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과 홍상수

에세이 2009. 4. 21. 05:40


영화 감독 박찬욱.

박찬욱의 영화를 대부분 좋아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올드보이]를 가장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 영화는 내게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보통 영화를 볼 때 스크린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재곤 하는데, [올드보이]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본 영화 중에서 내가 스크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본 영화다. 

그 이후에 만들어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대 실망이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내가 지금까지 그의 영화를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그래도 그의 다음 영화가 여전히 궁금, 하다. 한국에서 그의 새 영화 [박쥐]가 개봉한다고 한다.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투자를 받은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모양인데, 예전에 어디선가 얼핏 접한 바로는 그의 새 영화가 헐리우드의 투자를 받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국에서 투자 금액을 다 채우지 못한 결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선택'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그의 새 영화 [박쥐]가 궁금, 하다. 언제 어디서 보게 될 른지.


영화 감독 홍상수.

예전에 영화 감상 노트를 세 권 정도 작성한 적이 있다. 첫 째 권의 이름은 Dream, 둘 째 권의 이름은 Reality, 그리고 마지막 셋 째 권의 이름은 KINO[각주:1]였다. 제목이 유치한 까닭은 모두 스무 살 이전에 채웠던 노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과 영화에 관한 정보, 그리고 영화에 관한 간략한 감상으로 한 쪽 씩을 채웠다. 영화에 대한 별 다섯 개 짜리 별점도 어줍잖게 매겼다.

들쭉날쭉 내 편견대로 재미삼아 매기던 영화에 대한 별점을,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처음 보고 나선 '?'로 매겼다. 참 묘한 영화고, 영화가 좋았다고도, 좋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서른 살이 넘어서야 좀 이해가 가능할 것 같은 영화다, 라고 적었다. 

최근 작 [밤과 낮][각주:2]을 제외한 그의 모든 영화를, 적어도 세 네 번씩 반복해서 본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모든 인터뷰와, 그의 영화와 관련해서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영화 평론을 읽었던 것 같다. 아마 이창동을 제외하곤 한국의 유명 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일 것이다. 

이상하게 그의 영화에선 아무런 희망도 찾아 볼 수 없고, 인물들은 바닥의 끝을 드러 내며, 영화의 엔딩은 그야 말로 갑자기 불현듯 찾아 오는 데다가 아무런 결론도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모호하고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의 영화에 대해서 강한 적의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오히려 내가 혼란스러울 때 그의 영화를 보면서 도리어 위로를 받거나 머리가 맑아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건 취향, 일 따름 이다. 아무튼, 보고 싶었던 [밤과 낮]도 아직 못 봤는데, 그의 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개봉한다고 한다. 두 영화 다 언제 어디서 보게 될 른지 원.


평론가 정성일의 두 사람 비교. 

예전에 영화 평론가 정성일[각주:3],이 두 감독에 대한 을 쓴 적이 있다. 평론가 정성일은 2005년 7월에 [The DVD]라는 잡지에 기고된 이 글에서 박찬욱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 취향에서 풍겨 나오는 의문스러운 점에 관해서 논하고 난 뒤, 그 두 감독의 영화 취향에 한국 영화의 영향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나서 결국 그 들은 앞선 세대 한국 영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일종의 '아버지'가 없는 정신적 고아 신세라고 지적한 뒤, 그 결과 그들의 '한국 영화' 속에서도 정작 '한국'이 빠져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에서 '작가주의' 영화를 만드는 한국 영화 감독 들의 영화에 한국의 냄새가 나지 않는 다는 점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나는 앞선 세대 한국 영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영화 감독이 그 둘 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영화를 만드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 감독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유현목 감독을 제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감독, 하길종 감독을 제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젋은 세대 감독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영향, 이라는 것은 그냥 이것저것 보다가 받게 되는 것이지, '한국 영화사'의 맥락을 공부한 다음 일부러, 찾아 가면서 본 영화, 고전, 들은 사실 영향, 과는 별 관련이 없게 마련이다.)

조금 확장 해서 이야기하자면, 예전에 불었던 김기영 감독 재발견과 그에 대한 열풍도 영화 감독들이 '성장하면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미 장성한 뒤에 애타게 '아버지'를 찾아 해맨 결과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각주:4]

또한 평론가 정성일은 자신이 항상 되새김질 하던 프랑스 영화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의 그 유명한 말 -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 의 마지막 단계를 충실하게 실천 중이다. 어쩌면 그의 영화적 아버지도 결국 어느 '프랑스' 영화 감독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가 만드는 영화 제목은 독일 작가 괴테의 소설 제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다. (물론 그는 서른도 되기 전에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 했고, 그에 관한 책을 내기도 했다. 하여간 좀 아이러니. 하다.)

하여간, 그의 글의 논조와는 별개로, 내 주목을 끈 부분이 한 군데 있다. 평론가 정성일의 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렇게 대담을 좋아하는 저널 중에서 어떤 저널도 홍상수와 박찬욱의 대담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두 사람이 함께 칸에 있었던 2004년 실제로 수많은 저널들이 두 사람의 대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뛰었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말뜻은 서로 상대를 만나기 싫다는 것이다...


애초에 하고 싶었던 말.

보통 서로에게 무심하거나 관심 없다라는 것을 넘어서 싫다, 까지 가려면 비슷한 면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겹치는 부분이 없는 사람들끼리는 싫어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무심하게 될 뿐이다. 두 감독의 경우, 모두 삶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부조리함[각주:5], 을 다룬 다는 점에서 두 감독은 대단히 닮아 있다. 

박찬욱의 영화들을 살펴 보면, 영화사에서 기획한 작품에 고용 되어 남북 정상 회담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만나 대박을 터트렸던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의 흥행 실패로 인해서 보다 더 흥행에 신경을 썼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올드보이]와 같은 경우에는 물론 부조리함 뿐 만 아니라 비극적인 요소가 많이 첨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좀 더 자유롭게 만든 영화들,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는 보지 않아서 언급을 하지 못하겠다) [복수는 나의 것], [심판], [컷], [친절한 금자씨],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경우엔 부조리가 장면장면 그득그득하고 구조 상으로도 부조리극, 으로 분류 될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의 모든 작품이 한 마디로 말해서 부조리, 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공통된 냉소적인 정서와 부조리함, 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감독의 차이점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박찬욱 감독의 경우엔 부자연스러운 상황과 부자연스러운 대사와 부자연스러운 공간에서 부조리함을 만들어 내는 반면, 홍상수 감독은 자연스러운[각주:6] 상황과 자연스러운 대사와 자연스러운 공간에서 부조리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인물 들, [올드보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벽지, [심판]의 상황 설정, [컷]의 (너무나도 인위적으로 서구적이어서 조금 역겨운) 미장센, [친절한 금자씨]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교실 단체 살인이라는 상황 설정과 금자씨라는 인물, 그리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모든 설정들, 이 그러하다. 또한 그의 영화들에 사용되는 대사들은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들이 아니라 좀 극적인 나머지 때로는 연극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한 마디로 많은 것이 부자연스럽다. 

그에 반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흔히 그의 영화들을 수식하는 '일상적인' 이라는 형용사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단히 일상적인 장면들로 채워져 있고, 별 다른 극적인 상황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상황들을 현미경을 가져다 대고 본 다음 그의 방식대로 재조립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감독의 차이가 형식의 차이로도 이어진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보다 더 장르적이고, 대단히 스타일리쉬하고, 영상 자체에서 오는 쾌락을 다루는 것에 매우 능숙하고, 비비 꼬더라도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따르면서 극적인 구조를 포기하지는 않는 편이다. 반면 홍상수의 영화들은 뭐라고 딱히 규정할 수도 없고, 화면은 대단히 사실적이며, 영상 자체에서 나오는 쾌락을 다루는 것에도 무심한 편이다. (심지어,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영화 [강원도의 힘] DVD에선 끊임없이 마이크가 등장한다.)

좀 잡스럽게 늘어 놓은 것 같은데, 이 생각들은 예전에 어떤 녀석, 이 나보고 어떻게 박찬욱과 홍상수의 영화를 둘 다 좋아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듣고 꾸준히 생각했던 것들이 뭉쳐져서 나왔다. 지금은 그 때와는 달리 점점 더 홍상수의 영화 들에 좀 더 애착이 간다. 어쨌든, 아무래도 그 두 감독의 신작, 을 보아야지만 이 모든 것들이 좀 더 확실해 질 것 같아 보인다. 


  1. 러시아어다. 키노라고 읽는다. 극장, 영화라는 뜻이다. 물론 95년에 창간 된 영화 잡지[KINO]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2. 한국 DVD 시장의 붕괴로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본문으로]
  3. 솔직히 평론가 정성일이 쓴 많은 글들 중에서 현학적이면서 프랑스 철학 서적 번역체로 뒤범벅이 된 글들은 별로 읽을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씩은 너무 홀로 멀리 나아가서 혼자 만의 독백을 하기도 한다. 허나, 난 그가 영화에 대해서 매우 절실하고 치열하고 강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새 영화를 결국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될 것 같다. 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평론가는 김영진.
    [본문으로]
  4. 하지만, 그렇게 찾아 낸 '아버지'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 [하녀]는 대단히 세련된 '서구적인' 공간과 소도구를 통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보고 싶다면 여기, 덧붙이자면, 소위, '상업 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공간과 소도구를 통한 미장센을 잘 다루는 감독은 봉준호고, 소위, '예술 영화' 감독 중에선 홍상수, 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5. 비극과 부조리극은 엄연히 다르다. 예컨데 주인공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아 마침내 모랫 바람이 이는 절벽 위에서 원수를 만나 싸우다 그만 원수의 칼끝에 맞아 장렬히 죽게 되면 그건 비극, 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마침내 모랫 바람이 이는 절벽 위에서 원수를 만나 싸우다가 원수의 칼을 쳐서 떨어 뜨리고 난 뒤 그의 목에 복수의 칼끝을 겨누자, 그 원수가 "사실은, 내가 니 아비다." 라고 말하면서 끝나게 되면 그건 부조리극, 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그렇다고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찍는 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 현장 관찰기에 따르면, 홍상수 감독은 배우들이 자존심을 상할 수도 있을 만치, 동작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연출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의 영화 속 상황들은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그의 의도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소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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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들

짤막한 거 2009. 4. 18. 13:54

미국 애들이 개인주의, 적이라는 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개인주의, 가 그야 말로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미국 애들이 장착하고 있는 개인주의, 는 적어도 나에겐, 부정적인 모습 보단 긍정적인 모습으로 더 다가 온다. 단지 하나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미국 애들이 개인주의, 적이라고 해서 그 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나라이고, 미국 애들은 그런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미국이 그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나라라는 것이 미국 애들의 개인주의, 를 뒷받침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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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어알유프롬?

에세이 2009. 4. 8. 08:23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한 바 BAR 에 앉아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술에 취한 녀석이 옷깃을 스치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더니만, 내 생김새를 보고 말을 걸어 왔다. "어디서 왔나? 일본인인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녀석과는 생김새가 다른 것이 가장 큰 화젯거리가 되는 거다. "아니, 한국인인데?"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한국인임을 상기시켜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외국에 나오면 내가 자꾸 한국인임을 상기시키게 된다. "그래. 북한은 좀 심각하지?" "응. 북한이 좀 심각하지." 비꼬는 감정을 담아 실어 보냈는데, 잘 전달은 안 됐을것 같다. 

너 '원래'는 어디서 왔니? Where are you 'ORIGINALLY' from? 나는 이 질문을 받아도 별 느낌이 없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양계 미국인'들은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에 지쳐있을 듯 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 가 내 앞에서 북한에서 미사일 발사를 했다는 '타임'지 기사를 펄럭이며 흔들어 댔다. 그러더니 '김정일'에 대해서 장난스레 묻는다. 내가 '김정일'을 어찌 아나. 그리고 난 '싸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그런데 그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 에 대해서 내 주변에 이야기 하면 전부 나중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러니까, 그 '중국애' 말야,,,' 아무리 대만, 에서 왔다고 말해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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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추어 본 도쿄 관광기

에세이 2009. 4. 7. 15:46

2008년 팔 월, 일본 동경에 오일 간 머물렀다.





내게 자신이 묵고 있던 기숙사 방을 제공해준 친구는 한국에서 논문 심사 준비를 해야 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과 달리 난 그 도시에 홀로 머무르게 되었다. 일본의 첫 번째 인상은 친구가 살고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공간들이 구석 구석 낭비 없이 잘 활용 되고 있었다. 화장실의 욕조는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었는데, 그 것 또한 화장실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었고, 한 개의 수도꼭지로 세면대와 욕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또한 공중 화장실에는 남성용 소변기 옆 마다 우산 걸이가 장착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디테일'했다. 순간 디자이너들이 일본에 와서 열광하고 간다는 소리가 생각 났다.

동경의 지하철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는 것을 넘어서 산 골짜기의 선사 마냥 정적이 흘렀다. 샌프란시스코의 버스 안은 곳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음악 소리로 난리 법석인데, 동경의 지하철은 정적이 흘렀다. 내 이어폰은 싸구려여서 음악들이 바깥으로 대부분 새어 나왔는데, 그 때 마다 친절한 일본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소리를 줄여 달라고 요청하고 갔다. 나중엔 지하철에서 음악 듣는 것을 포기 했다. 



시부야에는 사람이 많았다. 담배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피울 수 있었다. 처음엔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만 그 지정된 장소를 찾았다. 나중엔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정말 외로워질 때면 그 장소에 기어 들어 갔다. 한 무리의 사람 들이 잠시 같은 곳에 모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연기를 내뿜다가 다시 제 갈길 가는 느낌이 좋았다. 



메이지 신궁은 일본이 우리 나라와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전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근대화'를 시켰던 메이지 천황과 그 부인의 시체가 썩어 있는 곳이다. 그 곳을 방문하면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애써 지우자, 하늘 천, 자를 형상화 시킨 간결한 도리이의 미학이 나를 반겼다. 



관광지이지만 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고, 관광지이지만 관광지 특유의 요란하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다소 덜했다. 약간의 경건함이 느껴졌고, 그 곳에서 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다. 동전을 함에다가 던져 집어 넣고, 박수를 두 번 딱딱 치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별 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랫 동안 눈을 감고 있으려니 눈꺼풀만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참배 방법을 한 녀석에게 배웠다. 그 녀석은 내가 메이지 신궁에 들어 갈 때 부터 내 앞에서 줄곧 혼자 걸어갔다. 머리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샤기 컷을 했고, 허리에는 체크 무늬 웃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시부야를 배회할 법한 녀석이었고, 펑크 락도 좀 좋아 할 것 만 같은 녀석이었다. 그 녀석의 일상에 메이지 신궁이라는 공간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신주꾸로 향했다. 가부키초 1번가. 쾨쾨한 냄새를 벗삼아 보았던 많은 일본 만화들이 그 곳을 무대로 하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왠 흑인이 한국말로 말을 걸어 왔다. 업소 삐끼였다. 아무리 다소 불안하고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관광객의 행색이었다고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느 락 음악 공연이 열리는 곳에 도착 했다. 관객은 대부분이 이십 대 초반의 앳된 여자 애들이었고, 음악이 시작 되자 그 들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한 켠에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 되어 있었다.  

                                     
동경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에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들은 하나 같이 운동복에 가까운 복장을 하거나 자전거 택배일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복장들을 따라 가고 있는 데 반해 동경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패션에도 신경들을 쓰고 있었다. 동경은 대도시였다. 

셋째 날이 되자 문득 패션에 신경 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젠 체 하느라고, '세계로 간다' 류의 책이 싫어서, 정보가 보다 다양해서, 샌프란시스코 시립 도서관에서 빌린 '론리 플래닛' 영문판을 들고 다녔다. 슬슬 그 책에서 찾은 바 Bar 몇 군데를 들리기 시작했다. 맥주 값은 턱없이, 너무나 턱없이 비쌌다. 비싼 맥주를 먹고 나와 충동적으로 길거리에 놓여져 있는 자전거 몇 개를 잡아 당겼다. 세 번째 자전거는 중심이 약간 어긋나 있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넷째 날부턴 그 자전거를 타고 동경 시내를 돌아 다녔다. 마치 내가 이 곳에 오랫 동안 살아 왔던 사람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런 착각 속에 길을 잃었다. 그리고 펼쳐지는 서민적 풍경들. 그런데 그 서민적 풍경들이 구질구질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그 곳에서 외국인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서민적 풍경들 마저도 나에겐 이국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의 해악이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며칠 간 어딘 가에 머문다. 원래 들었던 풍문과, 보았던 영화와 사진들과 만화들이 여행의 들뜬 마음과 결합해서 현지에 대한 판타지를 마구마구 생산한다. 

어쨌든 정말로 멋진 바 Bar 하나를 발견해서 이틀 연속으로 갔다. 이름은 4, 일본어 발음으로 시-. 첫 번째 날엔 머리 색깔만 검고 이외수를 닮은 주인 홀로 있었다. 시부야역 바로 옆에 위치한, 기찻길 옆 바 Bar는 전철이 지나갈 때 마다 조금씩 떨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로 조금씩 더 떨었다. 주인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 보자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디제잉에 열중했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어 주는 바였다. 오 미터 길이의 나무로 된 바와 조그만 나무 테이블이 네 개, 조금 커다란 단체 손님용 테이블에 하나 있는 바였다. 주인이 손수 서빙을 하고 손수 음악을 섞었다. 두 번째 날엔 프랑스계 일본인 여자 바텐더가 있었고 여자 한 명이 바에 앉아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바 안으로 들어 갔다. 



                                        
그녀 옆의 옆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시키고, 먼저 바텐더에게 말을 건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여자 손님 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눈썹이 가늘었던 그녀는 화장기가 전연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치 허연 가부키 분장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평범한 오-에르, O.L, Office Lady, - 사무직에 종사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 - 라고 소개한 그녀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샌프란시스코에 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첫 대화는 쉽게 풀려 나갔다. 그리고 난 그녀 바로 옆 자리로 옮겨 갔다. 

그녀는 힙-홉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힙-합 아닌가요? 힙-홉, 홉, 홉. 끝내 힙-합을 힙-홉으로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그녀가 순간 귀여워 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내가 머리 속에 품고 있었던 귀여운 일본 여자, 라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딱 맞은 얼굴 이었다. 

난 일본식 서민 술집에 가서 꼬치 구이 냄새를 맡으면서 사케를 마시고 싶었지만, 멍청하게도 난 그 전에 그녀에게 나이를 물어 보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녀는 삼십 대 중반이었고, -얼굴은 분명 이십 대 중반인데- 애가 있는 이혼녀였다. 그래, 큰 상관은 없었지만,,, 조금 있으니 그녀에게 전화가 왔고, 그 전화는 집에서 애를 대신 봐주고 있는 자기 어머니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뒤에 내가 먼저 일어 났는지, 그녀가 먼저 일어 났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이름은 까먹은지 오래다. 단지 힙-홉, 홉, 홉, 을 힙-합으로 발음 하려고 노력하다가 관두었던 때의 귀여운 표정만이 생생하다. 

내심 마지막으로 생각해 두었던 어느 곳으로 향했다. 파티도 하고 분위기도 왁자하고 소위 '인터내셔널'들이 많이 들락거린다는 곳이었다. 들어가자 백인 남자 바텐더가 나를 반겼다. 사람들 중 십 중 팔구는 서구인이었다. 바텐더는 나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나는 젠 체 하느라고 나는 여행자요, I'm a traveler - 끽해야 동경 밤거리 방황하는 주제에 - 라고 말했다. 녀석은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발음은 그에게 troubler로 들렸다. 자전거를 하나 훔쳤으니 troubler 일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I'm a stranger, 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보다. 어쨌든 그 담에 날 반긴 건,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살았다고 하니 과도한 반가움을 표시하던, 자신을 캘리(포니아) 걸 Cali-girl 이라고 소개하던 바텐더였고, 나는 비싼 맥주를 몇 잔 또 주문하고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들을 자리를 옮겨 다니며 나누기 시작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땐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에 대한 강박이 스스로에게 조금 줄어 든다. 익숙치 않은 외국어라서 그럴 것이다. 

마지막 날이 마침 [인간 실격]을 쓴 다자이 오사무의 생일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묘는 동경 근처에 있었다. [인간 실격]은 지금까지 읽었던 중에 가장 강렬하게 읽었던 책 중의 하나다. 그 책은 내 속에 쇠꼬챙이를 쑤셔 넣고 휘젓는 듯한 충격을 주었고, 나는 십년 쯤 늦게 그 책을 발견하고, 읽은 것에 대해 분노 했다. 

누군가가 프랑스에 여행 갔을 때 고흐 무덤에 찾아가서 자신이 쓴 편지를 그 무덤 위에 올려 놓고 눈물기가 가시지 않은 촉촉한 자신의 눈을 담은 플라로이드 사진을 보여 준 일이 있었다. 나도 다자이 오사무의 묘에 가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지 않았다. 먼저 이미 누가 한 일을 내가 그대로 따라 하기 싫다는 유치한 어린 아이의 본능이 발동했다. (그 누군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고흐를 좋아하고, 하루끼를 좋아해서 한 때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쨌든 내가 좋으면 된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고민을 그쳤다고 했다. 여자라 그런지, 나보다 더 성숙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미 [인간 실격]에 대한 기억이 좀 가물가물 했다. [인간 실격]을 읽었던 기억은 십 대에 책을 접하고, 반복해서 읽고, 의지하고, 위로 받고, 그런 종류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 책에 매혹 되었던 기간은 강렬했지만 짧았고, 다시 또 다른 책과 또다른 영화와 또 다른, 또 다른 무엇에 매혹 되어 있었다. 

근데 실은, 무엇 보다 귀찮았던 거다. 굳이 그 먼길을 찾아가서 자살해 버린 일본인 묘 앞에 서기가 싫었던 거다. 그리고, 그때 엉뚱하게도 왜 김승옥은 그런 글들을 써제꼈으면서 80년 광주 이후에 충격을 받고 재미없게시리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버린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각주:1] 

샌프란시스코로 돌아 와서 동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 [Lost in Translation]을 보았다. AIR의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화면도 예쁘고, 빌 머레이의 감정 없는 얼굴 표정도 맘에 들고, 스칼렛 요한슨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는데, 문득 영화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어떤 일본인(아시아인)에 대한 비하적인 시선이 느껴져서 끝까지 보지 못했다.

이하 사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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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생각이 엉뚱한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 [르네상스인 김승옥] 에서 확인 한 바, 김승옥의 연표에 따르면 1960년, 그러니까 그가 20세 때, 4.19 이후 일본문화 개방정책으로 출판된 일본의 전후소설을 읽고 "일본 작가들의 허무주의에 입각한 탐미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다자이 오사무에게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사실은 대학생 때부터 소설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는 그때 번역되기 시작하는 일본 소설을 읽고 받은 충격이랄까 자극 때문이었어요... 내가 과거에 막연하게 헤르만 헤세 읽고 앙드레 지드 읽고 하면서 서양 문학에서 받았던 느낌과는 다르게 훨씬 실감나고 피부로 느껴지더라고요. 아, 소설이란 이런 것이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렇게 아프고 절실하게 쓸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충격적으로 받았죠." 라고 말하고 있다. 참조, [르네상스인 김승옥] 65쪽. (2009/04/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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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에세이 2009. 4. 4. 14:24

그를 어어부 밴드, 니 뭐니 하면서 잠깐 잠깐 접한 적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마도 황신혜 밴드, 하고 좀 헷갈렸고, 난 저런 풍의 밴드 이름에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에 아예 음악을 찾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홍대를 기반으로 뻘소리가 들어 있지 않는 음악 평론을 쓰는 분, 의 글을 접하고는 백현진, 의 음악을 들어 볼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주문한 앨범을 뜯고 나서 음악을 쭈욱 듣고 나니 이 백현진이라는 사람의 음악은 규정 지을 수 없다, 어떤 카테고리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느꼈다. 날 것. 적나라함. 이런 표현이 이 앨범에 가장 잘 어울린다. 가사로 말할 것 같으면 시적이면서도 서사적임과 동시에 사회성까지 두루 갖추었으며, 멜로디와 연주 또한 범상하진 않다. (물론, 어어부 밴드에 비해서는 많이 약해 진 것이라고들 한다.) 무엇보다 백현진의 창법. 죽여 준다.

규정지을 수 없음, 과 창법에서 언뜻 톰 웨이츠 Tom Waits , 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도 났다. 하지만, 톰 웨이츠의 음악이 철저하게 미국의 이야기가 담긴, 미국적인 음악이라면, 백현진의 음악은 진짜 한국적인 냄새가 흠씬 풍기는 음악이다. 무엇보다 한국, 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물경 그 것들이 서울, 의 어느 지역, 에 한한 이야기라고 할 지라도. 결국 백현진,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친숙한 지역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니깐.

아무튼, 음악에서 순대국맛, 도 나고 옛날 떡볶이 맛, 도 난다. 그러면서도 촌스럽거나 싼티나지 않는다. 

앨범에는 박찬욱, 김지운,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추천사 들이 있다. 하지만, 박찬욱, 김지운 감독의 영화 보다는 김기덕, 이창동,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좀 더 어울린다. 또한 유튜브에 내가 이 앨범을 사게 만든 결정적인 뮤직 비디오, [학수 고대했던 날]이 있다. 백현진 본인, 이 출연 했으며, 캠코더로 대충 찍은 듯 하지만 역시 범상치 않은 뮤직 비디오다. 

한 가지 더, 앨범 [반성의 시간] 에는 총 열 두 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두 곡에 외국인이 등장한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 '북미인/앵글로색슨인' 이다. 한 명은 캐나다 남성 배낭 여행객이고, 다른 한 명은 미국 남성 주둔 군인이다. (또한 둘 다 '백인'인 듯 하다) 각각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표현 된다. 열 두 곡 중 두 곡, 1/6, 꽤 적지 않은 비율이다. (2008/09/04)


덧. 백현진의 노래를 다시금 들으니, 이번엔 당구장에서 '사구'를 치다가 시켜 먹는 짱깨맛이 나는 구나. 당구장에서 '사구'를 치다가 시켜 먹는 짱깨맛, 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제는 흘러간 구십 년대의 풍경/취향, 일지도. 그 것들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예전 한국 영화 [품행제로]가 팔십 년대를 형상화 했던 것 처럼, 내 십대를 규정한 구십 년대를 형상화 하는 영화가 나오겠지. 누군가가 슬슬 지금 부터 기획해서 수년 뒤에 시기를 잘 맞춰 개봉하면 잘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2009/01/09)

덧덧. 백현진의 [반성의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좋은 글.

덧덧덧. 사분 오십 오초 부근 부터 그가 눈이 빠지도록,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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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에세이 2009. 3. 29. 03:00

하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의 당선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그 동안 간헐적으로 드러났던 '시대 정신'이 구체적인 실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등장한 모습에 몸서리 쳤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정책이고 뭐고 간에 그냥 저 한 사람, 저 대표자, 가 싫다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한국 땅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 당선, 그 이후에 전개된 별의 별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미국 땅의 현실에 좀 더 신경을 쓰기로 마음 먹게 한 계기도 되었다. 앞으론 저 현실, 에 몸을 담그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 까, 하는 몽상을 하면서. 어차피, 2007년 팔월 말에 미국에 건너 오면서 몇몇 이들에게, 농담 삼아, '누군가,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미국 간다.' 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미국 '광우병' 쇠고기 수입 파문과 촛불 시위 소식, 을 전해 들은 것은 것은 2008년 오월 쯤이었던 것 같다. 그 파문, 을 접하면서 다소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나는 미국 쇠고기를 아주, 잘,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쇠고기가 한국에 수입되는 것에 대해 특별히 내가 발언할 이유가 없었다. '광우병' 쇠고기, 라는 수식어는 과장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 위험을 과장하고 있는 듯한 각종 선전물들이 거슬렸다. 미국 쇠고기가 그 미국 내 검역 기준 그대로 수입 된다면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농촌의 피폐함과 농민에 대한 걱정? 글쎄다. 아무튼 지금까지도 아직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오히려 주목했던 것은 그 이야기, 를 처음 한 어느 유학생 녀석이 그간 난 대통령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 이 없었는데 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 녀석과 쇠고기를 사다가 구워먹은 적이 있었고, 문득 그 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표현에서 예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생각났다. 

2008년 유 월 초, 대략 십 개월 만에 한국땅을 밟았다. 때맞춰서 촛불 시위가 좀 더 격렬해져 있었다. 나는 그 촛불 시위에 가고 싶었다. 가서 보고 싶었고, 가서 느껴 보고 싶었고, 가서 동참, 하고 싶었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대한 내 혐오감, 과 내 반대 의식을 가서 표출 하고 싶었다. 내 개인과는 특별히 관계가 없어 보이는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라는 이유, 는 아무래도 좋았다. 보다 더 적합한 구호나 이유가 있었더라면 나는 더욱 더 좋아했겠지만. 


두울,

촛불 시위에는 나와 내 친구 두 명이 함께 했다. 우리의 그 촛불 시위 참가, 가 관광, 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오랜 만에 만난 기념으로 홍대에서 술을 먹었다. 촛불 시위, 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광화문, 으로 향했다. 싸우러 간다거나, 비장한 각오, 이런 것은 없었다. 솔직히 나와 내 친구 두 명을 이끈 가장 강한 동인은 호기심,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내 분노, 를 과연 이 촛불 시위, 를 통해서 표출 할 수 있기는 할까, 를 고민했다. 

시청 역에 내리니 가장 먼저 나를 반겼던 풍경은 아스팔트 포장 도로 곳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잡상인' 들이었다. 종로 거리에 죽 늘어선 갖가지 길거리 음식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어쩌면 그 촛불 시위, 의 숭고함, 을 저 '잡상인'들이 망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내겐 그 잡상인, 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각주:1]

광화문 사거리에 가까이 갈 수록 열기가 느껴졌다. 함성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앞으로 앞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마침내 이순신 장군 동산 밑에 전경 버스가 일렬 횡대로 앞 길을 탁 가로 막고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곳에 이르자, 문득 밤하늘이 붉게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일렬로 늘어선 전경 버스는 왠지 이 모든 거대한 부조리, 를 상징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전경 버스 위에는 젼경 들이 마치 개미떼 처럼 포진해 있었다. 머리 속은 하얘지고,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나를 휘감았다. 저걸 뚫어야 한다. 저걸 뚫고 지나가서 청와대로 가야 한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왠지 청와대로 진격해서 그 대표자, 를 끌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이 들기 시작했다. 




깃발 들이 나부꼈고, 마이크에서는 열렬한 구호가 터져 나왔다. 다들 흥분해 있었고, 나 또한 흥분했다. 좀 더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싶어서 우회 했다. 일행 들과 삼청동 쪽으로 향했다. 교보문고 앞을 지나 우회하는 길은 좀 더 다른 풍경 이었다. 소위, 문화 시위, 답게 어느 인디 락 밴드의 공연이 한 켠에선 한창 이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종각역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안주와 맥주 캔이 눈에 띄었다. 서울 한강 고수 부지의 휴일, 같았다. 

삼청동으로 항하는 길에 군복을 차려 입은 예비역, 들의 무리가 눈에 띄었다. 군대에서 배운 대로 이열 종대로 열을 맞추어 행진, 하고 있었고, 그 오른 쪽 옆에는 소대장 역할을 맡고 있어 보이는 어느 해병 예비역, 이 인솔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친구 녀석이 장난 삼아 그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갔다. 반대편에서 걸어 오던 한 무리 중에서 어떤 여자 분께서 "군인 아저씨들, 수고 하시네요. ^^" 라고 말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환호를 보냈다. 군대 생활이 조금이나마 보상, 을 받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길을 가는데 어느 외국인 남성, 이 어느 한국인 여성, 에게 뭔가 영어, 로 말을 걸고 있었다. 이열 종대 속의 한 녀석이 그 외국인 남성, 에게 잠시 눈길을 주자, 그 소대장 역할을 맡고 있던 녀석이 그 녀석에게 타박을 주었다. "야, 뭐 들으면 뭔 소린지 아나?" 

삼청동 앞의 상황은 이순신 장군 동상 밑과는 달리 좀 더 격렬했다. 시위대와 전경 사이의 간극은 좀 더 좁았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욕설이 오갔다. 전경 버스의 철망을 뜯어내려는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한 시위자는 전경 부대의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과 계속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왜 못 지나가게 하는 거예요?" "좀 지나가자구요." "말을 안 들으니깐, 청와대 앞에 가서 얘기를 좀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세엣,

다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향했다. 이 곳도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더 격렬해져 있었다. 문득 홍대 입구를 배회할 만한 옷차림을 한 몇몇이 눈에 들어 왔다. 녀석들은 정확히 내가 한 때 생각했던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프랑스 68혁명 때는 말이야.."

어디 선가 밧줄이 등장했다. 그 밧줄은 전경 버스에 묶였고 사람들은 그 밧줄에 매달렸다. 나 또한 그 밧줄에 매달렸다. 그리고 밧줄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전경 버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뚫리는 건가. 우회하면서 본 바로는 일렬 횡대로 늘어선 전경 버스 뒤에는 다른 전경 버스들이 늘어 서 있었고, 더 많은 숫자의 전경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 밧줄을 잡아 당겨서 저 일차 벽을 무너 뜨리는 거다. 그러는 거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경 버스가 조금씩 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경 버스는 마치 연환계에 걸린 위나라 조조의 선단 처럼 굳게 서로서로 연결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힘들어 보였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더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울부짓기 시작했다. 때맞춰 노숙자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전경 버스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와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버스 위로 올라간 그 아저씨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몇 박자 지나지 않아서, 전경 들에 의해서 그는 버스 밑으로 끌려 내려 갔다. 

생각을 좀 해보기 시작했다. 결국 이 촛불 시위의 궁극의 목적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탄핵, 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라는 이유보다 나에겐 그 이유, 목적이 훨씬 더 설득력 있었고, 훨씬 더 와닿았다. 그때 스친 생각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내 스스로 그런 결론이 나자, 저 마이크를 잠시 빌려서 사람들를 선동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네엣, 

조금 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지쳐갔다. 문득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좀 휑하게 느껴질 무렵, 친구 녀석이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기분이 슬슬 나빠지고 있다면서. 기분이 슬슬 나빠지고 있다면서. 이대로 여기 계속 있다면, 결론은 이미 인터넷 방송, 들을 통해서 본 것 처럼 날이 밝게 되면 전경 들은 이제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몇 몇 사람들은 연행 되고 시위대는 뿔뿔히 흩어지게 될 예정이었다. 그 때 까지 버틸 여력이, 그리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종각역에서 택시를 잡았는데, 우리 보고 촛불 시위에 참가 했다 오는 길이냐고 묻더니만, 자기는 촛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태우지 않는다며 그냥 가버렸다. 겨우겨우 택시를 잡고 친구 집으로 향해 주린 배를 채우고 술을 좀 더 먹은 다음 잠을 청했다. 

이상이다. 


덧.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은 쿠데타, 나 체육관 선거, 를 통해서 권좌에 오른 것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투표자 중 49%의 지지를 업고 당선이 되었다. 실은 이 사실이 가장 끔찍하다. 그리고 그를 당선 시켰던 '문화적인' 환경, 은 아직도 크게 변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1.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사, 라는 것을 친구와 해 보았다. 나와 그 친구는 정든 서울, 을 떠나 멀리 지방, 으로 '유학'을 가 이제 바햐으로 산과 바다를 벗삼을 예정이었다.

    그 친구의 장사 아이디어, 는 대학 졸업식 시즌에 맞춰서 졸업식장을 돌아다니면서 셀룰로이드 필름을 팔자는 거였다. 충무로에서 필름을 싸게 도매가에 살 수 있는 곳도 이미 알아 놓았다는 말도 했다. 나보곤 자본금만 좀 투자하면 된다고 말했다. 녀석이 나를 꼬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 우리는 지방, 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울, 여자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여자들을 앞으로 만나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대충 그 여자들이 다니는 대학들과 그 주변 환경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은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연대 독수리 빌딩, 하면 아, 거기요, 하면서 아는 척을 한다든지 말이다. 왠지 몰라도 당시 내겐 꽤 설득력이 있게 들렸다.

    그리하여 우리, 는 일 월 과 이 월 대략 이 개월에 걸쳐서 대학 졸업식장 들을 배회하면서 기념 사진을 기필코 찍어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상가 이상으로 필름을 팔면서 폭리를 취했다. 곳곳에서 필름, 과 각종 먹을 거리, 를 파는 사람들에 섞여 우리도 필름,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숭고한 졸업식장, 을 개판 오분 전 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를 했다.

    그렇게 해서 구경하게 되었던 소위, 대학가, 라는 곳은 참으로 놀라운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강남역, 부근이야 어차피 유흥가, 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가, 주변에 서점이 즐비 하다던지, 고즈넉하다든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샘 솟는다든지, 하는 내 환상은 정말이지 순진무구한 착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어떤 여대, 옆 풍경이 가장 놀라웠는데, 그 곳은 모델 학원, 성형 외과, 코스메틱, 옷 가게, 화장품 가게, 로 즐비했다.

    물론 맘에 드는 대학가, 도 있긴 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쏠쏠한 수익을 남겼던 장사, 경험을 기억 하면서, 나는 그 이후로 대략 반경 오 킬로미터 이내에 논과 밭과 산과 바다 밖에 없었던 내가 다녔던 대학을 좀 더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요즘은 다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니까 더 이상 필름, 깃발이 졸업식장, 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듯 하다. [본문으로]
: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인용과 링크 2009. 3. 28. 16:04

"창작에서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은 정확을 기하는 일이다. 그 뿐 이다. 풍차가 악마로 보이거든 주저말고 악마로 묘사해야 한다. 풍차가 풍차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풍차를 묘사하는 것이 좋다. 실은 풍차가 풍차로 보이지만,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으면 예술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뻔한 궁리를 이리저리 하여 낭만적임을 자처하는 멍청한 작가도 있다. 그런 자는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하지 못한다."

[나의 소소한 일상] 中.


생활

만족스런 일을 끝내고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차 거품에
아름다운 내 얼굴이
수도 없이 
비춰져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

[잎]  中.


:

감정의 과잉

짤막한 거 2009. 3. 27. 18:02

'일반적인 한국 영화'를 보면서 가장 싫었던 것은 바로 감정의 과잉이다. 영사막에 감정의 과잉이 넘쳐 날 수록 관객인 나는 영사막에서 소외된다. 감정의 과잉이 있는 영화들은 하나 같이 배우 지들 끼리 공감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추측하건데, 영화 촬영 현장에선 현장 사람들끼리 역시 공감하고 넘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들끼리 공감을 하고 넘어갈 수록 대체로 관객은 공감을 하기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연장해서 생각해 보면, 소설이든, 칼럼이든, 에세이든, 주장이든, 논평이든 간에, 글에서 감정의 과잉이 있을 수록 읽는 이인 나는 오히려 더더욱 차가워 진다. 영화이든, 글이든, 그 속에 넘쳐나는 감정의 과잉이 보는 이, 읽는 이, 인 나의 감정의 과잉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 언뜻 무덤덤한 듯 하지만 나를 감정적으로 뒤 흔드는 그런 걸 보고,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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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X소리

짤막한 거 2009. 3. 26. 09:05
하나,

놈들, 은 어쨌든 지금 껏 이겨온 놈들이다. 깨끗하건 더럽건 그 동안 게임의 규칙이 엉망이었건 어쨌든 간에 이겨왔기 때문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거다. 그래서 놈들, 과 싸우게 되면 더욱 더 철저하게 전략적인 측면을 고민해야 한다. 더 똑똑 해져야 한다. 한데 정말로 궁금한 것은, 전략을 고민하게 되면서 놈들, 을 닮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물음이다.


두울,

민간 의료 보험 제도를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돈,돈,돈 한다. 그 돈,돈,돈은 만약 자기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한다면, 그에 따르는 비용을 (그리고 시간을) 항상 계산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꿈, 을 말할 때 돈,돈,돈을 까먹어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다 더 현실적, 이다. 여기서 현실적, 이라는 말은 시민권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서 한인 교회를 순례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참, 현실적, 이군, 이라는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말과는 달리 구체적, 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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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련된 두 가지 X소리

짤막한 거 2009. 3. 25. 15:00

하나,

경험은 오감에 의존한다. 오감은 눈, 코, 귀, 입, 손(으로 상징되는 촉각) 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경험이 모든 오감을 모두 사용하면서 기억으로 머리 속에 저장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은 오감 중에 일부분만 사용하는 경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눈, 귀, 이렇게 이감에 의존한다. 꿈은 눈, 이렇게 일감에 의존한다. 이렇게 감각들을 통해 들어와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소위 기억, 이라는 것들은 혹시 실제로 경험한 것, 영화에서 보고 들은 것, 꿈에서 본 것, 이 뒤죽박죽 제 멋대로 뒤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시 뒤죽박죽 제 멋대로 뒤섞여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두울,

기독교에서는 죽은 뒤에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인가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어구가 있다, 고 기억한다. 예전에 문득 그 심판이라는 것이 있다면, 대체 어떤 방식일까, 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 간다.'라는 표현에서 영감을 얻은 내 상상은 이러 했다. 죽은 뒤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은 영화관이다. 의자는 달랑 하나. 그리고 영사막. 영사막에서 영사 되는 것은 그 동안 살아온 내 인생이다. 태어 난 이후 부터 죽기까지의 내 인생. 그 기간이 몇 년이 되었든 간에 하여간 처음 부터 끝 까지 주욱 지켜 보는 것이다. 내 생각엔 그 보다 더 가혹한 심판은 없을 것 같았다. 혹은 내가 그러한 심판을 원하고 있는지도.


덧. 쓰고 보니 정말 X소리다. 어느 정도로 X소리냐면, 딱 블로그에 써서 발행할 정도의 X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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