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영어책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에세이 2008. 9. 17. 12:04

전차를 탔다. 옆자리에 한 동양 남성이 앉았다. 손에 들린 책을 보니 '콩나물'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한국인이구나. 그리고 행색을 보니 여행객이 틀림이 없다고 추측했다.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펴든 상태로 책은 읽지 않은채로 주위를 계속 휘휘거리면서 두리번 거리는 불안한 몸짓이 느껴졌다. 내 경험에 따르면 여행객의 몸짓이다. 그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성이 아닌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면 난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 '콩나물-'이라는 말로 시작된 책을 흘낏 쳐다 보았다. 그 책의 왼쪽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제26일, Accomplish- " 날짜 별로 암기해야 하는 중요 단어가 실려 있는 단어 책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왜 여행을 와서 단어 책 따위를 들고 있는거냐.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거냐. 줄줄이 이어지는 잡생각들. 근데 보다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옆에 앉은 한 한국인이 저 책을 들고 있는 것이 화가 날까?

어쩌면 한국적인 토양에서 자란 나도 그러한 주입된, 거짓된 영어 스트레스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단어장으로 구성된 책 몇 권쯤은 샀을 것이며,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항상 맘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문득 솟구치는 근원적 의문, 왜 영어를 해야하지에 대한 대답은 미룬채로. 아싸리 영어 점수 따위는 중요치 않아, 라고 무시해 버리는 것도. 한국식 영어 '공부'에 뛰어 들어 점수 올리기에 매진하는 것도 아닌 어물쩡한 상태로 말이다. 이 모든 건 결국 나 혼자 생각을 피워 올리는 것에서 비롯 되었지만, 결론은 내 과거, 내 과거를 둘러 싸고 있었던 환경에 대한 노여움으로 발전하는 엉뚱한 계기가 되었다. 

한 가지 더.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대체 무슨 글이 실려 있었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체 못할 반발심으로 당시엔 영어 교과서를 제대로 펴본 적이 없으니깐 말이다. 한데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독일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는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를 가로 지르는 고전을 집필했던 작가의 소설이 어려울 것이라는 단견과는 달리,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은 그의 드라이한 문체 때문에라도 영어로 된 소설 중에선 제일 읽기가 수월하다. 대체 헤밍웨이의 소설을 고등학생에게 읽히는 독일의 영어 교육과 한국의 그것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본다.


우리 집에 누군가, 가 놀러 왔다.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가 다른 주로 떠나 1년간 교환학생 과정을 이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누군가, 는 바이올린을 들고 왔다. 속에서 또 꾸역꾸역 생각들이 맴돌아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에게 이렇게 물을 뻔 했다. 그래, 바이올린 뮤지션/연주가 중에서 누굴 제일 좋아하니? 누군가, 는 과연 바이올린이 좋아서,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소리가 좋아서 바이올린을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면 한국 중산층의 유별난 서양 클래식 악기에 대한 사랑이 녀석에 까지 대물림 된 것일까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질문. 이미 내 나름대로는 후자의 것일거라는 설정을 이미 깔아 놓은 채 확인을 하고 싶다는 것.

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영화 [조이럭 클럽] 을 보다가 발견한 사실은 피아노에 대한 사랑이 한국 중산층 가정의 전유물 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살아 가는 중국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네 명 정도의 딸과 어머니들을 통해서 다루고 있는 그 영화는 어머니와 딸과의 주요한 갈등의 축으로 피아노 배우기를 소재로 다루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피아노를 배울 것을 강요하고, 딸은 그것을 괴로워 하면서 억지로 배우다가 마침내 반항하게 된다는. 억지로 피아노를 배웠던 내 어릴 적 모습이 겹쳐 지면서 난 그것이 아시아적인 무엇일 거라고 사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 영화를 고른 인도계 여자 선생이 감동적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봤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홀로 확신을 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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