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박 여행기, 신두리

김이박 이야기 2009. 7. 9. 10:12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상동리 앞에서 김이박은 하룻 밤 묵을 곳을 찾다가 여인숙을 발견했다. 주인장에게 만 원을 쥐어 주고 방안으로 들어선 김이박은 순간 온 몸에서 가려움을 느꼈다. 호텔, 유스호스텔, 모텔, 여관이 아닌 여인숙은, 난생 처음이었다. 가방을 놓고 방을 나와 여인숙 옆 슈퍼로 들어가 하이트 맥주 한 피처와 담배 한 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샀다. 여인숙 앞 길에선 어느 나이 지긋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눈웃음을 치며 김이박에게 학생, 놀다가지 그래, 라고 말을 걸었고, 한 쪽 켠에는 얼굴이 까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옹기종기 서 있었다. 

방 안에서 맥주를 들이키고 마음이 가라 앉자 그제서야 가려움이 사라졌다. 서서히 그 한 평 짜리 공간에 익숙해져 갔다. 김이박은 순간 이 곳이 잠시 거쳐가는 곳이 아니라 매일매일 일상을 살아야 하는 공간이 된다면 어떨까, 과연 살 수 있을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지금 꾸고 있는 꿈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꿈을 꾸고 있을 걸. 간단히 답을 내리고 난 후 가방을 열어 책 두 권을 꺼냈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와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여행의 목적이 죽으러가는 건 아니었으나. 

김이박이 자기방 한 켠의 커다란 책꽂이 앞에 서서 딱 두 권을 챙겨야겠다고 마음 먹었을때, 이상하게도 그 두 권이 연결되어 눈에 들어 왔다. 자기방에서는 전혀 읽히지 않았던 그 글줄들은 이상하게도 여인숙방에서는 죽죽 읽혔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얇은 벽을 타고 옆 방 여자의 신음소리가 김이박의 귀에 들어왔다. 남자와, 어쩌면 여자와, 혹은 홀로 만들어 냈을 그 소리. 솔직했다.

이틑날 아침 김이박은 여인숙 앞 히드라 침 튀기는 소리가 요란했던 PC방에서 갈 만한 곳을 검색 한 끝에 버스를 타고 변산반도로 향했다. 변산반도에 도착해서 노을, 시원한 바다 전경,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한적한 바닷가, 한적한 먹자골목의 횟 집 창문마다 와글와글거리는 주문표들을 감상했다. 아름다운 자연과 익숙한 풍경들. 지겨웠다. 

역전의 또 다른 여인숙으로 향했다. 이번엔 가렵지 않았다. 만 오천원 짜리 여인숙방은 오천원의 값어치 만큼 욕조와 TV가 딸려 있었다.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고 맥주를 마시며 오랜 만에 TV를 켰다. 놀랍게도 TV에서는 마침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이 방영 되고 있었다. 나이스 타이밍. 김이박은 TV를 틀어 놓은 상태에서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불 붙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뜨거운 물에서 나오는 뿌연 수증기와 뿌연 담배 연기가 섞였고, 마침 TV에서는 [몽중인 夢中人] 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완벽했다.

영화가 나를 집어 삼킬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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