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과 [소라 껍데기] : 공공 미술품 관점에서

구라 2009. 6. 20. 18:30

The Museum of Post-Modern Art

[이명박]


2007년 12월 19일 作

투표자들 | 피와 뼈와 살

여기저기




[소라 껍데기]


2006년 

클라에스 올덴버그, 쿠제 반 부르겐 | 알루미늄 주물

청계광장






해설

[이명박]은 그를 뽑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상징하면서도, 살아 있어 걸어 다니기 때문에 미술관 밖에서도 관람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공공 미술품이다. 그를 뽑은 사람들의 내면에 들어 있던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 내어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탁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그를 뽑았던 사람들에게,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듯한 효과를 지닌 자기 반영적인 작품으로 기능하길 기대하고 있다. 요즘 들어 어느새 검찰, 경찰과 같은 공권력이나 구속, 수사와 같은 것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데, 본래의 훌륭한 예술적 가치를 점차 잃어 버리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안타깝다. 

[이명박]이라는 공공 미술품은 그가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아 차리기 쉽다는 측면에서 공공성을 지닌다. 이런 측면에서 [이명박]은 이명박이 서울 시장에 재직하면서 서서히 공공 미술품으로 기능하려 하고 있을 2005년-2006년 무렵에 설치 되었던, 서울시 청계천 초입에 솟아 있는 [소라 껍데기]라는 또 다른 공공 미술품과 비교 된다. 이 작품 [소라 껍데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정보를 아는 것이 필요하고, 그 정보들은 공공 미술품 [이명박]의 배경 정보를 아는 것과 달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약간의 검색이 필요하다. 

당시 회사 KT에서 작가에게 들인 돈과 제작비를 모두 포함해서 34억 원을 들여 서울시에 기부했던 이 [소라 껍데기]는 팝 아트 Pop-Art 작가 클라에스 올덴버그라는 스웨덴계-유태계 미국인과 그의 아내 쿠제 반 부르겐이 공동 설계한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Spring]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데, 작가들은 청계천을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이 이 [소라 껍데기]를 설계했다. 당시 '서울의 랜드 마크'를 만들 것을 염두에 두고 서울시 산하에서 청계천 상징 조형물 선정과 제작 등의 업무를 위임 받은 곳은 서울문화재단이라는 곳으로 당시 대표 이사는 [이명박]과 함께 역시 요즘 살아 있는 공공 미술품으로 활약 중이신 [유인촌]이다. 추측하건데, 선정 과정에서 어느 유명한 미술관련 인사가 미술계에서 유명하다고 알려진 클라에스 올덴버그라는 사람을 추천했을 것으로 짐작 된다. 

이 [소라 껍데기] 감상에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청계천과 그 [소라 껍데기] 사이에는 아무런 역사적, 문화적 맥락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보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청계천과 그 [소라 껍데기] 사이에는 아무런 역사적, 문화적 맥락도 없다, 라는 맥락'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지만, 비로소 그 맥락 안에서 [소라 껍데기]가 품고 있는 진정한 메세지가 이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 [소라 껍데기]를 감상하는데는 여느 현대 미술 Modern Art 이 그러하듯이 사전 지식과 정보가 있어야 하고 감상에 있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 해야 한다. 허나, 본래 공공 장소에 설치 되는 공공 미술품이라는 것은 얼른 알아먹을 수 있어야 하므로 이러한 [소라 껍데기]의 특징은 공공 장소에 설치 되는 공공 미술품으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저 [소라 껍데기]는 제대로 된 장소를 찾아서 제대로 다시 전시 되어야 한다. 마치 현대 미술 Modern Art 이 현대 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을 떠나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 처럼. 변기는 미술관 안에 있을 때 예술품이지, 화장실 안에 있으면 변기일 따름인 것 처럼.

[이명박]이라는 공공 미술품의 공식 전시 기간은 (아직까지는) 2013년 2월까지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은 여러 번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바라건데, [이명박]의 전시 기간이 끝나는 대로 그 재산으로 저 34억 짜리 [소라 껍데기]를 서울시로부터 다시 사들여서 이명박 자신의 집 뒷 마당에 세워 놓아 가치를 높여 주었으면 한다. 그의 집 뒷 마당이야말로 저 [소라 껍데기]가 놓여져 있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맥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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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과 링크 2009. 6. 10. 13:39

하나,

모든 문제를 이념이나 도덕성의 문제로 환원하여 판단하려는 사람들이야 말로 가장 답이 안 나오는 부류다. 그게 좌파건 우파건 어디건 별 상관이 없다. 문자주의, 근본주의 개신교 신앙에 사로 잡혀 '개독'이라고 욕을 먹는 사람들과 별 반 다르지 않다.


하나 그리고 반,

물론 '개독'이라고 욕을 먹는 이유엔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전도 방식'도 들어 있는데, 그 방식은 도를 아십니까, 나 예전 운동권, 의 그것과 별 반 다르지 않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선후배가 모인 자리 혹은 직장 상사와 부하가 모여 있는 술자리에선 '설교'가 있을 것이고 '전도'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교'와 '전도'는 대단히 한국적인 문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두울,

체 게바라 티-셔츠을 입는 것과 롯데월드에 가서 '프렌치 레볼루션 French Revolution'이란 이름이 붙은 '청룡열차'를 타는 것과 스타벅스에 가서 Fuck the Capitalism! 이라는 글씨를 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아, 그리고 체 게바라는 전투 과정에서 발생했던 탈영병을 가차 없이 처형 했다지.


세엣,

읽고 싶은 책. 2009년 4월 30일에 영어판이 나왔는데, 불과 두 달도 지나지 않은 6월 10일에 한국어판이 번역되어 나왔다. 놀랄만큼 빠르다. 그리고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의 추천사가 붙어 있는 듯 하다. 한데, 샌프란시스코 시립 도서관에서 검색을 해 보니 나오질 않는다. 캐나다 사람이 쓴 책이라고 홀대 하는 건가. 


네엣,

'콘텐츠', '웹 2.0' , '통섭 교육' 와 같은 '용어'들에 대해선 항상 의구심을 가져 보아야 한다. 그리고 비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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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힘내세요

짤막한 거 2009. 6. 9. 17:43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영어 회화 열심히
댕기고, 있잖아요
국제중 입시 학원
다녀야, 하잖아요
담 달부턴 발레도
배워야, 하잖아요


아빠! 힘-내세요오
우리가, 있어요오오




해설 : 1997년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는 등 한국 경제가 그럭저럭 거덜이 난 이후 1998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던 BC카드 광고에 삽입 되었던 노래 하나가 문득 갑자기 떠올라 자꾸만 머리에서 맴돈 나머지, 딸린 애는 없지만, 당시 신용 카드 하나 만드는 것이 블로그 하나 만드는 것 보다도 쉬웠던 것을 상기하며, 원곡 가사에 내용을 좀 더 덧붙여 보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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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박 종교 체험기

김이박 이야기 2009. 6. 3. 01:12
믿쑵니까. 아멘. 믿쑵니까. 아멘. 믿쑵니까. 아멘. 김이박, 은 어머니를 따라 기도원에 와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마루 바닥은 군데군데 물이 스며 들어 검게 썩어 있었다. 입구에는 몇 백 켤레의 신발들이 서로 뒤엉켜 있었고, 기도원 건물 안에서는 발냄새가 났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피아노 반주가 흘렀다.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이박의 앞 줄에 있던 한 소년이 두 손을 천장에 향해 활짝 벌리고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소년이 몸을 격렬하게 앞 뒤로 흔들 때마다 소년의 무릎팍은 마루 바닥을 찧었고, 그 때 마다 둔탁한 소리를 냈다. 두둑-두둑-두둑. 김이박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넌 너무 차가워. 같은 교회 사람들은 김이박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섭씨 100도로 끓고 있는 물은 36.5도를 유지하고 있는 물에게 넌 너무 차갑다고 말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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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훈 단상

에세이 2009. 6. 2. 11:45

2001년 출간 된 [칼의 노래]가 유행했을 때, 그 책을 서점에 한 걸음에 달려가서 사서 읽었다. 나중에 학교 내에서 중고책을 사고 파는 바자회가 열렸을 때 그 책을 바로 내놨다. 한 문장도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당시 그 책에 담긴 김 훈의 감수성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이 흐른 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집을 읽었을 때는 문장들과 문장들에 담긴 사유를 좋아했다. 

어느 날 강남역 교보문고를 배회하고 있는데 주위가 소란스러워 둘러보니 단편집 [강산무진] 출간을 기념하는 김 훈의 팬사인회가 열리고 있었다. 어떤 이, 가 김 훈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싸인을 대신 받아 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뽑아 들어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었고, 말없이 책을 내밀었고, 그는 나를 한 번 쳐다 보고는 이름을 묻고는 싸인을 해 주었다. 그 때 그가 보여준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기에 어떤 이, 의 이름을 대신 말했어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는 그 책을 들고 집으로 왔다. 다 읽고 나서는 일주일 정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그 단편집에 담긴 허무가 날 사로잡아서 였는지, 아님 내가 그 당시에 말할 수 없이 허무했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이후 그의 장편 소설은 읽어 보려 한 적이 없었지만, 발표된 단편 소설은 모조리 다 읽었다. 

그는 분명히 유물론자이면서 이상(理想)을 믿지 않으며 가치가 들어가 있는 낱말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인데, 이상(異常)하게도 그의 문장들을 읽어 나갈 때, 어떤 정신적인 것들이 깃든다.

김 훈이 인터넷에 [공무도하]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몇 가지 면에서 주목된다.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한 김 훈이 쓰는 이번 소설의 주인공이 처음으로 기자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장편 소설 중에서 처음으로 시간적 배경이 현대로 설정되어 있다. 그의 말처럼 처음으로 '당대의 일'을 쓰고 있다. 아울러 굳이 정치적 성향으로 분류하자면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그가 현재의 '시국 상황' 아래서 연재하고 있는 이 소설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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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막한 거 2009. 6. 2. 10:02
노빠, 황빠, 심빠, 무슨 빠, 무슨 빠, 무슨 빠. 빠빠빠. 글쎄. 무슨, 각기 다른 빠, 들이 서로 구별되어 오롯하게 존재하는 걸까? 무슨 빠, 라는 실체가 있는게 아니라 한국을 유령처럼 배회하는[각주:1] 빠심(), 이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빠심, 이 있는 한 언제든지 누군가와 결합하여 박빠, 유빠, 등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출몰하는 건, 그야말로 시간 문제다.


  1. 빠심, 을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생각해 보니 오프라 윈프리와 스티븐 잡스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고 바락 오바마도 어느 정도 빠심, 을 업고 당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빠심, 에 더 많은 종교적 심성이 깃들어 있다. 아울러 자꾸 미국하고만 비교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은 이미 생각보다 훨씬 -이상한 방식으로- 미국화가 진행 된 상황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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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진 않았지만, [마더]에 대한 잡설

짤막한 거 2009. 6. 2. 09:33
봉준호 감독의 신작 [마더]를 아직 보지도 않았고, 언제-어디서 보게 될른지 모르지만, 꼭 보고 싶다. 사람들이 [마더]에 대해서 '어머니의 본성'을 다루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내 생각엔 '어머니의 본성' 앞에 '한국'이라는 단어를 추가 시켜 '한국 어머니의 본성'을 다루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 싶다.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어머니의 본성, 모성' 뿐 만 아니라 '문화적인 맥락' 또한 반드시 같이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 개신교가 묘사되어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한국' 개신교가 묘사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와 같다. 

[마더]를 본 한국의 어머니들은 아마 [마더]에서 묘사된 어머니를 백프로 이해하고 지지할 것 같은데, 나중에 이 영화가 미국에서 개봉되면 영화를 보고 나온 자식을 둔 어머니들 중에서, 한국계 미국인 나아가 동양계 미국인을 제외한 미국인 어머니에게 [마더]에서 묘사된 어머니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지지하냐고 물어 보고 싶다. 아울러 예전에 읽었던 어느 영문 블로그가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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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짤막한 거 2009. 5. 29. 21:35

권위주의는 윗 사람에 의해서 결코 타파되지 않는다. '야자타임'을 시작하고 끝내는 건 윗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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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연재 소설을 통한 잡설

인용과 링크 2009. 5. 29. 17:54

박민규 연재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빈느]가 끝났다. 전체적으로 실망스럽다. 첫 연재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부터 내내 그의 연재 소설을 링크로 달아 두었다. 백화점 직장 내 풍경에 대한 묘사와 '군만두'라는 여자의 캐릭터,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시선이 맘에 들어서 즐겨 읽었다. 주인공의 롤-모델이라고 볼 수 있는 '요한'이라는 캐릭터는 작가가 설정한 1985년 즈음이라는 시절을 놓고 보았을 때 너무 세련된 녀석이어서 조금 비현실적인 면이 들기도 했다. 작가가 묘사하는 '못생긴' 여자의 절절한 고백이 담긴 절실한 편지는 소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이번 소설에서는 그가 잘 구사했던 신랄하고도 경쾌한 풍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 때 은희경을 좋아해서 그가 쓴 소설을 모조리 다 읽었는데, [비밀과 거짓말]을 읽었을 때 마주한 것은 내가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면서 좋아했던 면도날 같은 문장들이 다 사라진 밋밋한, '문학'을 써보고자 하는 욕구가 여실히 들어난 문장들이었다. 그런 느낌이 그의 이번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빈느]에서 조금 느껴진다. 

애초에 작가는 '신파'를 쓰겠다고 말했고, '사랑' 이야기를 쓰겠다고 말했고, '헤피 엔딩' 이었는데, 끝에서 '못생긴' 여주인공이 찾은 해답은 '프랑크푸르트'라는 아련한 느낌의 독일 도시로의 이민이다. 마지막 장면은 더욱 아련한 느낌을 주는 스위스 도시 '라우터브룬넨'에서 마무리가 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면에서 제가 한국에서 겪은 일들은 매우 야만적인 것이었어요. 야만이죠. 아름답지 않으면... 화장을 하지 않고선 외출하기가 두려운 사회란 건요... 총기를 소지하지 않으면 집밖을 나설 수 없는 사회란 거예요. 적어도 여자에겐 그래요, 지극히 야만적인 사회였어요.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아무튼 말이죠. 그래서 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특별한 차별 없이 일을 하고, 보수를 받고...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이런저런 클럽을 만들고, 토론을 하고... 전시회를 관람하고 공연을 즐기고... 이 삶이 좋은 거예요."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빈느], 10장 9화에서.

1989년 즈음에 피부색이 그 나라 국민의 대다수와 다른 한 여자가, 다 자라 성인이 된 이십 대 중반에 독일로 간호사로 이민을 가서 십 년 정도 살게 되면, 과연 '특별한 차별 없이 일을 하고, 보수를 받고...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이런저런 클럽을 만들고, 토론을 하고... 전시회를 관람하고 공연을 즐기고...' 살 수 있는가ㅡ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소설 속에서 여 주인공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독일어로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할 수 있는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이건 너무 안일하지 않은가. 주욱 내내 여자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를 그렇게 상세하게 묘사를 했던 것에 비하면 말이다. 게다가 저 여자 주인공이 간호사로 독일에 가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것은 독일이 아닌, 독일 속의 작은 한국, 이 아닐까. 그 독일 속의 작은 한국, 은 아마도 '야만적인 한국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거나 더 나쁘지 않을까. 아마도 저 여자 주인공은 아마 그 독일 속의 작은 한국, 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기에 독일, 에 더욱 더 잘 정착했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정재은이 각본을 쓰고 연출을 했고 옥지영(지영), 이요원(혜주), 배두나(태희), 등이 나오는 [고양이를 부탁 해]라는 영화가 있다. 인천의 여상을 졸업한 아이들의 삶을 공간적 배경을 잘 살리면서 제대로 묘사한 이 작품은 서울에서 나름대로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고자 애쓰는 혜주를 뒤로 하고 지영과 태희가 김포 공항에서 외국으로 떠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는데, 비행기가 이륙하는 그 순간 화면에는 커다랗고 두툼한 고딕체로 'GOOD BYE' 라는 흰색 자막이 화면을 메운다. '지긋지긋한 한국이여 안녕'을 말하는 것 같은 그 자막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는데, 그 엔딩 장면을 보고 있을 당시 내가 '외국'에 이미 나와 있어서인지 기분이 묘했고, 동시에 그래서 그 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저 두 여자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갈까, 라는 생각이 머릴 맴돌았다. 사실 '그 이후'의 삶이 더욱 궁금했다.[각주:1]

문득 '기러기 아빠[각주:2]'들의 실상과 그들의 애환은 제법 보도가 되고 알려진데 비해서, 그 기러기 아빠 자녀들의 현실은 제대로 보도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기러기 아빠들은 그들의 자식들이 대단히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현실'은 어떨까? 

(하여간 쓰다 보면, 결국은 샛길이다, 샛길인데, 그 샛길들을 모아 보면 또 비스무리한 면이 있다.)


  1. 그래서 삼 부작이 유행이라길래 한 번 삼 부작을 나름대로 구상해 보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는 이야기고, 두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그 '외국'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는 그 주인공들이 결국 '한국'에 돌아와서 부웅 뜬 채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어째 써 놓고 보니 재미없어 보인다.
    [본문으로]
  2. 연예인중에 기러기 아빠가 상당수인 걸로 알고 있다. 아마 통계를 내보면 '일반인'보다 그 비율이 훨씬 높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을 외국에 보낼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 동기는 단순히 한국의 공교육 과정이 싫어서 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니엘 헤니가 등장하는이 영상 에서 1분 이후부터 1분 가량 펼쳐지는 어떤 풍경이 그 동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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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리 Don Lee

에세이 2009. 5. 25. 10:30

한국계 미국인 작가 돈 리의 소설 [Wrack and Ruin] 2008, [Country of Origin] 2004, [Yellow] 2001, 을 다 읽었다. 그의 소설을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건너 띄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쓰는 문장 자체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재미있고, 주제들이 하나 같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처럼 삶의 단면이 담긴 장면 하나를 찍어서 보여 주기도 하면서, 미니멀한 표현을 통해서 심층부에 깔린 본질을 잡아 내는 탁월한 솜씨는 그가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레이몬드 카버의 흔적이 보인다. 한국 소설가 중에서는 이창동의 소설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얼마 전에 죽은 홍성원(1937-2008)의 소설집 [주말여행]과 비견 될 수 있겠다. 감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깊숙히 건드린다.

[Yellow]는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 소설 모음집으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여러가지 삶의 단면들을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 준다. 이 책은 문학사상사에서 2002년에 번역 출판 되었는데, 그 책과 관련된 언론의 상투적인 표현들, '정체성의 혼란으로 방황하는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재단될 수 없다. 아무튼 단편 소설의 매력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Country of Origin]는 미스터리 소설로, 한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사이에서 나온 한 미국 여자가 일본에서 시체로 발견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 된다. 대단히 흥미진진하고 복잡한 플롯과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 될 수록 조금씩 조금씩 진실이 밝혀지면서 결국에는 제목에 걸맞는 주제 의식을 보여 준다. 재미있다. 

위의 두 개의 소설에서는 물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그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옐로우'에서는 '국적' 보다는 '인종'에 대한 것이고, [Country of Origin]은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띄고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므로 '한인 작가'라고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최근에 보급본으로 출간 된 [Wrack and Ruin]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 형제가 나온다. 한 명은 리버럴 아트 컬리지를 나오고 '뉴욕'에서 크게 성공한 예술가지만 그 경력을 뒤로 하고, 북 캘리포니아의 어느 조그만 가상 마을 - 작가가 설정한 - 에 조용히 살고 있고 뒷 뜰에서는 마리화나를 키우고 있다, 다른 한 명은 하버드를 나오고 투자 은행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인디 영화' 제작자로 성공하길 바라는 사람으로 그가 자신의 형이 살고 있는 그 마을에 오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데, 풍자와 아이러니로 그득한 이 소설에는 특히 '아트 세계'에 대한 풍자가 일품이다. 이 소설에는 예술가 형이 자신이 크게 성공하는 계기가 되는 설치예술품을 한국의 창호지 문창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묘사를 제외하곤 '한국적인 요소'라곤 전혀 없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위치가 묘한 까닭은,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나온다. 흔히 볼 수 있는 1.5세대 나 2세대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3세대 한국계 미국인으로, 그의 아버지가 '미국 정부 외교부'에서 근무 했던 이력 때문에 어린 시절을 '서울'과 '동경'에서 보냈다고 한다. 부자는 삼 대를 가야 비로소 부를 누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 세대는 부를 쌓는데 전념을 해야하고, 이 세대는 그 쌓은 부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면, 삼 세대 쯤 가면 이제 어릴 적 부터 풍요롭고도 여유롭게 자라났기 때문에 생각과 행동거지에서 부자다움, 이 뚝뚝 묻어난다는 이야기다. (물론, 한국에선 아직까진 통용될 수 없는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일 세대 이민자는 어떻게든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며, 이 세대 이민자는 그런 부모를 보고 자라면서 좀 더 안정된 정착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삼 세대 쯤 가면 이제,,, 근데 여기 까지 쓰다 보니 어설픈 삼 세대 '이론'[각주:1]'에 어떤 이의 삶을 끼워 맞추는 격이 되어 버려서 그만 해야겠다.



  1. '이론'이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이자면,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이론'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이론'은 '스무 살 법칙'이다. 이 '스무 살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스무 살에 결혼하고, 예순 살에 죽는다. 간단하다. 스무 살 아리따운 여성이 마흔 살의 돈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여자 마흔 살, 남자 예순 살까지 같이 산다. 그리고 남자는 죽고, 돈 많은 마흔 살 여자는 스무 살 잘생긴 남자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여자 예순 살, 남자 마흔 살까지 같이 산다. 그리고 여자는 죽고, 돈이 많은 마흔 살 남자는,,, 적어도 이 세계 안에서는 돈과 미모가 공평하게 분배된다는 특징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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