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박 일상기

김이박 이야기 2008. 7. 26. 09:47

김이박은 조그마한 웹 사이트 기획사에 다닌다. 그 바닥에선 알아주는 기획자가 얼마 전에 독립하면서 새롭게 차린 회사다. [성공하는 인간들의 백 가지 습관],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뱀머리 리더십], [금송아지가 온다], [인맥 마케팅] 등등 갖가지 리더십, 마케팅 서적과 경영 이론들이 줄줄히 꽃혀 있는 사장실에서 김이박은 면접을 보았다. 사장이 썼다는 책도 한 구석에 꽃혀 있었는데, 김이박은 후일 입사한 지 삼 개월이 지나서야 회사에서 버는 순수익이 사장이 썼다는 책의 인세보다도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김이박은 회사에 합격을 했던 것이다. 서울 소재의 사 년제를 나오고 글을 좀 말이 되게 쓸 줄 알고, 영어 성적이 좋고, 대학 시절 조그만 공모전에서 상도 탄 경험이 있는 김이박을 사장이 괜찮게 본 모양이다. 

오늘도 김이박은 자신을 닦달하는 거래처 이 대리의 비위를 맞춰 주느라 진땀이 빠져라 전화길 붙들고 있다 오전 일과를 마쳤다. 남녀관계보다 더 힘들고 더 무서운 건 갑을관계였다. 하지만 김이박의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는 말이 말을 낳으면서 하나도 결정되는 것은 없는 기획 회의도, 내용 보다는 PPT의 폼과 글씨의 폰트를 맞추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이는 프리젠테이션 준비도 아니었다. 바로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이었다. 그때만 되면 김 팀장의 눈치를 봐가며 메신저질과 스포츠 기사 검색에 열을 올리던 옆자리 박군도 여지 없이 진지해 지는 것이었다. 과연 오늘 점심엔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 그 어떤 회의에서 오가는 문제 보다도 더욱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는 바로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다행히도 오늘은 야근이 없는 날이다. 김이박은 오랜 만에 맞는 야근 없는 금요일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종로로 향했다. 버스를 탔다. 버스 전용 차선을 타고 버스는 신나게 씽씽 달린다. 버스 안은 버스 기사가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로 매우 시끄럽다. 음악이 꿍짝꿍짝 흘러 나온다. 이어서 교통 안내 방송이 나온다. 언제나 그랬듯이 교통 안내 방송의 내용은 똑같다. 이쪽도 막히고 저쪽도 막히고 저기선 차량이 오도가도 못하고 있으며, 요기선 차량들이 서행하고 있으니 우회하라는 방송이다. 버스 기사의 표정은 침울했다. 승객들은 대부분 손에 뭔가를 쥐고 있다. 문자도 보내고, 게임도 하고, 음악도 듣고, 다운 받은 미드도 본다. 그런데, 노선이 정해져 있는 버스에서 왜 교통 정보가 필요한 걸까.

김이박은 버스에서 내려 부랴부랴 약속장소로 항했다. 사람들로 미어 터지는 종로 길거리에서 그는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연인 한 쌍과 심하게 부딪힌다. 여자의 어깨가 김이박의 허리를 빠르게 강타하고 지나갔다. 김이박이 찡그리면서 여자를 바라보지만, 여자는 여전히 남자의 품 안에 안겨서 까르르 거린다. 그 옆에 있던 남자가 대신 대충 사과하고 지나간다. 저들은 과연 한 몸이구나.

김이박은 약속 장소인 서울 극장 앞에 도착했다. 여자 친구를 기다리면서 담배를 한 대 꺼내 무는데, 갑자기 옆에서 욕지거리가 들려 온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방금 영화를 보고 나온, 김이박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두 남자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 씨발 왜 이걸 보자고 한거야. 존나 재미 없잖아. 아이 씨발. 난 존나리 재미있을 줄 알았지. 아 정말 요즘 영화가 왜 전부 이따위냐. 존나 짜증 이빠이네. 그래, 정말이지 한국영화 수준 정말 낮은 거 같아. 아 씨발 이젠 정말 한국 조폭 코메디 영화는 안 볼거야. 그러게 씨발 욕만 졸라리 하고 하나도 재미없어. 야, 씨발 술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야. 오늘은 술 먹고 좋은데 가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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