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들추어 본 도쿄 관광기

에세이 2009. 4. 7. 15:46

2008년 팔 월, 일본 동경에 오일 간 머물렀다.





내게 자신이 묵고 있던 기숙사 방을 제공해준 친구는 한국에서 논문 심사 준비를 해야 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과 달리 난 그 도시에 홀로 머무르게 되었다. 일본의 첫 번째 인상은 친구가 살고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공간들이 구석 구석 낭비 없이 잘 활용 되고 있었다. 화장실의 욕조는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었는데, 그 것 또한 화장실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었고, 한 개의 수도꼭지로 세면대와 욕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또한 공중 화장실에는 남성용 소변기 옆 마다 우산 걸이가 장착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디테일'했다. 순간 디자이너들이 일본에 와서 열광하고 간다는 소리가 생각 났다.

동경의 지하철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는 것을 넘어서 산 골짜기의 선사 마냥 정적이 흘렀다. 샌프란시스코의 버스 안은 곳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음악 소리로 난리 법석인데, 동경의 지하철은 정적이 흘렀다. 내 이어폰은 싸구려여서 음악들이 바깥으로 대부분 새어 나왔는데, 그 때 마다 친절한 일본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소리를 줄여 달라고 요청하고 갔다. 나중엔 지하철에서 음악 듣는 것을 포기 했다. 



시부야에는 사람이 많았다. 담배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피울 수 있었다. 처음엔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만 그 지정된 장소를 찾았다. 나중엔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정말 외로워질 때면 그 장소에 기어 들어 갔다. 한 무리의 사람 들이 잠시 같은 곳에 모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연기를 내뿜다가 다시 제 갈길 가는 느낌이 좋았다. 



메이지 신궁은 일본이 우리 나라와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전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근대화'를 시켰던 메이지 천황과 그 부인의 시체가 썩어 있는 곳이다. 그 곳을 방문하면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애써 지우자, 하늘 천, 자를 형상화 시킨 간결한 도리이의 미학이 나를 반겼다. 



관광지이지만 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고, 관광지이지만 관광지 특유의 요란하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다소 덜했다. 약간의 경건함이 느껴졌고, 그 곳에서 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다. 동전을 함에다가 던져 집어 넣고, 박수를 두 번 딱딱 치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별 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랫 동안 눈을 감고 있으려니 눈꺼풀만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참배 방법을 한 녀석에게 배웠다. 그 녀석은 내가 메이지 신궁에 들어 갈 때 부터 내 앞에서 줄곧 혼자 걸어갔다. 머리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샤기 컷을 했고, 허리에는 체크 무늬 웃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시부야를 배회할 법한 녀석이었고, 펑크 락도 좀 좋아 할 것 만 같은 녀석이었다. 그 녀석의 일상에 메이지 신궁이라는 공간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신주꾸로 향했다. 가부키초 1번가. 쾨쾨한 냄새를 벗삼아 보았던 많은 일본 만화들이 그 곳을 무대로 하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왠 흑인이 한국말로 말을 걸어 왔다. 업소 삐끼였다. 아무리 다소 불안하고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관광객의 행색이었다고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느 락 음악 공연이 열리는 곳에 도착 했다. 관객은 대부분이 이십 대 초반의 앳된 여자 애들이었고, 음악이 시작 되자 그 들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한 켠에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 되어 있었다.  

                                     
동경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에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들은 하나 같이 운동복에 가까운 복장을 하거나 자전거 택배일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복장들을 따라 가고 있는 데 반해 동경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패션에도 신경들을 쓰고 있었다. 동경은 대도시였다. 

셋째 날이 되자 문득 패션에 신경 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젠 체 하느라고, '세계로 간다' 류의 책이 싫어서, 정보가 보다 다양해서, 샌프란시스코 시립 도서관에서 빌린 '론리 플래닛' 영문판을 들고 다녔다. 슬슬 그 책에서 찾은 바 Bar 몇 군데를 들리기 시작했다. 맥주 값은 턱없이, 너무나 턱없이 비쌌다. 비싼 맥주를 먹고 나와 충동적으로 길거리에 놓여져 있는 자전거 몇 개를 잡아 당겼다. 세 번째 자전거는 중심이 약간 어긋나 있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넷째 날부턴 그 자전거를 타고 동경 시내를 돌아 다녔다. 마치 내가 이 곳에 오랫 동안 살아 왔던 사람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런 착각 속에 길을 잃었다. 그리고 펼쳐지는 서민적 풍경들. 그런데 그 서민적 풍경들이 구질구질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그 곳에서 외국인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서민적 풍경들 마저도 나에겐 이국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의 해악이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며칠 간 어딘 가에 머문다. 원래 들었던 풍문과, 보았던 영화와 사진들과 만화들이 여행의 들뜬 마음과 결합해서 현지에 대한 판타지를 마구마구 생산한다. 

어쨌든 정말로 멋진 바 Bar 하나를 발견해서 이틀 연속으로 갔다. 이름은 4, 일본어 발음으로 시-. 첫 번째 날엔 머리 색깔만 검고 이외수를 닮은 주인 홀로 있었다. 시부야역 바로 옆에 위치한, 기찻길 옆 바 Bar는 전철이 지나갈 때 마다 조금씩 떨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로 조금씩 더 떨었다. 주인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 보자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디제잉에 열중했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어 주는 바였다. 오 미터 길이의 나무로 된 바와 조그만 나무 테이블이 네 개, 조금 커다란 단체 손님용 테이블에 하나 있는 바였다. 주인이 손수 서빙을 하고 손수 음악을 섞었다. 두 번째 날엔 프랑스계 일본인 여자 바텐더가 있었고 여자 한 명이 바에 앉아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바 안으로 들어 갔다. 



                                        
그녀 옆의 옆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시키고, 먼저 바텐더에게 말을 건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여자 손님 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눈썹이 가늘었던 그녀는 화장기가 전연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치 허연 가부키 분장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평범한 오-에르, O.L, Office Lady, - 사무직에 종사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 - 라고 소개한 그녀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샌프란시스코에 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첫 대화는 쉽게 풀려 나갔다. 그리고 난 그녀 바로 옆 자리로 옮겨 갔다. 

그녀는 힙-홉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힙-합 아닌가요? 힙-홉, 홉, 홉. 끝내 힙-합을 힙-홉으로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그녀가 순간 귀여워 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내가 머리 속에 품고 있었던 귀여운 일본 여자, 라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딱 맞은 얼굴 이었다. 

난 일본식 서민 술집에 가서 꼬치 구이 냄새를 맡으면서 사케를 마시고 싶었지만, 멍청하게도 난 그 전에 그녀에게 나이를 물어 보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녀는 삼십 대 중반이었고, -얼굴은 분명 이십 대 중반인데- 애가 있는 이혼녀였다. 그래, 큰 상관은 없었지만,,, 조금 있으니 그녀에게 전화가 왔고, 그 전화는 집에서 애를 대신 봐주고 있는 자기 어머니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뒤에 내가 먼저 일어 났는지, 그녀가 먼저 일어 났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이름은 까먹은지 오래다. 단지 힙-홉, 홉, 홉, 을 힙-합으로 발음 하려고 노력하다가 관두었던 때의 귀여운 표정만이 생생하다. 

내심 마지막으로 생각해 두었던 어느 곳으로 향했다. 파티도 하고 분위기도 왁자하고 소위 '인터내셔널'들이 많이 들락거린다는 곳이었다. 들어가자 백인 남자 바텐더가 나를 반겼다. 사람들 중 십 중 팔구는 서구인이었다. 바텐더는 나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나는 젠 체 하느라고 나는 여행자요, I'm a traveler - 끽해야 동경 밤거리 방황하는 주제에 - 라고 말했다. 녀석은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발음은 그에게 troubler로 들렸다. 자전거를 하나 훔쳤으니 troubler 일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I'm a stranger, 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보다. 어쨌든 그 담에 날 반긴 건,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살았다고 하니 과도한 반가움을 표시하던, 자신을 캘리(포니아) 걸 Cali-girl 이라고 소개하던 바텐더였고, 나는 비싼 맥주를 몇 잔 또 주문하고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들을 자리를 옮겨 다니며 나누기 시작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땐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에 대한 강박이 스스로에게 조금 줄어 든다. 익숙치 않은 외국어라서 그럴 것이다. 

마지막 날이 마침 [인간 실격]을 쓴 다자이 오사무의 생일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묘는 동경 근처에 있었다. [인간 실격]은 지금까지 읽었던 중에 가장 강렬하게 읽었던 책 중의 하나다. 그 책은 내 속에 쇠꼬챙이를 쑤셔 넣고 휘젓는 듯한 충격을 주었고, 나는 십년 쯤 늦게 그 책을 발견하고, 읽은 것에 대해 분노 했다. 

누군가가 프랑스에 여행 갔을 때 고흐 무덤에 찾아가서 자신이 쓴 편지를 그 무덤 위에 올려 놓고 눈물기가 가시지 않은 촉촉한 자신의 눈을 담은 플라로이드 사진을 보여 준 일이 있었다. 나도 다자이 오사무의 묘에 가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지 않았다. 먼저 이미 누가 한 일을 내가 그대로 따라 하기 싫다는 유치한 어린 아이의 본능이 발동했다. (그 누군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고흐를 좋아하고, 하루끼를 좋아해서 한 때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쨌든 내가 좋으면 된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고민을 그쳤다고 했다. 여자라 그런지, 나보다 더 성숙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미 [인간 실격]에 대한 기억이 좀 가물가물 했다. [인간 실격]을 읽었던 기억은 십 대에 책을 접하고, 반복해서 읽고, 의지하고, 위로 받고, 그런 종류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 책에 매혹 되었던 기간은 강렬했지만 짧았고, 다시 또 다른 책과 또다른 영화와 또 다른, 또 다른 무엇에 매혹 되어 있었다. 

근데 실은, 무엇 보다 귀찮았던 거다. 굳이 그 먼길을 찾아가서 자살해 버린 일본인 묘 앞에 서기가 싫었던 거다. 그리고, 그때 엉뚱하게도 왜 김승옥은 그런 글들을 써제꼈으면서 80년 광주 이후에 충격을 받고 재미없게시리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버린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각주:1] 

샌프란시스코로 돌아 와서 동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 [Lost in Translation]을 보았다. AIR의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화면도 예쁘고, 빌 머레이의 감정 없는 얼굴 표정도 맘에 들고, 스칼렛 요한슨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는데, 문득 영화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어떤 일본인(아시아인)에 대한 비하적인 시선이 느껴져서 끝까지 보지 못했다.

이하 사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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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생각이 엉뚱한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 [르네상스인 김승옥] 에서 확인 한 바, 김승옥의 연표에 따르면 1960년, 그러니까 그가 20세 때, 4.19 이후 일본문화 개방정책으로 출판된 일본의 전후소설을 읽고 "일본 작가들의 허무주의에 입각한 탐미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다자이 오사무에게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사실은 대학생 때부터 소설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는 그때 번역되기 시작하는 일본 소설을 읽고 받은 충격이랄까 자극 때문이었어요... 내가 과거에 막연하게 헤르만 헤세 읽고 앙드레 지드 읽고 하면서 서양 문학에서 받았던 느낌과는 다르게 훨씬 실감나고 피부로 느껴지더라고요. 아, 소설이란 이런 것이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렇게 아프고 절실하게 쓸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충격적으로 받았죠." 라고 말하고 있다. 참조, [르네상스인 김승옥] 65쪽. (2009/04/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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