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클레지오와 최수철

에세이 2008. 9. 23. 20:54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뒤적거리던 시절이었다. 책방에서 몇 권 사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몇 권 빌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유명 작가의 유명세에 기대다가, 차츰차츰 취향이 생겼다. 때로는 제목만 보고 느낌이 오는 책을 덥썩 집어 들고 읽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조서: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 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의 소설이었다. 무슨 무슨 상을 받았다는 찬사 보다 내게 더 중요한 건 저 제목이었다. 왠지 책에서 광기어린 남자의 얼굴이 어른 거렸다. 

책을 중간 쯤 읽다 덮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서 생겨난 프랑스 문화에 대한 호감, 파리를 여행 했을 때의 그 느낌은 온데 간데 없이 프랑스어를 번역한 글은 더 이상 읽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되내였다. 그 생각은 단단치 않아서 그 뒤로도 몇 번 더 데였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번역 만의 문제는 아니다. 생각보다 나와 코드가 안 맞았을 수도 있고, 서구 문화에서 살아 가면서 비롯된 고민이라는 맥락이 나와 맞지 않아서 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책은 내 책꽂이의 한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 갔다.

어느 날, '기억과 상상' 이라는 주제로 르 클레지오가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억. 그리고 상상. 꽤나 고민했던 주제이고, 실제로 부딪히기도 했던 주제였다. 마침 할 일도 없었고, 날은 추웠지만 나는 그 곳으로 향했다. 가방엔 다 읽지 않은 '조서'를 챙겨 넣었다. 객석의 자리는 삼분지 일쯤 차 있었다. 맨 앞 자리에는 소설가 황석영이 앉아 있었다. 그 뒷 줄에는 박이문 교수가 앉아 있었다. , 취직이라는, 토익 공부라는, 현실을 도피한 채로 읽었던 책중에 박이문 교수가 쓴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이라는 철학 에세이가 들어 있었다. 두 번을 비비 꼰 제목이 맘에 들었다. 줄도 몇 군데 그었고, 책꽂이에 꽂아 놓았다. 

르 클레지오가 들어 왔다. 백발의 장성한 그는 단상에 마련된 테이블의 맨 왼쪽 의자에 커다란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그 옆 자리는 사회자의 몫이었고, 다시 그 옆 자리에 작가 최수철이 있었다. 

문학과 지성 소설명작선도 동시에 뒤적거리던 시절이었다. 최수철의 '공중누각'이라는 소설집도 그 안에 포함 되었다. 그 책을 돗대기 시장 마냥 붐비는 청계천의 한 귀퉁이에 앉아서 읽어내려 갔었다. 청계천은 막 콘크리트 어항으로 탈바꿈을 바친 상태였고, 사람들은 그 곳에서 데이트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애초에 나는, 파리의 뤽 상부르 공원에는 따뜻한 햇살과 푸르른 잔듸와 연애하는 남녀와 개를 끌고 산책나온 사람들과 책을 읽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서울에선 왜 바깥에서 여유롭게 주저 앉아 책을 못 읽을 소냐 싶었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서울 광장도 기웃거려보다가 그냥 청계천으로 향했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갈데가 없구나 툴툴거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경복궁 안에라도 가봤어야 한다는 생각은 든다. 어쨌거나, 쭈그리고 앉아 읽은 '공중누각'은 꽤나 머리를 두근거리게 만들고, 심장을 벌떡거리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내 안의 무슨 단추를 누른 것 마냥, 속에서는 끊임없이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용은 하나도기억나지 않는데다가, 주제가 뭐였는지 뭐가 뭐였는지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몇 줄기의 섬광 같은 것만 남아 있다. 

강의는 지루했다. 쓸만한 말은 몇 개 없이 교장 선생 훈시나 대대장 정신 교육처럼 시간이 흘러흘러 갔다. 서구 세계에서 온 르 끌레지오는 프랑스와 한국이 닮아서 친근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다. 두 나라 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비해 약하다고 했다. 글쎄요. 미국에서 출간된 '우리들의 멍청한 세상 Our Dumb World' 이라는 배꼽 빠지는 책에선 프랑스에 대해 '신 위에 있는 단 하나의 나라 One Nation Above God' 프랑스는 혁명도 발명하고 문화도 발명하고 예술도 만들었고, 와인도 만들었다고ㅡ 말하고 있던데요. 어쨌든. 르 끌레지오는 다음 학기 부터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한다고 했다. 짧은 강연이 끝나가는데 나는 작가 최수철을 바라 보았다. '공중누각'을 생각했다.

짧은 강연이 끝나고 작가 사인회가 열렸다. 르 클레지오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섰다. 르 클레지오는 제1세계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최수철은 여기서 한국어로 글을 썼다. 최수철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지하 1층 교보 문고에 내려가 '공중누각'을 한 권 더 사올까라는 생각을 했다. '조서'를 꺼내 앞으로 나갔다. 내 앞에는 머리가 길고 손톱이 길고 눈썹도 긴 까만 머리 여자가 서 있었다. 예뻤다. 

갑자기 좌중이 어수선해지더니, 하얀 백발의 박이문과 그 수행원이 단상 앞으로 다가 왔다. 수행원은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말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수행원은 박이문을 르 클레지오 앞으로 데려 갔다. 박이문은 르 클레지오를 알현하고 그에게 어떤 명함 하나를 건냈다. 박이문은 매우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르 클레지오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까만 머리 여자 차례가 되었다. 르 클레지오에게 프랑스어로 웃으며 말을 걸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더욱 예뻤다. 나에게 똑딱이 카메라를 건네며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르 클레지오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 차례가 되고, 나는 말 없이 '조서'를 건넸고, 르 클레지오는 책 앞 표지에 싸인을 해 주었다. 강연장을 나와 엘레베이터를 타고 일층 로비로 향했다. 눈발이 내렸다. 점점 멀어지는 까만 머리 여자의 뒷 모습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연기와 눈발이 섞였다. 나는 다시 강연장으로 엘레비이터를 타고 올라 갔다. 최수철이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최수철에게 쭈볏쭈볏 다가갔다. 소설 잘 읽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당신의 소설을 잘 읽었노라는 말이 그 순간 하고 싶었다. 르 클레지오의 싸인이 담긴 '조서'는 언젠가 그의 소설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발을 맞으며 집으로 와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을 책꽂이에서 빼 쓰레기통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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