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e sense, Ple-ee-ase

구라 2009. 3. 25. 14:30

A short conversation among Americans.

A: Blah blah blah blah blah blah. Does it make sense?
B: What's your point?
A: I mean, blah blah blah blah blah blah. Does it make sense?
B: I still don't get it. what's your point?
A: What's your point?
B: It doesn't make sense.
A: That doesn't make sense ei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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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한국 음식점 기획안

구라 2009. 3. 24. 15:06

미국 내 한국 음식점의 문제점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제대로 '현지화' 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내 한국 음식점에 드나 드는 손님들은 한국인들이 대부분 입니다. (이를테면 원더걸즈의 Tell Me 열풍이 한국에 불었을 때는 한국 음식점에서 밥을 먹으면서 텔미 텔미 테테레테테 텔 미, 를 들어야 한다, 이 말씀입니다.) 음식 또한 너무나 한국적이라서 중국 음식, 베트남 음식, 타이 음식, 일본 음식 처럼 제대로 미국화 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미국 내에서 한국 음식의 '지위'는 우리가 우습게 여기는 '동남아' 에도 못 미칩니다.

두 번째로는 메뉴가 너무 다양하다 보니까 '한국 음식'하면 떠오르는 그 무언가 - 전문 용어로는 '브랜드'라고 하죠. -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 불고기요? 그러니까 코리안 바베큐, 말씀이신가요? 잉글리쉬 잖아요. 딤섬 Dim Sum , 이나 스시 Sushi, 처럼 그 원래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제대로 '브랜드'화 된 것이라 볼 수 있죠. 아, 김치요? 물론 김치는 한국 고유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영어로도 Kimchi 라고 하지요. 하지만 어디 가서 김치 한 사발 주세요, 라고 주문하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어디까지나 김치는 반찬, Side Dish 일 따름입니다.

세 번째로는 고급화 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중국 음식 같은 경우에는 다소 싸구려 음식으로 치부되는 경향도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고급스러운 차이니즈 레스토랑, 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중국 음식은 '짱깨집'과 '차이니즈 레스토랑'으로 양분되어 있지요.) 이건 베트남, 타이 음식도 마찬 가지 입니다. 일본 음식이요? 이것 보세요. 백인들이 그러는데요. 일본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은 고급스럽고 정갈한 것들이래요. 예외란 없어요. 

자, 이렇게 문제점이 파악 되었으니 이제 해결 방안을 모색해 봅시다. 문제파악(Problem)-문제해결(Solution). (벌써 제가 말하는 품새에서 미국 실용주의 Pragmatism의 내음이 물씬 풍겨오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음식의 '현지화'를 위해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대상이 되는 고객입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인종의 전시장, 문화의 용광로, 니 어쩌니 하는 말이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미국은 이 백여 년 전 즈음에 백인들이 세운, 백인 들의 나라, 인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백인이지요. 물론 이후 아프리카에서 엄하게 흑인 들을 끌어와서 이후 그 들은 농장에서는 노예로, 공장에서는 노동자로 일했고, 이어서 히스패닉인들이 이 나라에 들어 와서 갖가지 일들을 했고, 대락 백 오십 년 전 부터는 중국인을 위시로 아시아인들이 미국에 들어 와서 험한 세상에 다리도 놓고 철도도 만들었고 사탕수수도 재배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 이라는 나라의 '아이디어'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원래 예로부터, 노동, 보다는 생각, 을 높게 쳐주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리인 것 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소개할 한국 음식점의 주 고객은 백인입니다. 

아, 백인에도 두 가지 종류의 백인이 있습니다. 그 음식점에서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미국 산 자동차가 아직도 세계에서 최고인 줄 알고 있다거나 혹은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 Bible Belt' 지방에 살면서 '창조론', 혹은 '지적 설계론'을 과학 교과서에 집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백인들이 아니라, 민주당을 지지하며 버락 오바마를 당선 시킨 다음 미국이 전 세계에 팔고 있는 잘 포장 된 수출품, '자유'와 '민주주의' 가 살아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곤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잘 교육받고-진보적이며-도심지에 사는-백인들 Well-educated liberal urban white folks 을 주 고객 대상으로 합니다. 아무래도 이 두 번째 백인들은 '문화적 다양성' 이라는 가치를 '다양한 음식점'을 순례하는 것으로 실현하고, '젠 ZEN'으로 대충 뭉뚱그릴 수 있는 '동양 종교/문화'에 일정한 호기심을 보이는 둥, (동양인, 이 아닙니다) 앞으로 소개할 한국 음식점의 잠재 고객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한국 음식점의 개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새로운' 한국 음식점의 이름은 '음(陰)과 양(陽)' , 영어로는 'Yin and Yang'  이라 합니다. 주로 도가 사상 Taoism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음양사상, 만물의 조화를 뜻하는 음양사상은, 'Yin and Yang' 이라는 어구가 미국 어느 지역 신문에서 '형용사'로 이용될 정도로 미국 내에서 알게 모르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 쯤에서 중국에서 시작되고 발전 된 음양사상, 과 도교, 가 어떻게 한국 음식점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느냐, 라는 의구심을 품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음과 양, 혹은 도교 Taoism의 상징은, 




그리고 대한민국을 상징 하는 국기, 태극기는, 


이므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음식점 간판의 맨 왼쪽에 최대한 '미니멀'하게 'YIN & YANG' 을, 그리고 그 오른 쪽 옆에는 '태극 마크'를 삽입하면 좋을 듯 합니다. 다만 태극 마크의 색상이 빨강, 파랑, 의 원색이므로 촌스럽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군요. 간판의 맨 오른 쪽에는 음식의 '컨셉'을 설명하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겠지요. 

'음과 양 YIN & YANG' 의 음식 '컨셉'은 다음과 같습니다. Organic-Authentic-Vegetarian Korean Food Restaurant.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의 세 단어 입니다. 

Organic(유기농). 
특히 백인 여자들에게 신선한 오르르가닉, 한 음식을 먹는 것은 오르르가즘, 이나 진배 없습니다. 

Authentic(진짜의/진정한)  
스시 Sushi 의 본 고장인 일본에는 정작 '캘리포니아 롤'이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메리카, 에는 진짜, 가 아닌 것들이 넘쳐 납니다. 따라서 '잘 교육 받은' 아메리칸, 들은 진짜(로 여겨지는 것)들에게는 무지하게 열광을 보냅니다. 

Vegetarian(채식주의자) 
이건 따로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그럼, 대체 이 음식점에서는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어떤 음식을 파느냐, 하면 말입니다. 간단합니다.

음, 의 음식으로 '차가운 물냉면'을 취급합니다. 종류를 다양하게 하여 최소한 여섯 가짓 수 이상은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양, 의 음식으로 '뜨거운 돌솥 비빔밥'을 취급합니다. 안에 들어가는 야채는 최대한 손님의 선택에 맡깁니다.

'음과 양 YIN & YANG' 에서는 간결하고도 알기 쉽고 음양, 의 조화를 느낄 수 있도록 딱 저 두 가지 종류의 음식만 취급합니다. 절대로 여느 미국 내 한국 음식점 처럼 이것저것 취급하지 않습니다. 음료는 '식혜'와 '수정과'. 딱 이렇게 두 종류를 취급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식혜'는 '백색'이고 '수정과'는 '흑색', 에 가깝기 때문이죠. '음과 양 YIN & YANG' 에서는 모든 것은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집니다. 

내부 인테리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바는 없으나 전체적으로 '흑'과 '백'의 '바둑알'과 '바둑판'의 '컨셉'을 잘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예컨데 테이블을 '바둑판' 모양으로 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아예 '홀'에서 일하는 '웨이터/웨이트리스'도 알맞은 비율로 '남'과 '여', '흑인'과 '백인'을 섞어 역시 '음과 양'의 조화를 느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예전에 어떤 의류 회사 광고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죠.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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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에세이 2009. 3. 17. 08:02

무라카미 하루키.

1989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는 어떤 면에서 한국의 구십 년대 식, 을 정의한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불었던 하루키 열풍에서 나는 한 발 비껴 나가 있었다. 당시 [상실의 시대]를 한 번 슥 읽어 보았는데 반 쯤 읽다가 덮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2005년에서 2006년 사이, 하루키를 너무나도 좋아하던, 어떤 이, 의 영향으로 다시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고,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쳐 [해변의 카프카]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남은 문제라면, 그 두 권의 책 내용이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스를 타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하루키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예외 없이 전부 여자였다. 내가 주로 여자, 들을 관찰해서 인지, 아니면 여자, 들이 하루키를 남자들에 비해서 좀 더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예전에 잠깐 몸 담았던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 안내일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학생증을 제시하고 있노라니 마침 그 여자가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었는데, 나도 그 책을 읽었노라며 척, 을 했더니 한국에서도 하루키가 번역이 되었냐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새삼스럽게 하루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 달 전에 하루끼가 '예루살렘상' 을 받은 것을 언급하고 싶어서다. '예루살렘상'은 이스라엘에서 2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북페어'의 실행 위원회가 개인의 자유와 존엄 등을 테마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게 주는 상, 이라고 한다.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침공했고, 위키 백과에 따르면, 2009년 1월 7일 까지 12일 동안 이스라엘인은 총 13명 사망, 523명 부상. 팔레스타인인은 총 1380명이 사망하고 5380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본에 있는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체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문제 삼고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그 상을 거부해 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단체로부터 그런 공개 서한을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다들 알 다시피, 결국, 하루키는 그 상을 받는 것을 선택했다. 이제, 하루키가 과연 예루살렘에 날아 가서 상을 받으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그리고 그가 한 말을 뽑아 대강 내 식대로 번역을 해 보자면,

"When I was asked to accept this award I was warned from coming here because of the fighting in Gaza. I asked myself: Is visiting Israel the proper thing to do? Will I be supporting one side?" the Jerusalem Post quoted him as saying. "I gave it some thought. And I decided to come. Like most novelists, I like to do exactly the opposite of what I'm told. It's in my nature as a novelist. Novelists can't trust anything they haven't seen with their own eyes or touched with their own hands. So I chose to see. I chose to speak here rather than say nothing."

"내가 이 상을 받아 들일 것을 요청 받았을 때, 가자 지구에서의 '전쟁' 때문에 이 곳에 오는 것을 경고 받았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것이 적당한 건가? 한 쪽 편을 들게 되는 건 아닐까? ... 몇 가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부분의 소설가들처럼, 나는 내가 말한 것의 정확히 반대 쪽에 있는 것을 하기를 좋아한다. 소설가로써 그런게 내 안에 있다. 소설가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거나 손으로 직접 만지지 전까진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와서) 보기로 선택했다.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보다 (뭔가) 말하기로 했다."

Murakami went on to compare humans to eggs. "If there is a hard, high wall and an egg that breaks against it, no matter how right the wall or how wrong the egg, I will stand on the side of the egg. Why? Because each of us is an egg, a unique soul enclosed in a fragile egg. Each of us is confronting a high wall. The high wall is the system which forces us to do the things we would not ordinarily see fit to do as individuals."

"단단하고 높은 벽과 계란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벽이 얼마나 옳고 계란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에 관계 없이, 나는 계란쪽 편을 들 것이다. 왜냐고? 왜냐면 우리 개개인은 모두 계란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영혼 하나하나가 깨지기 쉬운 계란 하나하나에 들어 있다. 우리 모두는 높은 벽을 마주하고 서 있다. 그 높은 벽은 우리에게 개인으로써 하기에는 잘 맞지 않은 어떤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We are all "human beings, individuals, fragile eggs", according to the author. "We have no hope against the wall: it's too high, too dark, too cold," he said. "To fight the wall, we must join our souls together for warmth, strength. We must not let the system control us – create who we are. It is we who created the system."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개인이고, 깨지기 쉬운 계란이다... 우리에겐 그 높고 어둡고 차가운 벽에 대항하는 희망이 없다. 그 벽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다같이 영혼을 따뜻하고, 강하게 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시스템'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게 놓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자. 우리가 바로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다."


저 기사를 읽고 나서, 바로 즉각적인 반응 하나가 내 속에서 솟구쳤는데, 영어로 된 글을 읽어서인지 왠일로 영어로 된 문장 하나가 솟구쳤다. 다음과 같다. 별로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What the HELL are you talking about?



나중에 그가 한 연설의 전문, 을 보게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읽어 보니 느낌은 또 달랐다. 확실히 그는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상을 받으러 갔다면 상을 주는 사람들 앞에서 답례 연설로써 뭘 더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 앞에서 말을 비비꼬는 것이 소설가가 가진 자질은 아닐 것이다.


덧. 어느 블로거가 번역한, 문예춘추 2009년 4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제1부.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 (2009/04/10)


일본.

그의 소설에는 분명 국적없는 개인, 으로 다가오는 매혹이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결국, 일본인이다. 한국을 식민지 삼았던 일본,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원폭 피해자로써의 일본, 을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중동에서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깡패 짓을 하고 있는 유태인/이스라엘,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나치의 학살 당사자라는 피해자로써의 자신들을 끈질기게 이야기 한다. (물론 하루키 본인은 일본인, 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것을 대단히 혐오하겠지만) 하루키가 이스라엘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예전에 동경을 여행 할 때 메이지 신궁을 구경하면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던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신사'와 '신궁'은 좀 다르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역시 그 곳은 단순히 '종교적이며 경건한' 공간만이 아닌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독일과 비교를 좀 해보자면, 

흔히 독일은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자신들의 과오. '나치'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고 그런 독일을 좀 일본이 본 받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면 독일, 이라는 나라는 일본, 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현대 독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나치'와 철저하게 분리, 단절되어 있다. 그렇게 비록 '나치'는 자신의 '과거'이되 지금의 자신은 그 당시와 철저하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나라다. 독일이 끊임 없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나치' 시대를 철저하게 배격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대 독일에 대한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반해 현대 일본, 은 '천황제'를 지금도 유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제국'과 완전하게 정신적으로 분리, 단절 되지 않은 채로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일본 총리가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감수하고 매번 야스쿠니 신사에 존경을 표하는 것에는 저러한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고 본다. '천황'과 '야스쿠니 신사'를 부정하는 순간 그 것은 현대 독일과 달리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일본 공산당'도 일본의 현실에 맞게 변형이 되어 천황제 자체를 반대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이 완전한, 소위 '반성'을 지금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느 나라가 더 '도덕적'이냐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라인홀드 니버가 이미 1934년에 이야기 했다.) 각각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천황'과 '신사'를 넘는 새로운 일본, 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일본에서 일어 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울러, '박정희'를 뛰어 넘는 새로운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 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 생각 들이 이어져서 글을 쓰긴 썼는데, 무슨 '국가'에 대해서 섣부른 일종의 '정신 분석'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원. 아, 그리고 링크 시킨 인용 출처 들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구글 검색을 해서 나오는 순서대로 인용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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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에세이 2009. 3. 4. 18:37

오랜 만에 잠시 만난 어느 녀석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녀석이 잠시 한국을 방문한 사이 '나이트'를 다니면서 많은 여자를 꼬셨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바람에 슬슬 지겨워질 찰나, 마지막에 만난 어떤 여자는 일종의 '보험'이라는 말을 듣고 오랜 만이라도 잠시 만난 것을 후회했다. 

'보험'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볼 때 나이는 찼으되 결혼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보험'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참 거시기했다. '보험'이라니, '보험'이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녀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을 한다는 것을 여자 꼬시는 데 십분 활용했으리라.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국에 놀러간 유학생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유학'이라는 단어 또한 한국에선 일종의 '형용사'로 기능한다. 한국에는 본래의 단어 뜻과 달리 이상한 용도로 사용되는 형용사가 참 많다. '뉴욕' , '동남아' , '서울대' , '유학' . 언젠가 형용사 사전을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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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消費

2009. 3. 2. 09:01

소비


사라지다 소
쓰다 비

써서 사라지다

음미할 수록
풍겨오는
허무한 매력

이렇게 
심오한 짓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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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추어 본 뉴욕 관광기

카테고리 없음 2009. 3. 1. 05:00

2004년 겨울,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보스턴, 그리고 마침내 뉴욕.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일기장을 들고 다니면서 대강대강 적고 나서, 관광을 끝낸 직후 한국에 돌아와 정리했던 글이다.


첫째 날.

뉴욕에 입성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911 테러를 맞은 그들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국제선 이상으로 뒤지고 또 뒤졌다. 신발까지 벗어서 검사를 그 속을 뒤지는데, 아마도 계속해서 걸었기 때문에 냄새가 지독했을 텐데, 조금 미안했다.[각주:1]

아무튼 이제 맨하탄으로 간다.

맨하탄 한 복판, 정확히 말해서 타임 스퀘어 지하철 역에서 지상으로 막 올라 왔을 때의 그 느낌. 그 느낌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그 때의 찌릿찌릿함은 헐리우드에 막 도착 했을 때의 그 느낌과는 비교가 안 됐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빌딩 벽을 가득 메운 광고판들. 아, 저기 삼성과 엘지도 보이는군. 보스턴의 한가로움과는 – 물론 보스턴 시내를 거닌 날이 일요일이긴 하나 – 정말 대비되는 바쁜 분위기. 게다가 건널목을 건너다가 차에 치일 뻔 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것과 같은 느낌. 

34th Street에서 OO이 만나다. 여전하군. Saigon Grill에서 베트남 음식 먹어 주시다. 역시 맛있다. 에드가 앨런 포 생가를 카페로 만든 곳에서 커피를 마시다. 분위기 있으셔. 거창하지만, 어줍잖게 삶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미국 여행 중 느낀 점, 안부를 주고 받고. 지금의 이 느낌을 최대한 즐겨 주시다. 


둘째 날.

본격적인 뉴욕 시내 관광. 자유의 여신상은 먼 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함. 그나마 안개가 껴서 잘 안보였지만. WTC가 있던 곳으로 가다. 폐허가 된 그곳은 여기저기에 기념물과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Reconstructing! , Rebuild! , Remember! [각주:2] 아무튼 그 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다시 세운다.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이 것을 기억하겠다. 결국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졌지. 뭐, 그 폐허를 보며서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어쨌든 미국 본토에 대한 첫 공격이 아니었던가.

American Stock Exchange에 들어가려고 시도하지만 거부당함. 9.11 이후로 견학이 금지 되었다는 가드 아저씨의 설명. Wall Street는 출근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들도 별로 없고, 빌딩 숲은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경험했고. East Village는 분위기 암울했고, 때맞춰 눈까지 내려 주시다. 근데 왜 눈이 내리는 데 우울하지? 암울한 이 곳을 벗어나서 다시 China Town으로 갔다. Dim Sum으로 점심을 때움. 맛있다. 

Soho에 가다. 옷, 빈티지, 뉴욕 스타일? (뉴욕 스타일이 있을까) Mac Center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니치 빌리지와 뉴욕대학교 그리고 필름 센터. 대학가, 옷가게들. 지나가다 Chicken Faita를 먹음. 구워서 주는데 맛있었다.

유스호스텔에서 잠시 쉬다가 그래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야경은 봐야겠고, 해서 나갔다. 11불이나 주고 올라가서 맨하탄 야경을 봤지만, 춥고 게다가 혼자라는 사실이 왠지 이건 청승이라는 생각만 자꾸 솟아오르게 했다. 담배 한 대 피고 바로 내려 왔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유스호스텔로 오는 길에 – 유스호스텔은 타임 스퀘어 한 복판에 위치함 – 42nd Street 지하철역에서 거리 공연을 보았다. 와우, 수준급인데? 멋진 Modern Rock 밴드.

유스호스텔에 돌아 오니 역시 일본애들이 한 바가지. 이래저래 이야기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그네들 봄방학이 3월 까지라는 사실. 그래서 이렇게 많았구만. 그 중에 키 150 센치미터 쯤 될까 말까 한 두 명의 여자 아이는 힙합 댄스를 배우러 뉴욕에 왔단다. 할렘에 있는 댄스 스쿨에 매일 출근 하신단다. 대단하다. 영어는 엉망인데, 넉살이 너무나도 좋으시다. 뮤양~. 그리고 일본어과를 다닌 다는 한국 여자애 한 명.


셋째 날.

늦게 일어 났다. 라이온 킹은 매진이라 결국 오페라의 유령을 예매했다. 차이나 타운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시내 관광. 성 패트릭 성당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그리고 돌아 다니는 것을 봤다. 여기 오는 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달고 돌아 다녔다. 뭔데? Ashes Wednesday란다.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그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Sony Plaza에 가다. 역시 소니. 삼성이 타임 스퀘어에 있는 소니 광고판 자리에 들어 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소니는 아예 이런 플라자를 가지고 있었군. – 지금 생각해보면 소니는 어쩌면 경영 악화로 광고판을 철수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 뭐, 그다지 즐길 거린 없었다. 초등, 중학생 정도라면 모를까.

UN빌딩은 포기하고 다시 타임 스퀘어로 왔다. 타임 스퀘어를 거닐다가 Toy’s R us에 들어 갔다. 장난감 천국에 역시 캐릭터. 캐릭터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갑자기 해버림.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봐두었던 니트를 결국 사버림. 젠장 87불이나 하는데!

OO이는 오늘 바쁘고, ㅁㅁ이는 내일 뉴욕에 오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유스호스텔에서 좀 쉬어야지. 그러나. 유스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날. 우울함에 퐁당 빠져버렸다. 여행 중 최대의 위기로 외로움을 느꼈다. 갑자기, 왜 내가 미국에 왔을까? 무얼 얻었는가?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그런 생각들이 이어졌다. 미국이란 나라를 짧은 시간이지만 보려고 간 것이다. 2주 밖에 안 되는 시간이긴 하다. 근데 생각해 보면 그냥 놀러 온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도 무언가를 꼭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온 것이긴 하지만. 

룸메이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녀석은 독일에서 DJ를 하는 녀석인데, 힙합 LP를 사기 위해 뉴욕에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 백장의 LP를 보여줬다. 각각의 LP가 중고가 많아서 싸게는 1불에도 샀다고 자랑했다. 음, 그렇군. 다른 한 녀석은 일본녀석인데 그 녀석 또한 Dance를 배우기 위해 온 녀석이었다. Jazz Dance. OO이는 XX 인스티튜드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와 삶을 나눌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어차피 결론도 안나는 생각. 갑자기 한 발자국 더 나아갈 때 한 가지를 더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1층 로비에 내려 갔다. 뭐, 특별한 거 없지. 일단 나가자. 나가는 길에 들어오는 뮤를 보고. 클럽에 가지 않겠냐고 물음. 오케이.

클럽 Lauahn으로. Party를 기대했지만 역시 수요일. 10명도 없었다. 썰렁하기 그지 없군. 너무나 늘씬하고 예쁜 바텐더를 흘낏 흘낏 훔쳐 보면서 맥주 한 병을 다 비웠다. 앞에 앉은 뮤는 그냥 그런 표정. 결국 나왔다. 나오다가 그리스 애하고 어쩌다가 이야기함.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 녀석 삼성 이재용 상무하고 골프를 쳤다고 자랑함.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무튼.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이라 조금 긴장이 되었는데, 생각 보다 안전하다고 느꼈다. 아무튼, 기분 전환이 되었다. 그나저나 힙합 클럽을 가야 쬐그만 뮤 녀석의 춤을 좀 봤을 텐데. 


넷째 날.

오랜만에 미국식으로 아침을 먹어 주시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다. 젠장 왜 또 일본이야. Japan! Japan! Japan! 왜 항상 일본 미술 전시 해 놓은 곳이 항상 클까? 정답은 그 녀석들이 돈이 많으니깐. 

아무튼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정말 컸다. 한 시간 짜리 투어에 참가했다. 할머니가 나오셨네 그랴. 노인 들이 할 수 있는, 하기에 적합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당당하고 멋있어 보였다. 

학교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이 그룹. 근데 다 교복 입은 흑인들. Private School도 백인, 흑인 따로 있나? 미술관 여기 저기에서 Suit를 입고 앉아 있는 흑인들. 저녁이 되면 Suit를 벗고 할렘으로 돌아 가겠지. Express 전철 탐. 할렘 바로 전 역에서 내림. 내릴 때 흘깃 보니 90퍼센트 이상이 Black. 

자신이 하버드 대학을 다닌 다면 그 문화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집단에 들어간 이방인이다. 둘 중 하나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집단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동화가 되던지. 아니면 떠나던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스쿨 타이], [죽은 시인의 사회], [여인의 향기] 등등.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생각을 더더욱 했던 것 같다. 분위기가 아무리 영국 귀족적 분위기건 어쩌건 간에, 거기에 다니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지 않은가. 어쨌든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버드생 한 명 만나보지 못하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

그리스 미술. 검은색 바탕에 갈색. 다 같은 형식이다. 뭔가 기념하기 위한 것들로 보인다. 그때는 아마 실용품이었을 거다. 하우저가 말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작이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본다. 거리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뉴욕의 자랑스런 말. The Capital city of Culture & Art란다. 그래 니 잘났다. 정치, 경제를 잡고 있으니깐. 자연스레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구나. 

아프리칸 미술. 아기를 업고 있는 여자와 화살통을 메고 있는 남자를 형상화 한 나무로 된 조각상을 보았다. 가이드가 Western Art와 달리 다 실생활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먹고 살 만해야 예술을 위한 예술도 하는 법.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는? 그 분도 자본주의의 혜택을 입으셨다. 물감이 대량 생산되지 않았다면 그 분은 물감도 사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의 그림들을 우리가 볼 수 있었을까?

인상주의에서 발길을 멈추다. 르누아르. 이 분은 검은색을 절대 쓰지 않았다지. 잭슨 플롯, 렘브란트, 브뢰겔, 루벤스, 다비드. 클로드 모네! 환상! 피카소는 절대 이해 안 되는 큐비즘 보다는 오히려 ‘청색시대’라고 불리는 우울한 그림들이 더 맘에 와 닿았다. 

초등학생들.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예술을 가까이 하면서 자란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오가고 있다. 

OO이를 만나기 전에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들어갔던 중국식당에서 먹었던 이상한 면. 중국식 짜장면인가? 색깔은 비슷한데 발냄새 비슷한 냄새가 심하게 나서 거의 버렸다. OO이를 만나 타카피 주스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고급 중국 레스토랑에 갔다. ㅁㅁ이를 드디어 만났다. 여전하다. 뮤지컬 시간이 늦어서 OO이를 두고 둘이 먼저 나와서 타임 스퀘어를 열심히 뛰었다. 5분 정도 늦었지만 다행히도 들여 보내 주었다. 

오우. 10분 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샹젤리제. 마에스트로 바로 뒷 자리. 재수! 무대 장치가 예술임. 역시나 많이 알아 듣지는 못했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뮤지컬이 끝나고 OO이를 다시 만나 향한 곳은 한국식 술집. 이런 저런 이야기. 


다섯 째 날.

오늘은 우드버리 쇼핑센터에 가는 날.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쇼핑 욕구를 한 번에 터트릴 시간이다. 그런데, 늦잠을 잤다. 다시 타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옆에 게이들 등장. 남자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속닥거리면서 음식을 먹는데, 속눈썹이 유난히들 기시다. 저런. 역시 맛있는 타이 아이스티. 그런데,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놓쳐 버린다. 짜증 이빠이. 우왕좌왕하다가 어쨌든 우드버리 아울렛에 떨어지다.

여기는 파라다이스. 왜 이리 싼 것일까? 

밤이 되어서야 돌아 왔다. 타운 하우스 앞에서 산 중국 음식, 그리고 맥주. 그리고 이야기. 이런 저런 걱정들. 쓸데 없는. 


마지막 날.

아침부터 무지하게 정신 없었다. 간신히 공항으로 가는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이번엔 가방을 사러 헤맸다. 토요일 오전이라 연 상점이 안 보였다. 돈도 거의 떨어지고. 아무래도 그냥 봉지에 넣어 잔뜩 싸 들고 가기엔 세관원이 두려웠다. 돈. 쓸 때는 쓰자. 

거기에 버스까지 고장. (그런데 왜 항상 여행 마지막 날은 이런 일들이 몰아 닥치는 걸까. 서둘러서 그런가?) 시간이 늦어서 조마조마 했는데, 출국심사는 불과 10분도 안 걸려서 끝나서 조금 허탈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할 필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음. 차선을 찾자. 이거 가장 크게 배운 것. 


후기. 

아직도 비행기 삯을 기억한다. 서울-샌프란시스코-엘에이-보스턴-뉴욕-서울, 이라는 구간을 무식하게도 몽땅 비행기로 연결했고, 당시 정확히 109만원 (세금 포함) 지불했다. 항공사/여행사를 이잡듯이 뒤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별로 읽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 데다가 생각 보다 읽을 거리도 별로 없는 '다시 들추어 본-' 을 끝내고 나니 그때 당시와 지금 내가 어떤 면에선 참 많이도 변했고 어떤 부분에선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 보니 유치한 구석이 너무 많아서 우스웠는데, 저런 유치한 구석을 지금은 얼마나 탈피했을까, 자문해 보아도 별로 좋은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위 문장 들은 사실 하나 마나한 소리고 결론은, 순간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어서 나름 좋았다는 거다. 이 글에 정보 가치는 거의 없지만, 읽는 누군가도 순간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면 좋을 것 같다. 


  1. 당시 난 일기장에서까지 착한 척을 하는 습성이 있었다. [본문으로]
  2. 첫 단어는 확실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확실하지 않다. [본문으로]
:

재미있던 별자리 여행

에세이 2009. 2. 25. 23:11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집에 굴러 다니던 김영사에서 출간 된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 이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책을 과연 내가 즐겼는지 즐기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뒤를 이어 (아마도 강원도에서 열렸던) '재미있는 별자리 캠프'라는 곳에도 따라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캠프를 과연 내가 가고 싶다고 어머니를 졸라서 가게 되었는지, 집에 그 책이 굴러다닐 수 있도록 해 주신 어머니가 나를 보낸 것인지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아무튼 난 쌍안경을 하나 챙겨 들고 비교적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캠프에 따라 나섰는데 지금으로썬 딱 세 가지 기억이 남아 있다.

하나, 캠프 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오줌으로 가득 차 터질듯한 방광을 부여 잡으며 괴로워 했는데, 그 괴로움을 못이기고 제발, 빨리 캠프장에 도착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 당시 주일학교에 열심히 참석을 하며 성경 퀴즈 대회에까지 나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오래 산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무드셀라라는 작자로, 구백 육십 구살까지 살았다, 고 성경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들에 열심히 외운 답을 말해 금상도 받고 당시 다녔던 교회의 이름도 빛냈던 개신교인, 이었기 때문이다. - 그 꼴을 보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별 이상한 놈 보겠다는 얼굴로 쳐다 봤던 기억이 난다.  

두울, 당일 저녁엔 저 책의 저자와 유명한 조경철 박사가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뭔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으로썬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시에 저 사람 들이 그렇게 별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왠지 모를 '어른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엣, 그 캠프는 KBS에서 동행 취재를 했었다. 아마도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이라는 책이 당시에 히트를 쳤던 것 같고, 그래서 그 캠프도 취잿거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의'가 끝나고 밤이 되고 드디어 별자리 관찰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몇 개의 망원경이 설치 되어 있었고 나처럼 쌍안경을 들고 온 사람들도 몇 몇 있었다. 안타깝게도 날은 흐려서 별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별자리 캠프'에 왔으니 별을 관찰하겠다고 열심히 하늘을 들여다 보았는데, 순간 쌍안경을 들고 하늘을 보고 있던 내 앞에서 환한 빛이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그 빛은 천사 가브리엘의 반짝이는 날개에서 나는 불빛이 아니라, ENG 카메라를 맨 카메라맨 옆에서 조수가 들고 있었던 강렬한 조명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러니까 밤에 별을 관찰하는 사람을 찍기 위해선 조명 불빛이 필요한 것인데, 그 조명 불빛이 쌍안경을 통해 들어 오는 통에 나는 순간적으로 천사의 강림을 느꼈다가, 이내 촬영을 하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별을 관찰하는 꿈 많은 소년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어느 아침 프로그램에서 난 쌍안경에 얼굴이 반 쯤 가려진 내 모습을 한 일 초 정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아직까지는) TV 출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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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카테고리 없음 2009. 2. 24. 14:59

어느 게시판에서 그와 그의 신부 사진을 보고 그가 그의 신부에 대해 쓴 글을 읽었는데, 
그의 소설과 비슷한 냄새가 나서 좋았다.


[르네상스인 김승옥] 책 中. 김승옥과 그의 부인, 박혜욱.

"그 여자는 거의 완전무결할 정도의 에고이스트다. 동시에 그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변덕장이이다. 그 여자는 상식 이상도 이하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로 아주 작정한 사람 같다. 관습을 즐긴다. 이 여자의 문학에 대한 오해는 무지막지할 정도다.  문학이란 건전한 사람을 괜히 병들게 하는 것이며 문학인이란 괜히 술이나 마시고 바바리코트의 깃이나 세우고 다니는 사람들인 줄로 안다. 그러면서도 미에 대한 추구는 굉장하다. 하지만 그것도, 예를 들어 자기를 닮은 여자가 아니면 아무도 미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독선적인 데가 있다. 

겉으로는 꽤 상냥하고 부드러운 것 같은데 차디찬 자기가 안에 도사리고 있다. 타인은 항상 타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순히 상식적인 여자가 아니라 철저히 너무나 철저히 상식적인 걸 사랑하는 여자이다. 내 글재주로는 아무리 써도 그 여자의 오만불손을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리 만나보아도 그 여자에게 있어서의 나는 항상 타인이었다. 타인치고는 약점을 빤히 알고 있어서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타인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식의 여자를 상대하는 방법이라고는 다만 두 가지밖에 없는데 하나는 그여자를 싹 무시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여자와 얼른 결혼해 버리는 것으로서 나의 경우엔 당연히 뒤의 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여자를 통하여 구제되기를 바랐다는 얘기다....

밤만 되면 어린애처럼 자기 집에 가고 싶어 울먹울먹한다. 그래서 아내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기 시작하면 아내를 웃길 말이나 재미있는 얘기를 준비해야 한다."


[뜬 세상 살기에], [햇볕과 먼지의 놀이터] 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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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오래된 책 한 권

카테고리 없음 2009. 2. 20. 16:22

오랜 만에 샌프란시스코 시립 도서관 중앙 건물에 들렀다. 이런 저런 자료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예전에 반 쯤 읽다가 만 책을 다시 제대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님 웨일즈라는 미국 여성이, 김 산(본명 장지락)이라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혁명가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지은 책 [Song of Ariran]이다. 

1941년에 처음 출간 되었는데, 지금 미국에선 절판 되었고, 아마존에서 구하려고 해도 양장본도 아닌 보급판 중고책을 92불이나 주어야 한다. 한국에선 1984년에 처음 출판되고 2005년에 재출간 되었는데, 내가 이 책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작년이다. 

사서가 서고에서 찾아온, 먼지가 쌓여 있던 삭아 버린 오래된 양장본을 펼치니 대출카드가 보인다. 대출카드 상으론, 이 책이 처음으로 대출된 날짜는 1945년 8월 18일로 기록 되어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 부터 해방 된 지 불과 삼 일 뒤인데, 그 대출자가 그 사실을 알고 대출한 것인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가장 최근은 1987년 9월 29일이다. 그 뒤로는 서고에서 쭈욱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나 보다. 

책을 휘리릭 넘기자 책 한 켠에 한자와 한글이 섞인 짧은 메모가 눈에 들어 온다. 

Chapter X(10)의 'From Tolstoy to Marx' 라는 부분이고 그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무엇을 바랬는지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 담긴 73 쪽에 적혀 있던 메모다. 

'自由主義가 放任主義 이라는 見解."

문득 이 짧은 메모를 쓴 사람은 누군지 궁금해진다.


이 책의 맨 첫 페이지에는 'Song of Ariran 아리랑의 노래' 가 'Old Korean folksong of exile and prison and national humiliation 추방자와 감방과 국가적 수치에 대한 오래 된 한국 민요' 라는 부제를 달고 적혀 있다. 쉬운 영어로 적혀 있는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내가 알고 있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라는 '아리랑'과는 차이가 있다) 노래를 다 읽고 나니 슬프다, 가 아닌 비통하다, 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re are twelve hills of Ariran
And now I am crossing the last hill.

Many stars in the deep sky-
Many crimes in the life of ma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Ariran is the mountain of sorrow
And the path to Ariran has no returning.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Oh, twenty million countrymen-
      where are you now?
Alive are only three thousand li
      of mountains and rivers.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Now I am an exile crossing the Yalu[각주:1]River.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of three thousand 
      li are also lost.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1. 압록강 [본문으로]
:

숫자 사이에 쉼표 찍기

짤막한 거 2009. 2. 18. 10:15
영어에선 one thousand, ten thousand, one hundred thousand, 그리고 one million. 
one million, ten million, one hundred million, 그리고 one billion. 

이렇게 동그라미 세 개를 기준으로 단위가 바뀐다. 따라서 쉼 표는 동그라미 세 개 당 하나씩 찍어 주는 것이 읽는 데 더 효과적이다.
10,000 ten thousand / 1,000,000 one million / 100,000,000 one hundred million

한국어에선 일, 십, 백, 천, 그리고 만. 
만, 십만, 백만, 천만 그리고 억. 

이렇게 동그라미 네 개를 기준으로 단위가 바뀐다. 따라서 쉼 표는 동그라미 네 개 당 하나씩 찍어 주는 것이 읽는 데 더 효과적이다.
1,0000  만 / 100,0000  백만 / 1,0000,0000 일억

동그라미 세 개 당 찍혀 있는 쉼표를 보면서 (한국어로) 동그라미 네 개씩 끊어 읽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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