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08.09.29 세계는 감옥 2
  2. 2008.09.23 르 클레지오와 최수철
  3. 2008.09.23 미드 그리고 한국
  4. 2008.09.21 원숭이 섬의 비밀에 대한 단상
  5. 2008.09.17 잭 케루악 잡설
  6. 2008.09.17 콩나물 영어책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7. 2008.07.26 What's our country?
  8. 2008.07.20 컨베이어 벨트
  9. 2008.06.03 다이아몬드

세계는 감옥

에세이 2008. 9. 29. 20:12

홍콩 감독 왕가위의 '몽콕하문'(그녀는 꼭 '열혈남아'라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에 취해서 중국어를 배우고 홍콩에 여행가서 영화 속에 나온 거리를 미친듯이 쏘다녔다는 그녀는 대학생활의 잔재 때문인지 자신 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을 꼭 '형'이라고 불렀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이 개봉하고 전설 속의 십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알려진 시절에 극장에 가서 그 영화를 본 십만 명 중의 일 인이었던 그녀는 영화를 보면서 줄줄줄 눈물을 흘려서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술을 이해한 일 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정작 그녀는 도저히 그 영화가 이해되질 않아 분해서 울었다고 한다. 그녀는 술을 먹다가 흔히 술자리에서 오가는 개똥철학 또는 구라 중에서 내 머리 속에 지금 껏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말 중에 하나를 뇌까렸다. 

"이 세계는 감옥이야. 늙어서 죽는 것은 종신 형이 드디어 만료가 되는 것이지. 어린 나이에 일찍 죽는 것은 특별 사면이랄까. 자살?
 그건 탈옥이야."

꽤 간질간질 거리는 표현이 결혼한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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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와 최수철

에세이 2008. 9. 23. 20:54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뒤적거리던 시절이었다. 책방에서 몇 권 사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몇 권 빌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유명 작가의 유명세에 기대다가, 차츰차츰 취향이 생겼다. 때로는 제목만 보고 느낌이 오는 책을 덥썩 집어 들고 읽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조서: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 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의 소설이었다. 무슨 무슨 상을 받았다는 찬사 보다 내게 더 중요한 건 저 제목이었다. 왠지 책에서 광기어린 남자의 얼굴이 어른 거렸다. 

책을 중간 쯤 읽다 덮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서 생겨난 프랑스 문화에 대한 호감, 파리를 여행 했을 때의 그 느낌은 온데 간데 없이 프랑스어를 번역한 글은 더 이상 읽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되내였다. 그 생각은 단단치 않아서 그 뒤로도 몇 번 더 데였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번역 만의 문제는 아니다. 생각보다 나와 코드가 안 맞았을 수도 있고, 서구 문화에서 살아 가면서 비롯된 고민이라는 맥락이 나와 맞지 않아서 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책은 내 책꽂이의 한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 갔다.

어느 날, '기억과 상상' 이라는 주제로 르 클레지오가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억. 그리고 상상. 꽤나 고민했던 주제이고, 실제로 부딪히기도 했던 주제였다. 마침 할 일도 없었고, 날은 추웠지만 나는 그 곳으로 향했다. 가방엔 다 읽지 않은 '조서'를 챙겨 넣었다. 객석의 자리는 삼분지 일쯤 차 있었다. 맨 앞 자리에는 소설가 황석영이 앉아 있었다. 그 뒷 줄에는 박이문 교수가 앉아 있었다. , 취직이라는, 토익 공부라는, 현실을 도피한 채로 읽었던 책중에 박이문 교수가 쓴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이라는 철학 에세이가 들어 있었다. 두 번을 비비 꼰 제목이 맘에 들었다. 줄도 몇 군데 그었고, 책꽂이에 꽂아 놓았다. 

르 클레지오가 들어 왔다. 백발의 장성한 그는 단상에 마련된 테이블의 맨 왼쪽 의자에 커다란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그 옆 자리는 사회자의 몫이었고, 다시 그 옆 자리에 작가 최수철이 있었다. 

문학과 지성 소설명작선도 동시에 뒤적거리던 시절이었다. 최수철의 '공중누각'이라는 소설집도 그 안에 포함 되었다. 그 책을 돗대기 시장 마냥 붐비는 청계천의 한 귀퉁이에 앉아서 읽어내려 갔었다. 청계천은 막 콘크리트 어항으로 탈바꿈을 바친 상태였고, 사람들은 그 곳에서 데이트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애초에 나는, 파리의 뤽 상부르 공원에는 따뜻한 햇살과 푸르른 잔듸와 연애하는 남녀와 개를 끌고 산책나온 사람들과 책을 읽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서울에선 왜 바깥에서 여유롭게 주저 앉아 책을 못 읽을 소냐 싶었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서울 광장도 기웃거려보다가 그냥 청계천으로 향했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갈데가 없구나 툴툴거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경복궁 안에라도 가봤어야 한다는 생각은 든다. 어쨌거나, 쭈그리고 앉아 읽은 '공중누각'은 꽤나 머리를 두근거리게 만들고, 심장을 벌떡거리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내 안의 무슨 단추를 누른 것 마냥, 속에서는 끊임없이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용은 하나도기억나지 않는데다가, 주제가 뭐였는지 뭐가 뭐였는지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몇 줄기의 섬광 같은 것만 남아 있다. 

강의는 지루했다. 쓸만한 말은 몇 개 없이 교장 선생 훈시나 대대장 정신 교육처럼 시간이 흘러흘러 갔다. 서구 세계에서 온 르 끌레지오는 프랑스와 한국이 닮아서 친근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다. 두 나라 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비해 약하다고 했다. 글쎄요. 미국에서 출간된 '우리들의 멍청한 세상 Our Dumb World' 이라는 배꼽 빠지는 책에선 프랑스에 대해 '신 위에 있는 단 하나의 나라 One Nation Above God' 프랑스는 혁명도 발명하고 문화도 발명하고 예술도 만들었고, 와인도 만들었다고ㅡ 말하고 있던데요. 어쨌든. 르 끌레지오는 다음 학기 부터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한다고 했다. 짧은 강연이 끝나가는데 나는 작가 최수철을 바라 보았다. '공중누각'을 생각했다.

짧은 강연이 끝나고 작가 사인회가 열렸다. 르 클레지오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섰다. 르 클레지오는 제1세계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최수철은 여기서 한국어로 글을 썼다. 최수철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지하 1층 교보 문고에 내려가 '공중누각'을 한 권 더 사올까라는 생각을 했다. '조서'를 꺼내 앞으로 나갔다. 내 앞에는 머리가 길고 손톱이 길고 눈썹도 긴 까만 머리 여자가 서 있었다. 예뻤다. 

갑자기 좌중이 어수선해지더니, 하얀 백발의 박이문과 그 수행원이 단상 앞으로 다가 왔다. 수행원은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말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수행원은 박이문을 르 클레지오 앞으로 데려 갔다. 박이문은 르 클레지오를 알현하고 그에게 어떤 명함 하나를 건냈다. 박이문은 매우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르 클레지오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까만 머리 여자 차례가 되었다. 르 클레지오에게 프랑스어로 웃으며 말을 걸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더욱 예뻤다. 나에게 똑딱이 카메라를 건네며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르 클레지오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 차례가 되고, 나는 말 없이 '조서'를 건넸고, 르 클레지오는 책 앞 표지에 싸인을 해 주었다. 강연장을 나와 엘레베이터를 타고 일층 로비로 향했다. 눈발이 내렸다. 점점 멀어지는 까만 머리 여자의 뒷 모습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연기와 눈발이 섞였다. 나는 다시 강연장으로 엘레비이터를 타고 올라 갔다. 최수철이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최수철에게 쭈볏쭈볏 다가갔다. 소설 잘 읽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당신의 소설을 잘 읽었노라는 말이 그 순간 하고 싶었다. 르 클레지오의 싸인이 담긴 '조서'는 언젠가 그의 소설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발을 맞으며 집으로 와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을 책꽂이에서 빼 쓰레기통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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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그리고 한국

에세이 2008. 9. 23. 15:22

좀 지난 일이지만, 언론에서 한동안 '미드'를 중점적으로 다룬 적이 있었고, 그 미드 열풍의 진원지로 '프리즌 브레이크'를 주로 언급했는데, 정말이지 이거야 말로 예전에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농구 열풍이 불었을 때 이미 광범위하게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일본만화 '슬램덩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 그 열풍에 편승한 - '마지막 승부'라는 유치찬란했던 드라마를 언급하는 것만큼이나, 나름 미국 드라마를 사랑해 왔던 사람들에게는 헛다리 짚기 혹은 뒷북치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프렌즈'를 보면서 공부 안 하고 놀고 있다는 죄책감을 나는 지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거야, 라고 달랜지 오래였고, 동시에 C.S.I 라는 추리/스릴러 물은 미스러리 장르 매니아들에게, X-파일이라는 드라마는 SF에 관심이 있는, - 물론 난 SF에 그다지 관심은 없지만, 정말 정통(미국식) SF팬들은 아마 '스타트렉'에 좀 더 열광하지 않나 싶다. -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었던 터였다. 

게다가 내 성장기를 잠깐 한 번 되돌아 본다면, 

스위스 군용칼의 이름을 맥가이버칼로 둔갑시킨,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포르노에 나올 법한 배우가 나오는 '맥가이버'와 피부가 벗겨져서 그들의 징그러운 파충류 껍질이 드러날 때마다 기겁을 하던 'V'에 이르기까지. 성장기에는 일종의 지침이 되었으나, 미국과 한국이라는 너무나 다른 사회 문화 환경으로 인해서 현실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던 '케빈의 열두 살'과 한때 미국 고등학생들의 표준적인 삶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완전 부자 동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착한 드라마 '버버리힐즈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미드가 얼마나 많았냔 말이다. (한때 성장기 드라마로 '사춘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기대를 하고 보았지만, 어쨌든 한국이라는 장소적인 현실성은 있었지만,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파고든다는 현실성은 전무하다시피 그냥 착했고, 재미없는 드라마였다)

생각해보면, '비트'를 제외하곤, '교실이데아'를 제외하곤 당시 대체 내가 발 디디고 있던 현실과 관련지어 내가 열광할 수 있었던 영화와 음악은 당시 무엇이었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국내 코리안-아메리칸들에 대한 관심에서 이런저러한 것을 뒤적거리다가 SEAM라는 락 밴드를 이끌었던 박수영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적이 있다. 흑인 음악에서 나왔으되 이제는 거의 백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버린 '락'의 영역에서 - 특히 90년대 얼터너티브 락이라는 더욱 더 그러하다 - 몇 안되는 동양계 라커였던 박수영의 밴드들의 음악을 마이스페이스와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 보았는데, 음악들이 괜찮았다. 뭔가 완전히 독특한 특색은 없었지만, 조용한 힘이 느껴지는 그러한 음악이었달까. 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SEAM이라는 밴드는 우여곡절 끝에 세명의 코리안-아메리칸과 한 명의 아이리쉬-아메리칸으로 구성된 밴드였는데, 당시 홍대에서 공연을 가진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의 인터뷰를 읽다가 '코리안'인 내가 공감을 하게 된 부분이 있었다. 사실 코리안-아메리칸, 나아가 아시안-아메리칸들은 성장기에 자신과 같은 피부색의 롤 모델을 대중문화에서 접하지 못한, 좀 어떻게 보면 이상한 세대라는 것. 내가 (혹은 우리가, 우리 세대가) 성장기에 가장 좋아 했던 영화/음악이 대부분 미국산 이었다는 것, 그래서 내가 발디디고 있었던 현실과 별로 연결될 수 없었다는 것. 이 두개가 왠지 비슷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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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섬의 비밀에 대한 단상

에세이 2008. 9. 21. 08:27

90년대 초반에 집에 XT 또는 AT/286 컴퓨터를 소장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원숭이 섬의 비밀] 이라는 어드벤처 게임을. 당시 '교육용 컴퓨터'라는 이름을 달고 정확한 용도는 아직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교육에 도움이 될 거라는 취지에서 컴퓨터 열풍이 불었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여기엔 컴퓨터를 파는 사람들이 영리하게도 컴퓨터 앞에 '교육용'이라는 단서를 달아 자녀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는 학부모들을 공략한 것도 한 몫했다. 하지만 그 교육용 컴퓨터들을 가지고 정작 마땅히 할 것은 별로 없었는데, 그 틈새를 메꾸어 준 것이 바로 각종 컴퓨터 게임들이다. 그 중에서도 루카스 필름이 만들어 낸 [원숭이 섬의 비밀]과 같은 어드벤처 게임은 큰 인기를 끌었다.

사실 [원숭이 섬의 비밀]이라는 게임이 있기 이전에 [매니악 맨션]이라는 게임이 있었다. 미친 과학자가 납치해 간 여자 친구를 구한다는 것이 설정이었는데, 그 주인공의 친구들을 보면, 물리학에 미친 녀석, 펑크락 보컬, 서핑에 미친 녀석, 작가 지망생, 등등. 하여간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녀석들이다. 그 [매니악 맨션]의 건축 양식은 샌프란시스코 유명한 건축 양식인 빅토리아 양식이다. 이 두 개의 게임을 디자인 한 사람은 론 길버트라는 사람으로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아 Bay Area 출신이다. 사실 이 사람은 인터페이스 방식과 진행 방식 등, 장르 하나를 만들어 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무래도 제일 골때리는 것이 게임 전반에 깔려 있는 유머일 것이다. 

몇 주 전, 거의 십 몇 년 만에 론 길버트의 게임들을 다시 플레이 해 봤다. 당시 어드벤처 게임 열풍이 불었을 때는 열심히 매뉴얼을 보면서 클리어 하는데 몰두 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열심히 대화들을 읽어 가면서 해 봤는데, 기본적으로 대화 하나 하나가 골때렸다. 시니컬한 유머와 상대방을 공격하는 위트들이 전면에 깔려 있는 데, 예를 들면 중간에 칼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칼싸움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닌 얼마나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모욕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너하고 얘기 하느니 차라리 원숭이하고 얘기하는 것이 낫다. 라는 말을 받아치는 방법은, 오, 니 가족들과 다시 뭉치게 된 것을 축하 해. 뭐 이런 식이다. 한국어로는 느낌이 좀 살지 않는다만. 게다가 게임에 기본적으로 '아나키'적인 요소들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일단, 원숭이 섬의 비밀은 아직 21살도 안되서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도 없는 (미국에선 음주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서 신분증이 없으면 술을 마실 수도 없고, 나이는 21살이 넘어야 한다.) 주인공 가이브러쉬가 다름 아닌 '해적'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랜 만에 그 게임들을 다시 해 보며 문득 들었던 의문이 있다. 이 게임들은 영어를 모르는 상태로는 즐긴 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렇담 대체 90년대 초반에 불었던 어드벤처 게임 열풍은 무엇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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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케루악 잡설

에세이 2008. 9. 17. 12:28

1950년대의 미국은 풍요의 시대였다. 자신감으로 넘쳤던 시대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과 일본을 물리친 미국, 단순히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 뿐 만이 아니라 파시즘에 맞서 '자유'를 수호했다는 자신감으로 넘쳐났다. 공장은 다시금 물샐틈 없이 돌아 갔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은 번영을 구가했다. 상품은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고, 노동자들은 일을 해서 그 상품들을 구매하고, 다시 그 돈이 돌고 도는 가운데 번영을 이룩했다. 그리하여 미국식 중산층의 삶, 아메리칸 드림이 물질로써, 현상으로써 구체화 되기 시작했고 그 구체화된 것들은 맥도날드 햄버거 처럼 매우 규격화 되어 있었다. 삶이 너무 규격화 되면 설령 그 삶이 안전하고 미래를 보장하더라도 그 삶 방식 자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마련이다. 

50년대 미국은 이러한 삶의 태도 그 자체에 대해서 반동의 흐름이 일기 시작했다. 그 건전한 시민으로써의 삶을 저버린 채 다른 방식의 삶을 개인적으로 구체화 시키려고 했던 세대들을 일컬어 '비트 세대' , '비트 제네레이션'이라고 말한다. 왜 '비트'인지, 비트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단지 '비트 제네리이션'을 정의했던 한 작가를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잭 케루악이다. 그는 당시 콜럼비아 대학교를 다니다가 선불교에 심취했고, 약물을 옹호 했던 비트족 시인 앨런 긴즈버그와 윌리암 버로스를 만나고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미국과 멕시코를 여행했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잭 케루악은 이 소설을 쓸 때 당시 유행했던 50년대 재즈의 즉흥 연주 기법을 빌어와서 자유롭게 소설을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잭 케루악은 소설을 여러 번 고쳐서 썼다고 한다. 

보통 한 사람이 유명해지거나, 한 작품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때에는 단지 그 사람이 천재적이거나, 그 작품이 천재성을 띄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시대'와 만났다. 혹은 그 시대가 만들어 냈다는 말이 적합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 보다 더욱 더 끔찍한 것은 그가 사실은 대한민국 '주류', '중산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실체라는 것이다. 대형 서점에 쌓여 있는 영어 '공부' 서적, 자기계발 서적, 경영/마케팅 서적, -해라, -처럼 하면 -한다, 류의 제목을 달고 있는 서적들이 만들어 낸 실체라는 것이다. 부동산에 목을 매고 재테크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실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끌어 오자면, [의지의 승리]라는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예술가가 만들어 낸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선전물 다큐멘터리를 보면, 철저하게 계획되어 제작된 그 다큐멘터리는 실로 웅장하며, 자못 감동적이다. '파시즘', '국가주의'라는 내용물의 촌스러움과 상관 없이 형식 그 자체로는 촌스럽지 않고 매끈하게 빠진, 매우 잘 만들어진 선전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다루어 지고 있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 당시 파시즘에 빠졌던 독일 사람들의 광기와, 히틀러가 내뿜어 내는 말의 마력을 조금 느낄 수 있다. 히틀러의 마지막 연설이 끝나고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연단에 등장해서 '히틀러는 독일이다, 독일은 히틀러다.' 라는 말을 한다. 그 순간 나는 아돌프 히틀러를 만들어 낸 것이야 말로 경제적으로 공황 상태에 있던 그 당시 독일인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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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 영어책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에세이 2008. 9. 17. 12:04

전차를 탔다. 옆자리에 한 동양 남성이 앉았다. 손에 들린 책을 보니 '콩나물'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한국인이구나. 그리고 행색을 보니 여행객이 틀림이 없다고 추측했다.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펴든 상태로 책은 읽지 않은채로 주위를 계속 휘휘거리면서 두리번 거리는 불안한 몸짓이 느껴졌다. 내 경험에 따르면 여행객의 몸짓이다. 그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성이 아닌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면 난 말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 '콩나물-'이라는 말로 시작된 책을 흘낏 쳐다 보았다. 그 책의 왼쪽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제26일, Accomplish- " 날짜 별로 암기해야 하는 중요 단어가 실려 있는 단어 책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왜 여행을 와서 단어 책 따위를 들고 있는거냐.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거냐. 줄줄이 이어지는 잡생각들. 근데 보다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옆에 앉은 한 한국인이 저 책을 들고 있는 것이 화가 날까?

어쩌면 한국적인 토양에서 자란 나도 그러한 주입된, 거짓된 영어 스트레스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단어장으로 구성된 책 몇 권쯤은 샀을 것이며, 영어에 대한 부담감을 항상 맘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문득 솟구치는 근원적 의문, 왜 영어를 해야하지에 대한 대답은 미룬채로. 아싸리 영어 점수 따위는 중요치 않아, 라고 무시해 버리는 것도. 한국식 영어 '공부'에 뛰어 들어 점수 올리기에 매진하는 것도 아닌 어물쩡한 상태로 말이다. 이 모든 건 결국 나 혼자 생각을 피워 올리는 것에서 비롯 되었지만, 결론은 내 과거, 내 과거를 둘러 싸고 있었던 환경에 대한 노여움으로 발전하는 엉뚱한 계기가 되었다. 

한 가지 더.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대체 무슨 글이 실려 있었던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체 못할 반발심으로 당시엔 영어 교과서를 제대로 펴본 적이 없으니깐 말이다. 한데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독일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에는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를 가로 지르는 고전을 집필했던 작가의 소설이 어려울 것이라는 단견과는 달리,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은 그의 드라이한 문체 때문에라도 영어로 된 소설 중에선 제일 읽기가 수월하다. 대체 헤밍웨이의 소설을 고등학생에게 읽히는 독일의 영어 교육과 한국의 그것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본다.


우리 집에 누군가, 가 놀러 왔다.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가 다른 주로 떠나 1년간 교환학생 과정을 이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누군가, 는 바이올린을 들고 왔다. 속에서 또 꾸역꾸역 생각들이 맴돌아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에게 이렇게 물을 뻔 했다. 그래, 바이올린 뮤지션/연주가 중에서 누굴 제일 좋아하니? 누군가, 는 과연 바이올린이 좋아서,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소리가 좋아서 바이올린을 시작했던 것일까. 아니면 한국 중산층의 유별난 서양 클래식 악기에 대한 사랑이 녀석에 까지 대물림 된 것일까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질문. 이미 내 나름대로는 후자의 것일거라는 설정을 이미 깔아 놓은 채 확인을 하고 싶다는 것.

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영화 [조이럭 클럽] 을 보다가 발견한 사실은 피아노에 대한 사랑이 한국 중산층 가정의 전유물 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 살아 가는 중국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를 네 명 정도의 딸과 어머니들을 통해서 다루고 있는 그 영화는 어머니와 딸과의 주요한 갈등의 축으로 피아노 배우기를 소재로 다루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에게 피아노를 배울 것을 강요하고, 딸은 그것을 괴로워 하면서 억지로 배우다가 마침내 반항하게 된다는. 억지로 피아노를 배웠던 내 어릴 적 모습이 겹쳐 지면서 난 그것이 아시아적인 무엇일 거라고 사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 영화를 고른 인도계 여자 선생이 감동적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봤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홀로 확신을 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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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our country?

에세이 2008. 7. 26. 09:2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한 전문직 여성이 있다. 이십 대 후반 쯤 되는 그 여성은 현재 홍대 입구 근처의 원룸에 살고 있다. 그녀의 직장은 광화문 근처에 있고, 현재 그녀는 외국계 홍보 기획사에 'Assistant Director' 라는 직책을 가지고 재직 중이다. 연봉은 한 4500정도.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서 켈로그 콘프로스트와 우유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 한다. 도브 비누의 거품을 온 몸에 묻혀 가며 샤워를 한 후, 빅토리아 시크릿의 섹시한 속옷을 걸친다. 기분이 다소 좋아진 그녀는 시세이도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고, 도나 카렌 투 피스를 걸친다. 그런 후에 지난 달에 큰 맘 먹고 지른 마놀라 블라닉 구두를 신고, 셀린느 토트백을 들고 출근을 한다. 그녀는 출근을 하는 길에 PMP로 어제 다운 받았던 [sex and the city]의 가장 최근 에피소드를 본다.

그녀가 현재 담당하고 있는 클라이언트는 TOEIC/TOEFL 장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ETS라는 회사다. 한국 신문에 영어 시험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실리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 현재 그녀가 맡은 임무이다. 미국 ETS 본사 와의 힘겨운 이메일 업무 처리로 오전 일과 내내 바빴던 그녀는 점심을 근처 브런치 레스토랑에서 벨기에 와플로 간단히 해결한다. 오후 일과는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인인 그녀의 상사 미셸과 현재 처리 중인 업무에 대한 미팅으로 훌쩍 지나 간다. 아차, 빼먹고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녀가 회사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신디다.

신디는 오늘, 왠일로 비교적 업무처리가 순조로운지라 여섯 시 정시 퇴근을 맞이 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맞는 꿀같은 여유를 즐기기 위해 신디가 현재 만나고 있는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신디의 남자 친구는 톰 요크라는 영국인인데 런던 대학교에서 영어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흥국생명 빌딩에 위치한 영국 문화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삼십대 초반의 건장한 백인 남성이다. 신디는 톰과 함께 메드 포 갈릭에서 이탈리안 피자로 저녁을 먹고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를 관람한다. 한껏 예술적으로 고양된 그들은 근처 와인 바에서 캘리포니아산 베어풋 메를롯 레드 와인을 마신다. 그런 후에 광화문 미로스페이스에서 아일랜드산 영화<Once>를 본다. 인디 뮤지션의 사랑 이야기인 그 영화를 보고 낭만에 빠진 둘은 신디의 원 룸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톰이 제조한 크랜베리 보드카를 나누어 마신후에, 프랑스 일렉트로니카 밴드 <AIR>의 노래를 들으면서 둘은 섹스를 한다.

자, 그녀가 한국에서 태어 났고, 한국어를 할 줄 알며,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낸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신디'는 지금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갑자기 무슨 된장녀의 일과를 늘어 놓느냐구? 좋다. 그렇담 한 편 반대로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대학 졸업 후에 1년이 지나도록 취직을 하지 않고 있는 백수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십 대 시절에 유명을 달리 했고, 현재 그의 어머니는 김밥천국을 운영하면서 힘들게 돈을 벌고 있다. 어렵사리 그는 대학 교육을 마쳤으나, 졸업 후에 이개월 정도 웹-사이트 기획 회사에서 잠깐 일하다가, 폭압적인 직장 내 인간 관계와 거래처와의 불합리한 갑을관계에 질려 회사를 때려친 후, 현재 집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을,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그는 요즘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미드'에 푹 빠져 있다. 한 달에 삼 만원 남짓한 돈만 지불하면 무한정 다운 받을 수 있는 미드를 종류 별로 다운 받으면서, 어쨌든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으면서 돈을 벌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구나라는 새롭고도 놀라운 깨달음과 함께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미드를 보고 감상을 간간히 티스토리에 포스팅하면서 백수 생활을 한껏 즐기고 있는 중이다.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2를 어제 막 끝냈고, 요즘은 [히어로즈]에 올인 중이다. 아직도 다운 받아서 볼 수 있는 미드가 무궁무진한지라, 당분간 그는 취직할 생각이 없다. 동시에 드라마 속 미국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그는 지금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가?

소위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는 시간은 하루 중 얼마나 될까? 진정 한국적인 것들 속에서 살고 싶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숭늉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운 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수업을 들은 후에, 인사동 한정식집에서 식사를 한 후에, 전통 찻 집에서 차를 즐기다가, 간송 미술관에 가서 김흥도의 신윤복의 그림을 감상하며 한국적인 미에 흠뻑 빠졌다가 저녁엔 영화 [오! 수정]에 나왔던 인사동 막걸리집에서 고갈비와 막걸리를 먹으면 하루 종일 '한국'에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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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베이어 벨트

에세이 2008. 7. 20. 17:52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이 난다. 신은경 - 왜 그 [조폭마누라]에 나왔던 여자배우 말이다. - 과 얼굴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신은경과 그의 남편이, - 어쩌면 [조폭마누라]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 마트에 가서 쇼핑 카트를 몰고 다니다가 바겐 세일 코너에 가서 치열한 몸싸움 끝에 싸게 물건을 집어 든 다음 밝고 환하게 웃으면서 남편과 몸을 부딪히면서 스킨십을 하는 장면이다. 대단히 평화로운 일상적인 행복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난 그 장면이 매우 경멸스러웠다. 가끔씩은 도무지 이러한 일상적인 행복에 대한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대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마트는 싸고 편리하다. 그런데 왜 나는 마트에 가는 것이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울까. 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해서 빨리 빠져 나오고 싶어지는 걸까. 쇼핑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다양한 물건들이 쌓여 있는 코너들을 돌아다니는 것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을 받아서? 계산대에 다가가서 검정색 고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물건들을 하나 둘 씩 올리는 것이 비인간적이어서?

언젠가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집 근처 '피트니스 클럽' (알다시피, '헬스 클럽'과 '피트니스 클럽'은 엄연히 다르다. '짱깨집'과 '차이니즈 레스토랑'의 차이 정도랄까.) 에서 클럽 회원들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그 곳을 무료로 한 달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고, 그래서 난 뱃살을 주물럭 거리며 몇 번 그 곳에 간 적이 있다.

과연 그곳은 '헬스 클럽'과 달리 '피트니스 룩'을 한 껏 차려 입은 여자들로 가득 했는데, 참으로 하늘거리는 그녀들의 생김새는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힘을 쭉 빼놓곤 했다. 그 곳엔 갖가지 형태의 기계들로 그득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계는 물론 런닝 머신이었다.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 속도를 조절하고 시간을 입력하고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 말이다. 그 벨트 위에서 달리면서 땀을 쭈욱 빼다가 어느 순간 마트에서 느꼈던 그 기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고 나는 그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려 왔다. 그리곤 다시는 그 검정색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나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의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라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패션지 편집장이 신참내기 직원에게 한 소리를 하면서 대체 니가 입고 있는 그 '블루'가 그냥 '블루'인줄 아느냐면서,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짜내는 것 부터 시작해서 그 '블루'가 대중화 되어 대중적인 브랜드의 옷에 사용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설명력의 부족으로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듯)그걸 보는 순간 뭔가 저 분께서는 지금 게임의 법칙 그 자체를 꿰고 있구나, 대체 이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한 큐에 설명해 주고 계시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힘든 노동의 댓가로 손에 쥔 자유 이용권, 돈을 사용하는 그 순간도 뭔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알짱거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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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에세이 2008. 6. 3. 00:13
느 날 TV를 보다가 다이아몬드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내용은 빤하다. 다이아몬드를 통해서 여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는 내용이다. 저게 먹히나?

먹힌다. 적어도 영화 [색, 계]를 보면 이장관(양조위)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이장관과 왕가지(탕웨이)사이의 보는 사람까지도 집어 삼킬듯한 '色'과, 그 '色'이 물질로 형상화 된 바로 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다. 6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은 참으로 압도적이다. 내가 영화를 보고 있던 극장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탄성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감정을 좀 더 자유롭게 표출하는 한국의 극장에서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여인네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 그 장면에서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을 것은 당연 지사다.

다시 다이아몬드 광고로 돌아가서. 그 광고를 보면서 예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생각에 사로 잡혔다. '내가 과연 다이아몬드를 여자에게 사 줄 만한 경제적 능력을 갖추게 되는 날이 올까?' 이런 생각을 내쫓기 위한 방법은 바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떠올리면서 '그래, 다이아몬드라는 것이 결국 제 1세계가 제 3세계에 대해 자행하는 착취의 결과물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진보적이긴 하나, 어째 좀 재미 없고 패배적이다.

이 시점에서 떠올려야 하는 또 다른 다이아몬드는 바로 [이수일과 심순애]에 나오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다.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 신파극을 본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내용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그 시절에 대부호였던 김중배가 이수일의 연인이었던 심순애에게 물질 공세를 퍼붓고, 특히 다이아몬드를 선사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이 등장한다. 이수일이 심순애를 매몰차게 내치면서 말한다. "순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도 좋단 말이더어냐아?" 심순애가 이수일의 바짓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흑흑흑. 아니어요. 수일씨이. 아니어요." 아이구야.

잠시 이수일이 얼마나 찌질한 인간 인지 증명하는 것을 뒤로 한 채,

영화 [물랑 루즈][각주:1]를 살펴 보자.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 영화를 봤을 것이다. 물랑 루즈를 들락거리는 모든 남자들의 로망인 여신 샤틴(니콜 키드만), 그에게 다이아몬드가 문제가 아니라 아예 극장을 지어주겠다면서 무차별 물량 공세를 퍼붓는 '부르주아 귀족' 공작. 허나 그러한 샤틴을 사로 잡는 것은 다름 아닌 돈 한 푼 없는 '보헤미안 예술가'인 시인 크리스티앙(이완 맥그리거). 지지고 볶고 노래 부르고 한 끝에 죽어가는 샤틴의 사랑을 얻은 것은 크리스티앙. '공작'은 돈은 돈 대로 대준 끝에 끝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자기 이름도 말할 겨를 없이 끝까지 그저 '공작'으로 남은 채로 불쌍하고 쓸쓸하게 극에서 퇴장한다.

자, 수일아. 그래, 순애의 마음을 사로 잡기 위해서 자넨 대체 뭘 했나? 보아하니 도시락 폭탄을 제조하는 지하실 앞에서 휘휘거리며 망을 보는 사람들에게 물을 떠다 주지도, 하얼삔역을 사전 답사하는 사람들의 도시락을 챙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상태였으니 인간과 사회에 질문을 하여간 던져 보는 학문의 장에 뛰어 들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구나. 그럼 대체 순애의 마음이 저렇게 흔들릴 때까지 뭘 했나? 하루에 조금씩 시간을 내어 기타를 연습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되든 안 되든 머리 싸매가며 순애를 휘어 잡을 시를 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뭘 했나? 이도 저도 안 되면 시인 이 상이 금홍이 데리고 술 먹는 자리에 어떻게든 껴서 한 수 배워 보려고 노력을 하든가. 이수일은 이후 '보헤미안'이 되어 '부르주아'를 상대하는 길을 택하지도, 독립 운동에 투신하는 '투사'가 되어 아우라를 내뿜는 길을 택하지도 않은 채, 그도 또한 '부르주아'가 되기 위한 길을 걷는다. 

이후의 내용은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나열해 보자면. 이수일은 결국 '그 시절'에 고리대금업자의 밑에 들어가 악착 같이 돈을 모으려는 선택을 한 와중에 그 고리대금업자가 죽어 버려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고, 오호 횡재라, 한편 심순애는 자신의 '죄'를 뉘우친 채 - 여자가 다이아몬드를 보고 헷가닥 하는 것이 죄라면 남자가 섹시한 여자를 보고 헷가닥 하는 것은 정말이지 큰 죄다. - 대동강에 투신 자살, 아이고 맙소사, 하려다, 수일의 친구인 '낙관'에게 구출 되고, 등장인물 이름 한 번 참, 두 사람은 낙관의 끈질긴 설득으로, 남녀관계에 왠 제3자? 이게 뭐 KBS [사랑과 전쟁]인 줄 아나, 다시 재결합. 끝. 아아. 누가 [이수일과 심순애]를 신파극이라고 했는가. 정말이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버금가는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극 자체를 벗어나 극의 바깥을 살펴 보아도,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이수일과 심순애]는 1897년부터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 되었던 [곤지키야샤]라는 소설을 한국어로 번안한 작품이다. 또한 [곤지키야사]는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문 소설 [여자여, 약한 것]을 각색한 것이다. 물론,  21 세기를 살아가는 지혜는 약한 것이 여자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에 사로 잡혔던 19 세기적 사고 방식을 극복하는 것이다. 


  1. (2009년 06월 03일) 한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니 결국 이 영화 [물랑루즈]가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돈을 댄 사람은 '공작'이 아니던가. 그리고 영화 관람비를 내는 것은 '보헤미안을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그 영화 관람비를 통해서 돈을 번 건 '공작'이 아니던가. 어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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