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박 유학기, 일

카테고리 없음 2008. 12. 9. 16:02

올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서 한국인에서 한국계 미국인이 된 김이박의 친구 녀석은 언젠가 지나가는 소리로 미국에서 동양 남성의 지위에 대해 자학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흑인 여성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김이박이 농담삼아, 그럼 흑인 여성과 사귀어야 겠군. 하니, 장난하냐. 라는 반응이다. 

김이박이 시간당  8불을 받아가며 불법 노동을 하고 있는 곳은 주로 흑인 여성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곳이다. 이 가게에서 파는 건 '백인'이다. 꼬불꼬불한 머리를 가진 흑인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찰랑찰랑하고 윤기나는 '백인' 머리를 판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겉모습이 가장 친숙하지 않았던 부류의 사람들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관찰하는 것과 사장 아줌마와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김이박의 낙이다. 

하루는 한 '고객님'이 들어 왔다. 김이박은 그녀에게 '백인' 머리 몇 개를 보여 주었다. 그런데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다. 아줌마는, 김이박에게 그 고객님에 대해서 심심하면 들어와서 물건을 구경하고 귀찮게 하는데 절대로 물건은 사지 않는다고 덧붙이셨다. 김이박은 그래서 그 고객님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자격지심이 발동했는지, 그 흑인 여성은 오바마를 이야기했다. 그래서 오바마가 이번에 대통령에 당선이 된 것이고, 이제는 변화- CHANGE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CHANGE, CHANGE.

김이박은 순간 오바마가 말한 CHANGE에 대해서 생각했다. 속이 공허한 말들, 캠페인성 구호 일 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그 속을 채워 넣기 좋다. 그리하여 공허한 말들은 널리널리 퍼져 나가고 널리널리 받아들여 진다.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도 긍정적인 의미도 아니다. 현상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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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질 못하겠어

2008. 12. 9. 12:45

믿질 못하겠어
믿질 못하겠다는 걸 믿질 못하겠어
믿질 못하겠다는 걸 믿질 못하겠다는 걸 믿질 못하겠어
믿질 못하겠다는 걸 믿질 못하겠다는 걸 믿질 못하겠다는 걸 믿질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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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브레인 iBrain

구라 2008. 12. 8. 13:34

생명공학과 IT가 발달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서기 2020년 맥월드 키노트에서 스티브 잡스는 놀라운 신제품 아이브레인 iBrain 을 발표하면서 더 이상 Apple사에서 신제품을 개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 한다. 스티브 잡스는 키노트에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우리는 선악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열광한다. 한 입 베어먹은 사과 모양이자, 애플사 로고 모양이기도 한 직경 2인치 정도의 작은 칩을 정수리 위에 간단한 과정을 통해서 이식을 하는 순간 사람들의 뇌는 인터넷과 자동적으로 연결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뇌는 인터넷과 24시간 항상 접속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상태가 서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어떤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들이 잘 알려져 있다. 

먼저, 사실 확인적 대화 패턴, 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야, 그러니까 그 영화 말이야. 그 뚱뚱한 여배우하고 디카프리오가 나온 영화 말이야. 그 유치한 러브 스토리 영화 말이야. 커다란 배가 가라앉는 그 영화 말이야. 그 영화 제목이 뭐더라?' 라는 답에, '아, 그 영화 '인디아나 존스' 아니냐?' 라는 답이 달리면서, '아닌데, '인디아나 존스'는 확실히 아니야!' '아냐, 맞아.' 라는 시간을 낭비하는 사실 확인적 대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술을 마시고 나누게 되는 대화의 끄트머리는 대게, '아유, 네이버에 물어 봐.' 라는 식으로 마무리 되기 마련인데 집에 가서 그 취중 대화를 기억하고 네이버를 뒤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사실 확인을 바로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그 순간에 정보를 바로 바로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보 확인적 대화 패턴, 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한다. 

예를들어, '야, 너 어디있어?' , '그게 그러니까 논현동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해, 그래서 언덕을 주욱 올라오다 보면 청포도길이 나오거든, 거기서 유턴을 해, 그런다음 첫 번째 신호등에서 다시 우회전을 한 다음에 오른 쪽으로 대략 백 미터쯤 오다 보면 경원빌딩이 나오거든? 거기 삼 층이야.' , 하지만 오 분 뒤에 다시 '야, 너 어디있어?' 라는 전화가 결려오면서 끝내 그 둘이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시간적, 자원적 낭비를 유발하는 정보 확인적 대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말하자면 더 이상 길을 잃고 잘못된 곳을 해메다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일은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전래 동화에서 잘 나오는 설정, 과거를 치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한 나그네가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매다가 (대체 과거를 치는 선비들이 한 둘이 아닐 테고 그렇다면 이미 검증된 길이 있을 것이고, 그 길 주변엔 주막과 묵을 곳과 장터가 발달을 했을 터인데 왜 혼자 이상한 곳을 헤매고 다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불빛 한 점을 발견하고 다가가니 왜 산중에 기와집 한 채가 있어 '이리 오너라.' 라고 점잖게 소리치니 왠 어여쁜 아낙네가 문을 열어 주는데 (그 아낙네는 물론 과부이고 깊은 산 중에서 어떤 식으로 홀로 먹고 사는진 알 순 없지만) 나그네는 다시금 점잖게 하루 밤 묵어가길 청하고 여인은 나그네를 사랑채에 들이는데 알고 보니 그 여인은,,, 식의 일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설교적, 지적 허영심 분출적 대화 패턴, 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건 마치 레비-스트라우스가 말한 식인데? , '맞아, 그건 너무 프리텐셔스 pretentious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 들이 헤겔이 말한 것 처럼 스노비즘을 보이고 있다곤 생각하지 않아.' , '이런, 그렇담 이건 완전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 인 걸?' 등등의 권위에 호소하고 현란한 단어가 섞여있는 고난이도 대화에 참여하지 못해 소외감을 느낀다거나, 미술관에서 특별 전시 중인 반 고흐 그림을 보다가 동행한 서양미술사 전공자에게 반 고흐와 테오의 관계에 대해 물어 보았다가 느닷없이 인상파 강의를 듣는 식의 대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두가 영한 사전과 위키페디아에 항상 연결되어 있다면 더 이상 그것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못된 사실과 사건의 인용, 잘못된 수치의 인용, 잘못된 연도의 인용을 통한 갖가지 궤변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와 같이 위에서 언급한 세가지 점들이 바로 아이브레인 IBrain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혜택으로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마음과 마음만을 주고 받는 대화, 어디서 풍문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만을 주고 받는 대화를 실현하는 진정한 소통의 참맛을 모두가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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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와 영어에 대한 생각

에세이 2008. 10. 31. 20:04

예전에 빔 벤더스라는 유명한 감독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극장에 찾아 가서 영화를 한 편 보았고,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꽤 인상 깊게 본 영화였던 것 같은데, 지금 그때 본 영화가 무슨 영화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 받았던 느낌이 영화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물론 한국말로 감독에게 질문을 했고, 영어로 통역이 되었다. (딱 한 명의 관객이 통역을 거치지 않고 영어로 직접 질문을 했다. 나는 그가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나머지 관객들이 대체 그가 빔 벤더스에게 무슨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면 안 되는 거다. 언어 생활이라는 것도 다 소통하자고 하는 짓이 아닌가.) 독일 감독이지만 미국 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미국에서 영어로 영화도 많이 만들었던 빔 벤더스는 영어로 답을 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관객들이 질문을 시작하는 방식이었다. "감독님 영화 아주 잘 봤구요,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하나 같이 이 어구로 질문을 시작했는데, 통역자는 그 어구를 통역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쓸데 없거나 과도한 예의라고 생각했고, 또한 소위 '감독님'에서 느껴지는 권위적인 울림에 유난히 민감해 하면서 홀로 짜증을 내었다. 극장안에서 나와 영화 자체 보다 한국어와 영어의 차이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했다. 

쓸데없는 권위나 권위주의를 질색하기 때문에 때때로 모국어가 싫어질 때가 있다. 내게 가장 익숙한 언어, 내 생각의 집을 짓는 언어가 싫어질 때가 있다는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하여간 그러하다. 광고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는 친한 후배 하나가 있는데, 그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 두고 영어 연수를 다녀 왔었다. 얼마 전에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후배는 갑자기 언젠가는 유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한국의 회사원들이 꿈꾸는 유학, 미국 유학이란 학문에 대한 열정 보다는 다른 이유일 경우가 많다. 나도 회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고, 한국 회사의 뭐 같은 상황에 대해선 아주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배는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면서, 자신은 영어를 사용할 때 좀 더 자유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호칭, 나이와 지위를 확인한 다음에 사용하는 언어의 색깔이 달라지는 수직적인 언어가 나를 옭아 맨다고 느낀 적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직 후 제멋대로 영어를 지껄이면서 자유로움을 느낀 적도 많았다. 

한국어가 통으로 둘러치는 느낌이라면 영어는 보다 직접적으로 파고 든다.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에 'Straight Shooter' 라는 표현이 있다. (좋아하는 한국어 표현 '뻘짓'이 은어인 것처럼 저 어구도 물론 은어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요점을 말하는 것/사람을 뜻한다. 그 은어를 배우는 순간, 내가 소위 '미드'를 좋아 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또한 한국어는 복잡하다. 정보의 교환에 있어서 약점도 많다고 생각한다. 복잡한 호칭과 조사를 발음하는 그 순간, 정보의 교환은 비효율적이게 마련이다. 때때로 한국어는 허술하기도 하다. 주어와 목적어는 때때로 -아니 대부분-  생략되고, 이것인지 저것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대충 따져 보니 지금 하고 있는 언어 생활의 한 반은 한국어로, 또 그 반은 영어로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는 와중에 한국어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리 하게 된다. 한국어는 내 모국어다. 내 관념과 느낌들은 한국어로 내 속에서 구성된다. 예외 없다. 학생카드에 찍힌 바코드, 돈의 액수, 전화번호와 같은 숫자를 읽거나 기억할 때 나는 'one two three four,,,' 로 기억하지 않는다. 예외 없이 '일 이 삼 사'이게 마련이다.[각주:1] 영어는 나에게 있어 제2의 언어다. ESL,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말하자면, 겉으로 내 뱉는 언어와 달리 내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각을 통한 언어 생활은 여지 없이 한국어이게 마련이다. 또한 미국에 막 도착해서 대책 없이 영어를 내뱉던 시기와는 달리, 영어든 한국어든 원래 내 성향대로 조금 생각을 하고 조심스럽게 내뱉게 된다. 때때로 일 년 전의 내 영어가 지금의 영어 보다 더 나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 표현이 내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어를 내 뱉을 때 그 경험과 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이 고스란히 나와 밀착되어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뻘짓'이라는 '소리'를 발음하거나 떠올릴 때면 내가 숱하게 저질렀던 '뻘짓'들이 생각난다. 어쩌면 단어의 의미 보다는 소리 자체가 나와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반대로 영어로 이야기 할 때 느꼈던 자유로움은 온데간데 없이 허공에서 주먹질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언젠가 부터 나를 사로 잡는다. 퍽, 퍽, 소리가 나지 않는 언어 생활. 

물론 시간이 흐르고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경험이 쌓이면서 아주 조금씩 영어라는 언어와 나도 결합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예를 들어, 예전에 내게 'straight shooter' 라는 표현을 가르쳐준 ESL 선생에게 영화를 같이 보자는 '작업' 메일을 보내는 뻘짓을 한 적이 있다. (그래, 이태리와 스웨덴 피가 섞인 늘씬한 금발 백인 여자였다. 비록 다리는 굵었다만. 어쨌든 '백인'이라서 수작을 붙였던 건, '절대' 아니다.) 남자 친구도 있는 여자 였지만, 관계도 별로 심각하지 않아 보였고 대화도 잘 통하고 서로 공통점도 많다고 생각한 나는 쓸데 없는 용기를 냈던 것 같다. 답 메일이 날라 왔다. 학생과 선생이 (나보다 두 살 어렸다.) 밖에서 일대일로 만나는 것은 부적절하다, 라고. 

그 순간 그녀가 사용한 'inappropriate 부적절한' 이라는 단어는 예전에 그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계기, 그러니까 클린턴이 르완스키와 집무실에서 '뻘짓'을 한 것에 대한 표현, '부적절한 관계 inappropriate relationship' 와는 완전히 다르게 내 속에 깊숙하게 박혔다. inappropriate, inappropriate, inappropriate, 왠지 학술적인 단어로 토플 공부 할 때나 나올 법한 저 단어는 내 '뻘짓'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다. 

영어를 통해서 받아 들이는 느낌이 점점 많아지게 되는 것이 나를 풍요롭게 만들기를 바랄 뿐이다. 아울러 마치 몇 십년 외지 생활을 한 사람 마냥 가끔 한국어가 애틋하게 들릴 때가 있는 것 또한 느낄 때도 있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영어 단어는 struggle 이다. 스트러글. 이라고 발음할 때, 그 struggle 이라는 단어가 내포한 뜻과 소리 자체의 느낌이 나 자신과 내 경험들과 함께 어우러진다. 의미도 좋고 소리도 좋다. 


  1. (2009년 7월 16일 추가)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할 것과 생각이 바뀐 것이 있다. 우선 혼자 있을 때 생각하는 것이야 한국어로 하지만, 누군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거나 영문책을 읽을 때는 생각 또한 영어로 한다.

    또한 숫자를 일이삼사, 로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기억할 수 있어서인 것 같다. 읽어 보진 않은 책인 [아웃라이어]에서 말콤 글래드웰은 아시아 사람들이 수학을 잘하는 이유로 보다 효율적으로 숫자를 기억할 수 있는 셈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위가 일, 단위에서 십, 단위로 바뀌어도 한국어로는 오-십오, 이런 식으로 앞에 하나의 글자만 추가하면 되지만 영어로 이야기하면 Five-Fifteen, 이런 식으로 표현이 아예 달라진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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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감옥

에세이 2008. 9. 29. 20:12

홍콩 감독 왕가위의 '몽콕하문'(그녀는 꼭 '열혈남아'라고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에 취해서 중국어를 배우고 홍콩에 여행가서 영화 속에 나온 거리를 미친듯이 쏘다녔다는 그녀는 대학생활의 잔재 때문인지 자신 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을 꼭 '형'이라고 불렀고,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이 개봉하고 전설 속의 십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알려진 시절에 극장에 가서 그 영화를 본 십만 명 중의 일 인이었던 그녀는 영화를 보면서 줄줄줄 눈물을 흘려서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술을 이해한 일 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나, 정작 그녀는 도저히 그 영화가 이해되질 않아 분해서 울었다고 한다. 그녀는 술을 먹다가 흔히 술자리에서 오가는 개똥철학 또는 구라 중에서 내 머리 속에 지금 껏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말 중에 하나를 뇌까렸다. 

"이 세계는 감옥이야. 늙어서 죽는 것은 종신 형이 드디어 만료가 되는 것이지. 어린 나이에 일찍 죽는 것은 특별 사면이랄까. 자살?
 그건 탈옥이야."

꽤 간질간질 거리는 표현이 결혼한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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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카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인용과 링크 2008. 9. 29. 19:17

가끔씩은 돈, 명예, 권력을 탐하는 '세속적인 가치'에 반하여 소소하고 소박하고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 또한 진부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재테크 서적과 명상 서적의 차이는 또 무엇일까라는 생각도 들곤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유명해진 단편 소설 '라쇼몽'. 그 '라쇼몽'을 쓴 작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는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처가 어디인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생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사랑해야 한다.
구름의 반짝임, 
대나무의 서걱거리는 소리,
참새 떼의 지저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모든 일상의 사소한 일 속에서 
최상의 달콤함을 느껴야 한다.

...
...
...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사소한 일을 사랑하는 자는 
사소한 일로 인해 괴로워하게 마련이다.
우리도 미묘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미묘하게 괴로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일상의 사소한 일에 괴로워해야 한다.
구름의 반짝임, 
대나무의 서걱거리는 소리, 
참새 떼의 지저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모든 일상의 사소한 일 속에서 
지옥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


덧. 이 글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통찰이 빛난 글이라기 보다는 덤덤한 자기 고백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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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와 최수철

에세이 2008. 9. 23. 20:54

민음사판 세계문학전집을 뒤적거리던 시절이었다. 책방에서 몇 권 사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몇 권 빌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유명 작가의 유명세에 기대다가, 차츰차츰 취향이 생겼다. 때로는 제목만 보고 느낌이 오는 책을 덥썩 집어 들고 읽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조서:정신병원 또는 군대에서 탈출했을지도 모르는 한 남자' 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르 클레지오라는 작가의 소설이었다. 무슨 무슨 상을 받았다는 찬사 보다 내게 더 중요한 건 저 제목이었다. 왠지 책에서 광기어린 남자의 얼굴이 어른 거렸다. 

책을 중간 쯤 읽다 덮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서 생겨난 프랑스 문화에 대한 호감, 파리를 여행 했을 때의 그 느낌은 온데 간데 없이 프랑스어를 번역한 글은 더 이상 읽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되내였다. 그 생각은 단단치 않아서 그 뒤로도 몇 번 더 데였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번역 만의 문제는 아니다. 생각보다 나와 코드가 안 맞았을 수도 있고, 서구 문화에서 살아 가면서 비롯된 고민이라는 맥락이 나와 맞지 않아서 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책은 내 책꽂이의 한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 갔다.

어느 날, '기억과 상상' 이라는 주제로 르 클레지오가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강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억. 그리고 상상. 꽤나 고민했던 주제이고, 실제로 부딪히기도 했던 주제였다. 마침 할 일도 없었고, 날은 추웠지만 나는 그 곳으로 향했다. 가방엔 다 읽지 않은 '조서'를 챙겨 넣었다. 객석의 자리는 삼분지 일쯤 차 있었다. 맨 앞 자리에는 소설가 황석영이 앉아 있었다. 그 뒷 줄에는 박이문 교수가 앉아 있었다. , 취직이라는, 토익 공부라는, 현실을 도피한 채로 읽었던 책중에 박이문 교수가 쓴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이라는 철학 에세이가 들어 있었다. 두 번을 비비 꼰 제목이 맘에 들었다. 줄도 몇 군데 그었고, 책꽂이에 꽂아 놓았다. 

르 클레지오가 들어 왔다. 백발의 장성한 그는 단상에 마련된 테이블의 맨 왼쪽 의자에 커다란 몸을 구겨 넣었다. 그리고 그 옆 자리는 사회자의 몫이었고, 다시 그 옆 자리에 작가 최수철이 있었다. 

문학과 지성 소설명작선도 동시에 뒤적거리던 시절이었다. 최수철의 '공중누각'이라는 소설집도 그 안에 포함 되었다. 그 책을 돗대기 시장 마냥 붐비는 청계천의 한 귀퉁이에 앉아서 읽어내려 갔었다. 청계천은 막 콘크리트 어항으로 탈바꿈을 바친 상태였고, 사람들은 그 곳에서 데이트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애초에 나는, 파리의 뤽 상부르 공원에는 따뜻한 햇살과 푸르른 잔듸와 연애하는 남녀와 개를 끌고 산책나온 사람들과 책을 읽는 사람들로 붐볐는데, 서울에선 왜 바깥에서 여유롭게 주저 앉아 책을 못 읽을 소냐 싶었다. 몇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서울 광장도 기웃거려보다가 그냥 청계천으로 향했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갈데가 없구나 툴툴거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경복궁 안에라도 가봤어야 한다는 생각은 든다. 어쨌거나, 쭈그리고 앉아 읽은 '공중누각'은 꽤나 머리를 두근거리게 만들고, 심장을 벌떡거리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내 안의 무슨 단추를 누른 것 마냥, 속에서는 끊임없이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용은 하나도기억나지 않는데다가, 주제가 뭐였는지 뭐가 뭐였는지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몇 줄기의 섬광 같은 것만 남아 있다. 

강의는 지루했다. 쓸만한 말은 몇 개 없이 교장 선생 훈시나 대대장 정신 교육처럼 시간이 흘러흘러 갔다. 서구 세계에서 온 르 끌레지오는 프랑스와 한국이 닮아서 친근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다. 두 나라 다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비해 약하다고 했다. 글쎄요. 미국에서 출간된 '우리들의 멍청한 세상 Our Dumb World' 이라는 배꼽 빠지는 책에선 프랑스에 대해 '신 위에 있는 단 하나의 나라 One Nation Above God' 프랑스는 혁명도 발명하고 문화도 발명하고 예술도 만들었고, 와인도 만들었다고ㅡ 말하고 있던데요. 어쨌든. 르 끌레지오는 다음 학기 부터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한다고 했다. 짧은 강연이 끝나가는데 나는 작가 최수철을 바라 보았다. '공중누각'을 생각했다.

짧은 강연이 끝나고 작가 사인회가 열렸다. 르 클레지오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섰다. 르 클레지오는 제1세계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고, 최수철은 여기서 한국어로 글을 썼다. 최수철은 자리에서 일어 났다. 지하 1층 교보 문고에 내려가 '공중누각'을 한 권 더 사올까라는 생각을 했다. '조서'를 꺼내 앞으로 나갔다. 내 앞에는 머리가 길고 손톱이 길고 눈썹도 긴 까만 머리 여자가 서 있었다. 예뻤다. 

갑자기 좌중이 어수선해지더니, 하얀 백발의 박이문과 그 수행원이 단상 앞으로 다가 왔다. 수행원은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말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수행원은 박이문을 르 클레지오 앞으로 데려 갔다. 박이문은 르 클레지오를 알현하고 그에게 어떤 명함 하나를 건냈다. 박이문은 매우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르 클레지오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까만 머리 여자 차례가 되었다. 르 클레지오에게 프랑스어로 웃으며 말을 걸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더욱 예뻤다. 나에게 똑딱이 카메라를 건네며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르 클레지오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 차례가 되고, 나는 말 없이 '조서'를 건넸고, 르 클레지오는 책 앞 표지에 싸인을 해 주었다. 강연장을 나와 엘레베이터를 타고 일층 로비로 향했다. 눈발이 내렸다. 점점 멀어지는 까만 머리 여자의 뒷 모습을 보며 담배를 피웠다. 연기와 눈발이 섞였다. 나는 다시 강연장으로 엘레비이터를 타고 올라 갔다. 최수철이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최수철에게 쭈볏쭈볏 다가갔다. 소설 잘 읽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당신의 소설을 잘 읽었노라는 말이 그 순간 하고 싶었다. 르 클레지오의 싸인이 담긴 '조서'는 언젠가 그의 소설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발을 맞으며 집으로 와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을 책꽂이에서 빼 쓰레기통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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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그리고 한국

에세이 2008. 9. 23. 15:22

좀 지난 일이지만, 언론에서 한동안 '미드'를 중점적으로 다룬 적이 있었고, 그 미드 열풍의 진원지로 '프리즌 브레이크'를 주로 언급했는데, 정말이지 이거야 말로 예전에 중고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농구 열풍이 불었을 때 이미 광범위하게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일본만화 '슬램덩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 그 열풍에 편승한 - '마지막 승부'라는 유치찬란했던 드라마를 언급하는 것만큼이나, 나름 미국 드라마를 사랑해 왔던 사람들에게는 헛다리 짚기 혹은 뒷북치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프렌즈'를 보면서 공부 안 하고 놀고 있다는 죄책감을 나는 지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거야, 라고 달랜지 오래였고, 동시에 C.S.I 라는 추리/스릴러 물은 미스러리 장르 매니아들에게, X-파일이라는 드라마는 SF에 관심이 있는, - 물론 난 SF에 그다지 관심은 없지만, 정말 정통(미국식) SF팬들은 아마 '스타트렉'에 좀 더 열광하지 않나 싶다. -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었던 터였다. 

게다가 내 성장기를 잠깐 한 번 되돌아 본다면, 

스위스 군용칼의 이름을 맥가이버칼로 둔갑시킨,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포르노에 나올 법한 배우가 나오는 '맥가이버'와 피부가 벗겨져서 그들의 징그러운 파충류 껍질이 드러날 때마다 기겁을 하던 'V'에 이르기까지. 성장기에는 일종의 지침이 되었으나, 미국과 한국이라는 너무나 다른 사회 문화 환경으로 인해서 현실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던 '케빈의 열두 살'과 한때 미국 고등학생들의 표준적인 삶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완전 부자 동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착한 드라마 '버버리힐즈의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미드가 얼마나 많았냔 말이다. (한때 성장기 드라마로 '사춘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기대를 하고 보았지만, 어쨌든 한국이라는 장소적인 현실성은 있었지만,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파고든다는 현실성은 전무하다시피 그냥 착했고, 재미없는 드라마였다)

생각해보면, '비트'를 제외하곤, '교실이데아'를 제외하곤 당시 대체 내가 발 디디고 있던 현실과 관련지어 내가 열광할 수 있었던 영화와 음악은 당시 무엇이었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국내 코리안-아메리칸들에 대한 관심에서 이런저러한 것을 뒤적거리다가 SEAM라는 락 밴드를 이끌었던 박수영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적이 있다. 흑인 음악에서 나왔으되 이제는 거의 백인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버린 '락'의 영역에서 - 특히 90년대 얼터너티브 락이라는 더욱 더 그러하다 - 몇 안되는 동양계 라커였던 박수영의 밴드들의 음악을 마이스페이스와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 보았는데, 음악들이 괜찮았다. 뭔가 완전히 독특한 특색은 없었지만, 조용한 힘이 느껴지는 그러한 음악이었달까. 그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SEAM이라는 밴드는 우여곡절 끝에 세명의 코리안-아메리칸과 한 명의 아이리쉬-아메리칸으로 구성된 밴드였는데, 당시 홍대에서 공연을 가진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의 인터뷰를 읽다가 '코리안'인 내가 공감을 하게 된 부분이 있었다. 사실 코리안-아메리칸, 나아가 아시안-아메리칸들은 성장기에 자신과 같은 피부색의 롤 모델을 대중문화에서 접하지 못한, 좀 어떻게 보면 이상한 세대라는 것. 내가 (혹은 우리가, 우리 세대가) 성장기에 가장 좋아 했던 영화/음악이 대부분 미국산 이었다는 것, 그래서 내가 발디디고 있었던 현실과 별로 연결될 수 없었다는 것. 이 두개가 왠지 비슷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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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섬의 비밀에 대한 단상

에세이 2008. 9. 21. 08:27

90년대 초반에 집에 XT 또는 AT/286 컴퓨터를 소장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원숭이 섬의 비밀] 이라는 어드벤처 게임을. 당시 '교육용 컴퓨터'라는 이름을 달고 정확한 용도는 아직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교육에 도움이 될 거라는 취지에서 컴퓨터 열풍이 불었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여기엔 컴퓨터를 파는 사람들이 영리하게도 컴퓨터 앞에 '교육용'이라는 단서를 달아 자녀 교육에 돈을 아끼지 않는 학부모들을 공략한 것도 한 몫했다. 하지만 그 교육용 컴퓨터들을 가지고 정작 마땅히 할 것은 별로 없었는데, 그 틈새를 메꾸어 준 것이 바로 각종 컴퓨터 게임들이다. 그 중에서도 루카스 필름이 만들어 낸 [원숭이 섬의 비밀]과 같은 어드벤처 게임은 큰 인기를 끌었다.

사실 [원숭이 섬의 비밀]이라는 게임이 있기 이전에 [매니악 맨션]이라는 게임이 있었다. 미친 과학자가 납치해 간 여자 친구를 구한다는 것이 설정이었는데, 그 주인공의 친구들을 보면, 물리학에 미친 녀석, 펑크락 보컬, 서핑에 미친 녀석, 작가 지망생, 등등. 하여간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녀석들이다. 그 [매니악 맨션]의 건축 양식은 샌프란시스코 유명한 건축 양식인 빅토리아 양식이다. 이 두 개의 게임을 디자인 한 사람은 론 길버트라는 사람으로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아 Bay Area 출신이다. 사실 이 사람은 인터페이스 방식과 진행 방식 등, 장르 하나를 만들어 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무래도 제일 골때리는 것이 게임 전반에 깔려 있는 유머일 것이다. 

몇 주 전, 거의 십 몇 년 만에 론 길버트의 게임들을 다시 플레이 해 봤다. 당시 어드벤처 게임 열풍이 불었을 때는 열심히 매뉴얼을 보면서 클리어 하는데 몰두 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열심히 대화들을 읽어 가면서 해 봤는데, 기본적으로 대화 하나 하나가 골때렸다. 시니컬한 유머와 상대방을 공격하는 위트들이 전면에 깔려 있는 데, 예를 들면 중간에 칼싸움을 하게 되는데, 그 칼싸움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닌 얼마나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모욕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너하고 얘기 하느니 차라리 원숭이하고 얘기하는 것이 낫다. 라는 말을 받아치는 방법은, 오, 니 가족들과 다시 뭉치게 된 것을 축하 해. 뭐 이런 식이다. 한국어로는 느낌이 좀 살지 않는다만. 게다가 게임에 기본적으로 '아나키'적인 요소들이 깔려 있다. 무엇보다 일단, 원숭이 섬의 비밀은 아직 21살도 안되서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도 없는 (미국에선 음주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서 신분증이 없으면 술을 마실 수도 없고, 나이는 21살이 넘어야 한다.) 주인공 가이브러쉬가 다름 아닌 '해적'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랜 만에 그 게임들을 다시 해 보며 문득 들었던 의문이 있다. 이 게임들은 영어를 모르는 상태로는 즐긴 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렇담 대체 90년대 초반에 불었던 어드벤처 게임 열풍은 무엇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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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케루악 잡설

에세이 2008. 9. 17. 12:28

1950년대의 미국은 풍요의 시대였다. 자신감으로 넘쳤던 시대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과 일본을 물리친 미국, 단순히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 뿐 만이 아니라 파시즘에 맞서 '자유'를 수호했다는 자신감으로 넘쳐났다. 공장은 다시금 물샐틈 없이 돌아 갔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은 번영을 구가했다. 상품은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고, 노동자들은 일을 해서 그 상품들을 구매하고, 다시 그 돈이 돌고 도는 가운데 번영을 이룩했다. 그리하여 미국식 중산층의 삶, 아메리칸 드림이 물질로써, 현상으로써 구체화 되기 시작했고 그 구체화된 것들은 맥도날드 햄버거 처럼 매우 규격화 되어 있었다. 삶이 너무 규격화 되면 설령 그 삶이 안전하고 미래를 보장하더라도 그 삶 방식 자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마련이다. 

50년대 미국은 이러한 삶의 태도 그 자체에 대해서 반동의 흐름이 일기 시작했다. 그 건전한 시민으로써의 삶을 저버린 채 다른 방식의 삶을 개인적으로 구체화 시키려고 했던 세대들을 일컬어 '비트 세대' , '비트 제네레이션'이라고 말한다. 왜 '비트'인지, 비트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단지 '비트 제네리이션'을 정의했던 한 작가를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잭 케루악이다. 그는 당시 콜럼비아 대학교를 다니다가 선불교에 심취했고, 약물을 옹호 했던 비트족 시인 앨런 긴즈버그와 윌리암 버로스를 만나고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미국과 멕시코를 여행했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잭 케루악은 이 소설을 쓸 때 당시 유행했던 50년대 재즈의 즉흥 연주 기법을 빌어와서 자유롭게 소설을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잭 케루악은 소설을 여러 번 고쳐서 썼다고 한다. 

보통 한 사람이 유명해지거나, 한 작품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 때에는 단지 그 사람이 천재적이거나, 그 작품이 천재성을 띄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시대'와 만났다. 혹은 그 시대가 만들어 냈다는 말이 적합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 보다 더욱 더 끔찍한 것은 그가 사실은 대한민국 '주류', '중산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실체라는 것이다. 대형 서점에 쌓여 있는 영어 '공부' 서적, 자기계발 서적, 경영/마케팅 서적, -해라, -처럼 하면 -한다, 류의 제목을 달고 있는 서적들이 만들어 낸 실체라는 것이다. 부동산에 목을 매고 재테크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실체라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끌어 오자면, [의지의 승리]라는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예술가가 만들어 낸 나치 전당대회를 기록한 선전물 다큐멘터리를 보면, 철저하게 계획되어 제작된 그 다큐멘터리는 실로 웅장하며, 자못 감동적이다. '파시즘', '국가주의'라는 내용물의 촌스러움과 상관 없이 형식 그 자체로는 촌스럽지 않고 매끈하게 빠진, 매우 잘 만들어진 선전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다루어 지고 있다. 그 다큐멘터리를 보면 당시 파시즘에 빠졌던 독일 사람들의 광기와, 히틀러가 내뿜어 내는 말의 마력을 조금 느낄 수 있다. 히틀러의 마지막 연설이 끝나고 사람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연단에 등장해서 '히틀러는 독일이다, 독일은 히틀러다.' 라는 말을 한다. 그 순간 나는 아돌프 히틀러를 만들어 낸 것이야 말로 경제적으로 공황 상태에 있던 그 당시 독일인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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