 있는 그 '블루'가 그냥 '블루'인줄 아느냐면서,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짜내는 것 부터 시작해서 그 '블루'가 대중화 되어 대중적인 브랜드의 옷에 사용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설명력의 부족으로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듯)그걸 보는 순간 뭔가 저 분께서는 지금 게임의 법칙 그 자체를 꿰고 있구나, 대체 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한 큐에 설명해 주고 계시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힘든 노동의 댓가로 손에 쥔 자유 이용권, 돈을 사용하는 그 순간도 뭔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알짱거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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