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박 여행기, 상동리

김이박 이야기 2009. 7. 4. 19:24

김이박은 불현듯 떠오르는 낭만적인 공상들과 돈을 챙겨 집을 나섰다. 서울역으로 향했다. 그는 기차를 타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 어디선가 접했던 낭만적인 풍경에는 항상 기타와 칠성 사이다와 춘천행 기차가 함께 했지만, 춘천엔 가본 적도 없었고 기타는 칠 줄 몰랐고 칠성 사이다는 마셔 본지 오래.

서울역에는 전경들로 그득했다. 정부는 전국 농민대회를 일치감치 불법으로 규정지었다. 전경들은 전국 농민대회를 며칠 앞두고 상경하는 농민들을 하나 둘 씩 체포했다. 그는 전경과 농민들을 지나 서울역 매표소 앞에 섰다. 터치스크린이 장착된 자동 매표기 앞에 섰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정하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섰다. 서울에서 가장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는 지명을 검색하다 그럴듯한 지명 하나를 발견했다. 상동리. 순간 김이박의 머리 속에선 -리, 에 걸맞는 -리, 스러운 풍경들이 펼쳐 졌다. 양촌리는 아니지만 상동리에는 전원마을이 펼쳐져 있고 담임 선생님에게 참 잘했어요, 라는 도장을 받기 위해 전원일기를 쓰는 금동이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동리에 가는 기차 표를 손에 쥐고 김이박은 기차에 올라 탔다. 옆 자리에는 한 아줌마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창 밖에는 익숙한 경부선 고속도로변과는 사뭇 다른 풍경들이 펼쳐 졌다. 상동리. 그는 심지어 그 곳이 어느 도에 있는 지도 몰랐다. 경상도인지 강원도인지 충청도인지 혹은 전라도인지. 경기도일지도 몰랐지만, 왠지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설레였다. 투닥투닥, 투닥투닥. 무궁화호는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냈다. 김이박은 그 소리를 좋아했다. 

옆 자리에 앉은 아줌마가 통화를 시작했다. 투닥투닥, 여보세요, 투닥투닥, 아들, 나야. 투닥투닥, 잘 지내 아들? 투닥투닥, 이번 방학 때 내려 올 거지? 투닥투닥, 뭐라고? 투닥투닥, 뭐하는데? 투닥투닥, 안 내려 온지 꽤 되었잖아? 투닥투닥, 그러지 말고 내려 와. 투닥투닥, 아니, 방값도 보내 달라고? 투닥투닥, 용돈은? 투닥투닥, 벌써 다 썼어? 투닥투닥,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투닥투닥, 집 근처에서 과외 해도 되잖아? 투닥투닥, 알았다, 알았어. 투닥투닥, 알았어, 끊는다. 투닥투닥, 투닥투닥, 투닥투닥.

통화를 마친 아줌마는 전화기를 한 동안 만지작 거리다가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어느 새 창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점점 상동리에 가까워져 가는데 아파트의 갯수는 점점 늘어만 가자 김이박은 다소 불안했다. 이윽고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을 쏟아 냈다. 김이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차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기껏해야 경기도 언저리에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긴 상동리인데, 여긴 어디지? 

상동리역 앞 광장에는 커다란 관광 안내도가 붙어 있었다. 광주광역시 관광 안내도. 김이박은 순간, 서울의 청량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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