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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3 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g, 둘
  2. 2009.05.22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Krzysztof Kieślowski 2
  3. 2009.05.21 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g, 하나
  4. 2009.05.21 캘리포니아 드리밍 아이디어 판
  5. 2009.05.18 영화가 끝나고 1
  6. 2009.05.06 용서 받지 못한 자 감상 2
  7. 2009.05.01 집단주의 단상
  8. 2009.05.01 외국인 떡실신 시리즈에 대한 생각
  9. 2009.04.30 구십년대식
  10. 2009.04.29 경영학
  11. 2009.04.21 박찬욱과 홍상수 9
  12. 2009.04.18 미국 애들 1
  13. 2009.04.08 웨어알유프롬?
  14. 2009.04.07 다시 들추어 본 도쿄 관광기
  15. 2009.04.04 백현진
  16. 2009.03.29 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17. 2009.03.28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1
  18. 2009.03.27 감정의 과잉
  19. 2009.03.26 두 가지 X소리
  20. 2009.03.25 영화와 관련된 두 가지 X소리
  21. 2009.03.25 Make sense, Ple-ee-ase
  22. 2009.03.24 미국 내 한국 음식점 기획안 2
  23. 2009.03.17 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24. 2009.03.04 보험
  25. 2009.03.02 소비 消費
  26. 2009.03.01 다시 들추어 본 뉴욕 관광기
  27. 2009.02.25 재미있던 별자리 여행
  28. 2009.02.24 김승옥
  29. 2009.02.20 낡고 오래된 책 한 권 2
  30. 2009.02.18 숫자 사이에 쉼표 찍기

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g, 둘

김이박 이야기 2009. 5. 23. 00:11
김, 은 서울 사년제에 들어간 뒤 사년이 지난 뒤 처음으로 한 여자를 오랫 동안 만났다. 이 년 정도 꾸역꾸역 대학을 다닌 뒤 이 년 조금 넘게 군대를 마친 직후였다. 

부모의 도움을 받아 응암동 근처에 반지하방 하나를 얻었고, 홍대 앞을 싸돌아다니며 대학에 입학한 이래로 쭉 같이 어울렸던 헤비-메탈 밴드 녀석들과 같이 날마다 술을 먹었다. 도피하는 심정이었다. 어디로인지, 어디에서인지, 는 몰랐다. 수능 시험을 치루고 난 뒤엔 어디에서인지, 어디로인지, 가 그럭저럭 분명했었다. 

김, 은 술자리를 그럭저럭 좋아했지만, 술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쏘주가 문제였다. 한 잔 두 잔 세 잔 반 입에 털어 넣고 나면 그 이상은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다. 밴드 녀석들과 뭉칠 때는 한데 어우러져 쏘주를 입에 털어 넣고 매운 안주를 먹어야 했다. 항상 속은 쓰렸고, 결국 변기를 부여 잡았고, 술값과 안주값은 어느 샌가. 

어느 날 밤. 김, 은 홀로 비틀거리며 홍대 앞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 샌가 전에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골목이 나왔다. 토사물, 돌모퉁이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몹시 추워 보이는 여자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몸을 앞 뒤로 천천히 흔들거리며 그 여자들을 달래고 있는 남자들, 형형색색의 커다란 글씨와 각종 표식들, 바람이 불 때 마다 휘날리는 종이 조각들, 이 없었다. 주황색 빛을 내는 가로등이 하나 서 있었고, 그 밑에 조그마한 간판 하나가 있었다. 싸이키델릭.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나지막히 다가와서 말을 걸고는 앞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씩 다가오라고 속삭였다. 빰빠라 빰빰, 빰빠라 빰빰. 북소리 장단. 빰빠라 빰빰, 빰빠라 빰빰. 한 발 또 한 발. 빰빠라 빰빰, 빰빠라 빰빰. 김, 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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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Krzysztof Kieślowski

인용과 링크 2009. 5. 22. 21:03
영화 감독의 자서전을 두 개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인 스페인 사람 루이스 부뉴엘의 자서전 [나의 마지막 한숨]의 몇 부분을 얼마 전 발췌 번역하여 인용했다. 그리고 문득 폴란드 사람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자서전 [Kieslowski On Kieslowski]의 서문 Epigraph 부분이 기억나 한 번 그 부분만 번역해서 올려 볼까 했는데, 책 전체를 번역할 계획을 하고 차근차근 올리고 있는 분이 계시더라. 조금 놀랬다.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각주:1]는 폴란드 사람으로 1941년에 태어나 1968년에 우츠 영화학교[각주:2]를 졸업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으로 경력을 쌓았고,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 사무 노동자들의 생활, 자신이 자란 폴란드 우츠시를 기록하는 등 다큐멘터리를 만들다가 극 영화로 옮겨간 사람이다. (영화 제작 시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폴란드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그 이후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신에게 받았다는 십계명의 각 계명들을 주제로 하여 1988년에 TV시리즈 [십계][각주:3]를 만들었고, 그 중 [살인하지 말라], 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각주:4]으로, [간음하지 말라], 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각주:5]으로 확장 되어 극장 개봉도 이루어졌다. 이 작품들을 통해서 '서방 세계'에서 유명해졌는데, 사회주의 국가인 폴란드에서는 그가 점점 추상화 된 주제를 다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후 프랑스[각주:6]와 폴란드를 오가며 1991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각주:7]을 만들고, 결국 프랑스 쪽의 투자를 받아 프랑스 국기의 개념, 자유-평등-박애, 를 주제로 삼색 시리즈, 1993년 [블루][각주:8], 1994년 [화이트][각주:9], 1994년 [레드][각주:10]를 만들고 나더니, 이번엔 단테의 [신곡]을 각색하여 [천국], [연옥], [지옥]을 만들려다 1996년에 만 54세로 비교적 일찍 죽었다. 그가 다루려고 했던 주제들을 보자면 자서전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려깊고 소박하면서도 다소 우울하고, 시니컬한 유머를 구사하는 그의 태도와는 별개로 대단히 야심만만했던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참으로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이름이다. 그가 유명해지는 것에 조금 더 관심이 많았다면, 먼저 이름부터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알렌 스튜어트 코닉스버그가 자신의 이름을 우디 앨런 Woody Allen 으로 바꾸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덜 유명했을 것이다.

지금 각주를 남발하여 숫자들과 [본문으로]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데, 아무튼, [Kieslowski On Kieslowski]는 생생하고 재미있고 솔직하여 추천할 만한 읽을거리다. 좀 설레발을 쳐 놓았는데, 그에게 별 흥미가 생기지 않더라도 '서문 Epigraph' 부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에세이로, 읽어 볼 만 하다.  키에슬롭스키 자서전 읽기



  1. 이 사람이 만들었던 영화 중 DVD로 출시 된 작품을 모두 가지고 있다. 섭렵하겠다는 강박이 식어서 아직 다 보진 못했다.
    [본문으로]
  2. 송일곤, 문승욱 감독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본문으로]
  3. 몇 개는 재미있고, 대단하고, 의미심장한데, 역시 전체를 다 보는 것은 섭렵에 대한 강박이 좀 있어야 한다.
    [본문으로]
  4. 자세히 보다보면 카메라 필터는 이렇게 사용하는 구나, 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영화로, 영상이 예사롭지 않다. 물론, 주제 또한 예사롭지 않다.
    [본문으로]
  5. 훔쳐 본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어느 청년의 이야기 가지고 참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 내었다.
    [본문으로]
  6. 이 사람 뿐 만이 아니라 몇 가지 사례를 더 보면, 폴란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 문화에 대한 짝사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7. 배우, 구도, 카메라의 움직임, 조명, 색감, 음악, 의상, 소품.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참 아름다우나 스토리는 정말 남 부럽지 않게 지루하다.
    [본문으로]
  8. 한 번 볼 때 보다 두 번째 볼 때 더욱 깊게 다가오는 영화고, 되풀이하여 보면 볼 수록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되는 영화다.
    [본문으로]
  9. 줄리 델피가 나오는 블랙-코메디 영화다. 꽤 웃긴다.
    [본문으로]
  10. 고백하자면, 지금껏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장 장시간 눈물을 흘렸던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사람의 영화들을 전부 모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낚인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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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g, 하나

김이박 이야기 2009. 5. 21. 21:48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 안. 박, 의 자리 두 줄 앞에 앉아 있는 한 남자. 그의 옆에는 지속적으로 칭얼대고 간헐적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아기가 하나. 그가 아이를 달래는 품새가 좀 사무적이다. 비행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착륙하고 난 뒤 박, 은 가족 들과 함께 출구로 빠져 나가는 도중에 그의 서류를 흘낏 볼 수 있었다. 홀트 아동 복지회. 박은 1991년에 개봉 되었던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라는 영화 제목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 해 박은 해외 입양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벌써 십 수년 전의 일이었고, 그 동안 해외 입양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입국 심사대는 미국인, 과 외국인, 으로 나뉘어 있었다. 박과 박의 가족은 외국인 창구 앞에 줄을 섰다. 박은 여행사에서 덮어 씌운 자기네 회사 로고가 박힌 파란색 여권 껍데기를 벗겨 버리고 초록색 대한민국 여권을 임국 심사관 앞에 내밀었다. 입국 심사관은 말 없이 여권을 휘리릭 넘겨 비자가 박힌 부분을 찾아 냈다. 그 곳엔 F24. 영주권자의 만 21세 이상의 미혼자녀 이민 비자. 공항 문 밖을 나서면서 박, 은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를 내 뱉었다. 와, 공기 참 시원하다. 


이, 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연 보라빛 주름 치마를 꺼내 입고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길을 나섰다. 이, 가 샌프란시스코에 온 지도 이제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늘은 푸르렀고, 햇살은 반짝거렸고, 바람은 차가웠다. 비가 오는 기간을 제외하고 연중 내내 큰 변화가 없는 날씨 아래서 이, 는 그간 거처를 세 번, 일터를 두 번, 옮겼다. 이, 의 일주일은 간략했다. 월요일 부터 금요일 오전에는 집에서 나와 영어 학원으로 향했다. 적당한 수준의 영어 수업을 듣고 난 뒤 이, 는 오후와 저녁 내내 한국 음식점에서 일을 했다. 시급은 캘리포니아에서 노동법으로 규정해 놓은 최저 임금 보다 1불이 적었고 사장이 반을 가져가고 남은 팁의 반은 아르바이트생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었고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 하는 한국인들은 유난히 팁에 인색했다. 이, 는 일요일에는 오전 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토요일은 비워 놓고. 그리고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이, 는 다운 타운에서 케이블 카를 탔다. 케이블 카 안은 관광객으로 들끓고 있었다. 


김, 은 서울 마포구 상수동 싸이키델릭 Psychedelic 에 앉아 주인 아저씨와 60년대 미국 음악에 대해서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바 Bar 안은 자욱했다. 담배 연기와 오래 된 각종 포스터와 음악으로. 주인 아저씨 뒤에는 LP판이 수두룩하게 꽃혀 있었다. 오십이 조금 넘은 주인 아저씨는 사십 대 초반 쯤으로 보였다. 주인 아저씨는 젊은 시절 비행기 안에서 스튜어드로 일을 했다. 일은 고되었지만 아직 해외 여행이 자유화 되지 않았던 시절. 덕택에 외국에 자주 들락거릴 수 있었다. LP를 하나 둘 씩 사모으기 시작 했고, 그 LP판이 조그만 바 Bar의 한 쪽 벽면을 채울 수 있는 숫자가 되었을 때 주인 아저씨는 일을 그만 두고 바 Bar 를 차렸다. 일을 그만 둔 날 주인 아저씨는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을 보았다. 양조위는 경찰을 그만 두고 왕정문이 일하던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왕정문은 패스트푸드 점을 그만두고 스튜어디스가 되었고, 그는 스튜어드를 그만두고 주인 아저씨가 되었다. 

물론 요즘은 LP판을 건드리지 않은 지 오래다. 주인 아저씨 앞에는 컴퓨터 한 대가 있고 윈-앰프가 랜덤 플레이 모드로 돌아가고 있는 중. 김, 이 컵에 담긴 벨기에산 맥주 호가든을 꿀꺽거리며 마실 즈음 쿵쿵 거리면서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 1967년에 발표 된 마마스 앤 파파스 The Mamas & The Papas 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California Dreaming' 이 꾸역꾸역. 김, 이 주인 아저씨에게 말했다. 내일 가요. 어딜? 샌프란시스코-캘리포니아, 미국이요. 도시 이름부터 먼저 말하는 걸 보니 미국에 갈 준비는 다 되었구만. 가서 돈 떨어질 때까지 머무르다 오려구요. 어디서? 친구가 하나 있어요. 안 본지 진짜 오래 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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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드리밍 아이디어 판

카테고리 없음 2009. 5. 21. 20:18

사 년제에 다닌 뒤 사 년이 지난 뒤,에 만난 여자. 영화를 전공하는, 감독을 지망했지만 재능은 없어 보였고, 차라리 단역 배우가 그나마 나아 보였던. 담배를 많이 피웠고, 분당에서 자라 났지만 분당을 혐오했던, 그게 계기가 되어서 만났던, 그래서 상수동 앞에서 같이 살았던, 그러다가 결국은 파리로 유학을 가버린, 김은 그런 그녀가 마냥 부러웠던, 하지만 그만큼여유 돈은 없었던, 그래서 싸이키델릭에서 일을 했고, 하지만 돈은 충분치 않아서 등록금을 빼돌렸고, 몰래 지금 미국에 가려는, 중산층 집안의 자제인.


샌프란시스코 국제 공항에서 션, 은 친구 김, 을 기다렸다. 따로 주차를 하지 않고 공항 주위를 두 바퀴 돌았다. 세 바퀴를 돌 때 쯤 션은 여행 가방을 들고 서 있는 김을 발견해서 차에 태웠다. 이게, 몇 년 만이냐. 그러게 정말 오랜 만이다. 션은 김을 차에 태워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팔로 알토 Palo Alto 로 데리고 갔다. 강남역에 있었던 이태리 파스타 전문점 팔로 알토 Palo Alto 가 이 곳에서 따온 것 임을 김, 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건물들이 아기자기 했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김에게 션이 미국에 오자 마자 부자 동네로 데려오는 것이 아닌데, 라고 말했다. 그들은 어느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와 베이글을 주문했다. 김은 처음 맛 본 베이글이 생각보다 맛이 없어 다 먹지 못하고 카페 앞 쓰레기통에 버렸다. 문득 그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홈리스 Homeless 들이 눈에 들어 왔다. 김, 은 이어 스탠포드 대학교를 구경했다. 그 곳의 스페인식 건축물은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차가운 바람이 부는 느낌이었다. 대학교 내에는 진품인지 모조품인지는 잘 알 수 없는 로댕의 조각들이 있었다. 김은 조각품들의 커다란 손과 발과 몸의 굴곡들을 보면서 어떤 기운을 느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향하기 전에 그들은 잠깐 월-마트에 들렸다. 아직 미국식 대형 마트점이 한국에 대중화 되기 이전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일상적인 이 공간은 김에게는 신기한 공간이었다. 구석 구석을 구경하니 한 켠에 진열되어 있는 사냥총도 보이고, 용도 조차 짐작하기 힘든 갖가지 공구 셋트들, 종류가 너무나도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 스포츠 용품 들이 보였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 제일 먼저 향한 곳은 금문교였다. 그 위용에 김의 입이 쩍 벌어졌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문교. 저 다리를 공사하다가 죽은 인부 숫자가 더 많을까, 아니면 공사 후에 저 다리 위에서 뛰어 내려 자살한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을까. 션은 생각에 잠긴 김을 다시 차에 태워 금문교 근처를 드라이브하다 일본식 정원에 멈춰 섰다. 관광을 온 놈 치곤 사진을 너무 안 찍는다며 사진 좀 찍으라는 션의 배려였지만, 김은 그 순간 미국에서 발견한 일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션은 다시 김을 데리고 금문교를 건너, 사진 찍기 좋은 소살리토 Sosalito, 티뷰론 Tibulon 으로 향했다. 현대 자동차에서 출시했던 스포츠카 티뷰론이 이 곳에서 따온 것 임을 김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언덕 들 위에는 깨끗하고 하얀 멋진 집들이, 영화 속에서나 보던 집들이 있었다.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은데. 응? 무슨 그림? 그러게, 대체 무슨 그림일까나.

샌프란시스코 시내로 향하는 길에 김은 여행 책자에서 보았던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꼭 보아야 할 곳, 일명 지그재그길, 롬바르드 길 Lombard Street를 보고 싶다고 션에게 말했다. 김의 머릿 속에는 여행 책자에서 본 갖가지 꼭 가보아야 할 곳들에 대한 정보로 꽉 차 있었다. 하지만 정작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션은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은 여행 책자에 꼭 가보아야 할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그 곳을 션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사실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션이 김에게 너는 서울에 살면서 남산 타워 꼭대기에 올라가 본 일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는 와중, 그들은 마침내 롬바르드 길에 도착했다. 겨우겨우 찾아낸 그 지그재그길을 션의 차를 타고 내려 오며 김은 숙제 하나를 끝마친 기분을 느꼈다. 물론 아직 해야할 과제는 도시 마다 한 보따리가 남아 있었다. 


션, 은 바빴다. 미국에 이민을 온 뒤로 항상 바빴다. 션은 바쁜 시간을 쪼개 공항으로 김을 배웅 나갔다. 처음엔 너무 오랜 만에 만난 김이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션은 관광을 온 김을 데리고 이 곳 저 곳을 다녔다. 관광을 온 김에게 의미 있는 것은 결국 멋진 사진을 찍어 돌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이상 뭘 더 바랄 수 있을까. 며칠 머무는 것으로 어떻게 이 곳을 알 수 있을까. 사실 김을 데려간 카페는 션이 미국에 처음 이민 와서 일했던 카페였다. 하지만 다소 들떠있는 김에게 그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었다. 


박, 은 대학을 다니던 도중 휴학을 하고 IT 벤처 사업을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는 한국을 먹여 살릴 차세대 산업으로 IT 산업과 신용 카드 산업을 꼽고 있었다. 서류만 잘 갖춰 놓는다면 당시 정부의 지원금을 타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박은 한 때 한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렸던 삼성역에서 강남역 사이의 테헤란로, 테헤란 벨리에 그럴 듯한 사무실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 년 반이 지난 뒤 박은 빚과 지친 몸과 마음을 안고 그 사무실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박은 자신이 왜 실패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IT 붐이 거품 이어서였는지, 모든 것을 걸고 창업을 한 자신과 달리 다른 녀석들은 단지 하나의 경험으로 여겨서 였는지, 그냥 자신의 능력 부족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좌절해 있는 박에게 박의 아버지가 이미 오래 전에 신청해 놓은 미국 이민 심사가 통과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박은 가족들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박은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영어 이름을 션, 이라고 지었다. 

션이 일했던 카페는 알게 모르게 유명한 카페였다. 그 카페는 실리콘 밸리에서 IT 벤처 기업을 차렸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 드는 곳으로 유명했다. 션은 그 곳에서 일을 하면서 실패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IT 닷컴 붐을 타고 벤처 기업을 차려서 성공한 사람들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지만, 실패한 사람들은 길을 가다 발에 채일 정도로 그득했다. 미국인들은 낯선 사람에게도 뭔가 자신과 공통점이 발견 된다 싶으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 늘어 놓았다. 션이 만약 한국에서 이런 공간을 발견했으면 한국에 머물러 있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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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에세이 2009. 5. 18. 06:22

...Movies have a hypnotic power, too. Just watch people leaving a movie theatre; they're usually silent, their heads droop, they have that absentminded look on their faces, unlike audiences at plays, bullfights, and sports events, where they show much more energy and animation. This kind of cinematographic hypnosis is no doubt due to the darkness of the theatre and to the rapidly changing scenes, lights and camera movements, which weaken the spectator's critical intelligence and exercise over him a kind of fascination. Sometimes, watching a movie is a bit like being raped.

[My Last Sigh], Autobiography by Luis Bunuel.

...또한 영화에는 최면적인 힘이 들어 있다. 극장을 떠나는 사람들을 한 번 살펴 보자. 대게 말 한 마디 없고, 고개는 떨구고 있으며, 저 마다 넋이 나간 얼굴들을 하고 있다. 연극, 투우, 운동 경기와 같이 생동하고 활기찬 것들을 보고 나온 관객들과는 다르다. 이 같은 영화의 최면적인 힘은 물론 의심할 바 없이 어둡고 컴컴한 영화관과 재 빠르게 바뀌는 장면, 조명, 카메라의 움직임 등에서 나오는 것으로, 관객들의 지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영화에) 매혹 당하게 만들어 버린다. 때때로, 영화를 보는 것은 이를테면, 강간당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마지막 한숨], 스페인 영화 감독 루이스 부뉴엘 자서전 中 중간 부분[각주:1].



극장에서 본 생애 첫 영화가 무엇이었는진 알 수 없다. 동네 친구의 아버지가 동네 친구와 나를 재재개봉관에 데리고 가서 본 제목도 기억 안나는 미국산 코메디 영화, 그리고 동시 상영된 [예스마담]일 수도 있고, 혹은 어머니 손을 붙잡고 지금은 없어진 신사동 씨네하우스에서 보게 된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일 수도 있다. 단지 난 흑백 영화 [모던 타임즈]를 보고 나온 뒤의 느낌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대낮에 극장에 들어가서 어두 컴컴한 곳에서 영화를 보고 다시 밝은 햇빛 아래로 빠져 나왔을 때, 다시 마주한 현실 세계는 물컹물컹하고 명료하지 않았다. 

[왕의 남자]를 보고 나왔을 때였다. 그 영화는 놀라운 걸작이라고까지 부를 순 없지만, 잘 만들어진 수작이었다.[각주:2]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예닐곱 층을 내려 오는 동안 둘 셋 무리지어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그 어떤 싸-한 공기가 맴돌았다.[각주:3] 난 그 순간 이 영화가 꽤나 인기를 끌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천 만 명이 넘을 줄이야.

또 다른 천 만 명을 넘게 동원한 영화 중에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가 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이은주의 얼굴을 열심히 쳐다 보았고, 장동건이 연기한 진태가 막판에 내뿜는 광기는 전혀 공감이 되질 않았다. 삼성동 코엑스 메가박스 1관 거의 맨 뒷줄에서 보았는데, 워낙 영화관이 커서 영화가 끝나고 줄을 지어 영화관 밖으로 빠져 나가는데 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꾸역꾸역 영사막 바로 앞까지 와 이제 막 출구로 나가려는 찰나,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언뜻 보기에 한 칠십 대 정도로 보이는 어느 노 부부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남편은 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삭히고 있었고, 부인은 다음과 같은 말로 남편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다고 XX씨가 살아서 돌아오는 거 아니 잖아요..." 너무나도 스펙타클한 전쟁 장면이 실은 불과 몇 세대 전 한국 땅에서 일어난 현실임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는데, 그 상황과 그 부인의 '대사'가 너무나도 딱 떨어지는 것이라 지금도 사실 그게 내 정확한 기억인지 아닌지 가물가물하다. 

또 하나 기억하는 '대사'는 [올드보이]를 두 번째 봤을 때다. 첫 번째 처럼 영사막 가까이 다가가서 '강간'당하기를 기대하면서 보았는데, 두 번째 관람은 역시나 영사막에서 멀찍하니 떨어져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일어서려는 찰나, 내 앞 대 여섯 번째 줄 앞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 서더니, "...내가 만나면 아주 그냥 죽여 버릴꺼야!" 라고 나지막히 소리쳤다. 오대수가 감금방에서 풀려난 뒤의 나이 쯤으로 보이는 그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아마, 저 아저씨가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는 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일거야. 근친상간 설정이 기분이 나쁜 거겠지. 근데 어쩌면 저 아저씨에게는 미도 나이 쯤 되는 딸이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아마도 그 딸을 보면서 적어도 한 번 쯤은 딸과 자고 싶다, 라는 괴물 같은 생각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들었을지도 몰라. 물론 그 즉시 그 생각을 황급하게 치워 버렸겠지. 그래서 저렇게 과도한 반응을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난 그 즉시 이 생각을 황급하게 치워 버렸다.

종로 3가에는 서울 아트 시네마라는 극장이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장면'을 말하기 이전, 잠시 이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 인사동 뒷 길 비릿한 돼지 고기 냄새를 맡으면서 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낙원상가 입구가 나온다. 극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 안에는 평소엔 마주할 일이 절대 없어 보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들어 있다. 한 부류는 나 자유롭고파, 옷 차림을 차려 입었거나 이마에 나 진지한 녀석이야, 라고 써 놓은 것이 보이는 둥 하여간 멀티 플렉스를 다니면 별로 마주치기 힘든 사람들이다. 주로 이 십대에서 삼십 대 중반 정도에 이르는 사람들로 그 들이 향하는 곳은 서울 아트 시네마, 라는 '예술 영화' 만을 전문적으로 틀어 주는 곳이다. 다른 부류는 남자는 주로 색이 들어간 정장에 보타이, 여자는 '토탈패숀'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옷 들로 한 껏 멋을 부린 차림새다. 주로 오십 대 이상 신사숙녀 분들로 그 들이 향하는 곳은 극장과 같은 층에 있는 '성인 나이트' 다. 이렇게 평소에 마주칠 일이 없는 서로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잠시 엘리베이터 안에서 함께 하는 참 재미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또한 서울 아트 시네마의 독특한 점은 홀로 와서 영화를 보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마치 청담동에선 연예인을 보아도 호들갑 떨지 않고 '시크'하게 구는 것이 불문율이듯이, (그래야 연예인들이 청담동에 계속 오니깐.) 영화 감독과 배우를 보아도 역시 호들갑 떨지 않는 것이 상례라는 것. 

그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 장-피에르 멜빌[각주:4]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만든 [그림자 군단]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장-피에르 멜빌 스스로도 경험했던, 세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스에 맞서 싸웠던 '레지스탕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레지스탕스'라는 프랑스 단어에서 모락모락 풍겨오는 낭만적인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다. 폼나게 나치 일당을 때려 부수는 [인디아나 존스]류의 활극은 그 영화에 없다. 단지 조직 내의 배신자를 찾아 내어 처단하는 일에 대한 건조하고 정밀한 묘사로 영화가 꽉 채워져 있다. 아주 묵직한 영화이고 끝까지 보고 나면 진이 빠지게 되는 좋은 영화다. 그렇게 기진맥진해서 영화관을 빠져 나와 극장 내 화장실로 향했다. 단 한 남자가 입구 쪽에서 가장 가까운 맨 오른쪽 구석 소변기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 왼쪽 옆의 옆 소변기 앞에 나란히 섰고, (입구에서 가까우니까) 아직 까지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충격이 고스란히 나에게 남아 있었다. 그 충격은 남자가 화장실 안 소변기 앞에서 으레 하게 되는 일을 하는 와중에도 가시질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안 좋은 버릇 중의 하나가 소변기 앞에서도 평소와 다름 없이 괜히 두리번 거릴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이다. 문득 그 남자를 흘낏 쳐다 보게 되었다. 그 남자는 다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고개를 대략 육십 도 가량 천장으로 들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보통 소변기 앞에서는 정면을 쳐다 보거나 자신의 몸에 달린 것을 쳐다 보게 마련이지 허공을 쳐다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도 소변기 앞에서 권장 될 만한 시선 처리는 아니다. 하지만 허공을 쳐다 보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얼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남자가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영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 순간 만큼은 영화를 보고 충격을 먹은 한 명의 관객으로 보였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상황들은, 모두 내 해석이 덧붙여진 것들이고, 어떤 것은 내가 기억을 재구성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Our imagination, and our dreams, are forever invading our memories; and since we are all apt to believe in the reality of our fantasies, we end up transforming our lies into truths. Of course, fantasy and reality are equally personal, and equally felt, so their confusion is a matter of only relative importance.
     In this semiautobiography, where I often wander from the subject like the wayfarer in a picaresque novel seduced by the charm of the unexpected intrusion, the unforeseen story, certain false memories have undoubtedly remained, despite my vigilance. But, as I said before, it doesn't much matter. I am the sum of my errors and doubts as well as my certainties. Since I'm not a historian, I don't have any notes or encyclopedias, yet the portrait I've drawn is wholly mine- with my affirmations, my hesitations, my repetitions and lapses, my truths and my lies. Such is my memory... 
 
[My Last Sigh], Autobiography by Luis Bunuel.

우리의 상상과 꿈은 언제나 우리의 기억을 침범한다. 우리는 줄곧 상상 속의 현실을 쉽게 믿어 버리고, 종국에는 거짓말이 참말로 둔갑한다. 물론, 상상과 현실은 모두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혼동은 (개개인에게) 상대적으로 각기 다르게 다가갈 것이다.
     비록 내가 경계는 하고 있지만,  '피카레스코'[각주:5] 소설에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주인공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미난 사건과 행동들로 차 있듯이, 이 반(半) 자서전에는 내 이야기들이 종잡을 수 없이 널려 있으며, 확실하게 잘못된 기억들 또한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말했듯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 확실함 만큼이나 내 오류와 확실치 않은 것 또한 나인 것이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나에 대한) 어떤 기록물이나 백과사전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기 묘사해 놓은 것들은, 확신과 우유부단함, 반복과 일탈, 진실과 거짓말과 함께 모두 나, 인 것이다. 말하자면, 내 기억들이다.

[나의 마지막 한숨], 루이스 부뉴엘 자서전  시작 부분.[각주:6]



  1. 내 식대로 번역해 보았다. 아직 이 책은 한국에 출간되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때 아마존으로 주문했던 이 책을 이제서야 뒤늦게 들춰보고 있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루이스 부뉴엘이 얼마나 유쾌한 사람이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물론 원문은 스페인어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영어판이다.) 루이스 부뉴엘에 관련된 서적은 [루이스 부뉴엘의 은밀한 매력]이라는 제목으로 문화학교 서울에서 출판 한 바 있다. (읽어 본 적은 없다.)
    [본문으로]
  2. 영화 [왕의 남자]의 주인공은 정진영이 연기한 연산군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연산군이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장면, 창호지 창살을 손가락으로 드르륵 튕기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장면과 반군이 쳐들어 오기 직전에 광대들의 줄타기를 보면서 일순간 환하게 웃던 장면은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결국 하나의 영화는 한 두 개의 장면으로 기억이 되는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3. 물론 사람들은 대게 엘리베이터안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허나, 반례로 [여 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보고 나왔을 때가 있다. 이미 영화가 끝나갈 때 부터 객석에서는 영화에 대한 야유와 악담이 터져 나왔는데, 그 야유와 악담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태어나서 본 영화 중에 최악이야." 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나 더, [여 교수의 은밀한 매력], [루이스 부뉴엘의 은밀한 매력]은 모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서 따온 것이다. 부르주아를 풍자하는 부뉴엘의 똘끼가 번뜩이는 영화다.
    [본문으로]
  4. 이 사람은 [백경(모비딕)]을 지은 미국 작가 허먼 멜빌 Melville을 너무 나도 좋아한 나머지 성을 멜빌로 바꾸었다.
    [본문으로]
  5. (나 처럼) 링크 여기 의 [2]. 장르별 소설 - 2. 건달소설 항목, 혹은 저기를 참고할 것. 설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소설 장르라고 느꼈다. 또한, '피카레스코'라는 발음에서 느껴지는 '우아함'과 뜻 자체는 거리가 참 멀지 않은가?
    [본문으로]
  6. 좋아하는 글들을 번역하는지라 재미는 있는데, 역시 번역은 어렵고 제대로 한 것 같지도 않다. 번역이 맘에 안 드신다면 원문을 읽으시길 바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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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받지 못한 자 감상

에세이 2009. 5. 6. 21:22

윤종빈 감독의 대한민국 군대에 관한 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각주:1]를 누구, 와 같이 보았다. 누구, 와 영화를 같이 꽤 보았는데, 그 중 한국 영화는 한 편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보니 나에겐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DVD, 윤종빈 감독의 [용서 받지 못한 자] VCD 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좀 셌고, [올드보이]는 나를 바짝 끌어 당겨 스크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만든 영화 긴 했으나, 최근에 다시 보니 별 다른 감흥도 일어 나지 않는 데다가, 그 안에는 그다지 한국적인 것도 없고 또한 한국에 가 본 일이 없는 누구, 에게 한국의 풍경, 을 보여 주기에도 적절치 않았다. 그래서 [용서 받지 못한 자]를 골랐다. VCD는 사 놓았으되 이 번이 두 번째 감상 이었다. 

[용서 받지 못한 자]가 한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어떤 이, 와 같이 보았다. 영화의 후반 부에 감독이 직접 연기한 어리버리한 신병이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하지만 차가운 대답을 들은 후에 절망한 나머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담배를 피우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야, 이제 저 새끼 좆 되겠다." 라고 내 뱉었고, 옆에서 어떤 이, 가 "왜?" 라고 물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고, 영화관 앞 돌벤치에 앉아서 담배만 피워 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버스 정류장으로 항했고, 손을 들어 어떤 이, 에게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떤 이, 에게서 문자가 왔다. "수고 했어, 오빠." 참 고마웠던 그 문자 메세지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며칠 뒤에 같은 곳에서 감독과의 대화, 가 있었다. XX대 영화과 졸업 작품으로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옆에는 같은 학교 선후배로 구성된 스탭진들이 함께 했다. 조감독, 촬영감독, 미술감독, 등등. 질문이 오갔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뭔가 알 수 없는 '데자뷰' 현상이 느껴졌다. 나란히 앉아 있는 같은 학교 선후배인 그 들의 모습에서 문득 내무반에 정렬해 있는 병장, 상병, 일병, 이병의 모습이 느껴졌다. 

누구, 와 [용서 받지 못한 자]를 다시 보는데 몸이 무척이나 가려웠다. 오랜만에 모든 상황과 대사들이 내 몸에 바싹바싹 와서 닿았기 때문이었다. 누구, 는 나에게 역시 한국 사회, 는 대단히 폭력적인 것 같다고 말을 했는데, 별로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다시 보니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가 조금 작위적이고 관습적이었다.[각주:2] 어리버리했던 신병이 자살해 버리는 것, 그리고 그 어리버리했던 신병에게 잘 해주려고 했던 주인공 또한 자살해 버리는 것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 상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공감이 되질 않았다. 한편, 그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진행자가 두 주인공의 관계, 에서 동성애, 의 냄새가 난다고 질문을 해서 당시에는 좀 생뚱 맞았는데, 과도하게 죄의식을 느끼다가 결국 자살 해 버리는 주인공 녀석이 친구(하정우)를 통해서 계속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모습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난 카투사는 아니 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서울 용산 미8군 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다. 막사의 1층과 2층은 미군들이 사용했고, 3층은 한국군이 사용했다. 막사 1층에는 미군들의 옷을 세탁하고 수선하고 구두를 닦아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미군에 고용되어 있었다. 'Out-sourcing 외부용역'이었다. 식당에서 우리들, 카투사들, 미군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은 모두 미군에 고용된 한국 사람들이었다. 눈이 오는 날이면 소대원들이 우르르 밖에 몰려 나가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제설 작업은 제설차가 대신 해 주었다. 미군은 돈이 충분했다. 

  1. 1960년에 존 휴스턴이 만들었던 영화 제목, 그리고 1992년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고 주연한 영화 제목 [용서 받지 못한 자]에서 따온 것이다. 최근에 주목 받은 한국 영화 [똥파리]의 영문 제목은 [Breathless]로 이 제목은 1960년에 장-뤽 고다르가 만든 영화 [네 멋대로 해라]의 영문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2. 감독은 이에 대해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고 기억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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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주의 단상

짤막한 거 2009. 5. 1. 15:52

(한국의) 집단주의란 좀 무서운 면이 있다. 각자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언어로 말한다. 개신교 교회에 다니게 되면 가장 먼저 익숙해져야 할 것은 예수와 개신교 교리가 아니라 교회 내에서 통용되는 '형제님'과 '자매님'으로 시작 되는 그 특유의 화법이다. 이건 인터넷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글루에 들어가면 이글루인들 특유의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 디씨인사이드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 특유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렇게 분화된 언어들이 소통을 방해한다. 어차피 집단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소통에 만족하는 건 아닌가, 혹은 개인 대 개인으로 소통하는 것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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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떡실신 시리즈에 대한 생각

에세이 2009. 5. 1. 10:27

외국인 떡실신 시리즈, 가 인터넷 상에서 유행한다. (굳이 링크하지는 않겠다. 구글에서 '외국인 떡실신'을 쳐보면 한 바가지가 나온다) 저 시리즈가 사실이 아니라 픽션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런데 왜 자꾸만 저런 것들이 유행하는 걸까. 

한국이라는 나라는 기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보통 경제적인 발전과 문화적인 발전은 정비례를 이루어서 달려가게 마련이고, 경제적인 발전에 따라서 문화적인 것들도 발전하여 외국에 알려지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기형적으로 경제적인 발전 정도가 그 문화적인 발전 정도에 비해서 훨씬 앞서있다. 불과 몇 십년 만에 너무나도 압축적인 경제 성장을 하느라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경제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예전 보다 더 많은 사람 들이 외국에 나올 기회가 생겼고, 외국에서 체류하는 일도 보다 더 많아 지게 되었다. 거기에 허울 좋은 IT 강국, 이라는 허명에 걸맞게 인터넷 망이 광범위하게 깔려 있고 인터넷 생활이 일상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외국의 모습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영어 열풍과 대학의 '국제화 바람' 으로 인해서 소위, 제1세계 외국인들이 여행하고 체류하는 숫자가 날로 늘어나면서 '외국'을 점점 더 가까이서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역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말해 주는 문화적인 어떤 것이 하도 적다 보니, 외국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많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외국인들이 관심이 없는 것은 상상 외로 훨씬 심하다. 마치 이건 내가 수리남, 이나 과테말라, 혹은 코트디부아르, 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과 일맥상통 하다. 쉽게 말해서, 어디서 왔어? 라는 물음에 한국, 싸우스 코리아, 라고 말한 다음엔 딱히 한국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든 경우가 다반사라는 소리다. 차라리 북한, 노쓰 코리아에 대한 이야기. 김정일과 미사일과 핵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면 모를까?

반면에, 어떤 한국인이 외국에 여행을 하거나 체류를 하게 되면, 그 경험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 어떤 한국인이 경험하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은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어떤 실망감이 존재한다. 예컨데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던 사람이 내친 김에 러시아를 여행한다고 하자, 그 사람이 한국 작가 어느 누구를 좋아하건 간에, 러시아인들이 그 사람이 좋아하는 한국 작가를 알리가 없다는 소리다.

게다가 옆에 붙어 있는 나라들, 일본, 중국이 하나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잘 나가는 나라들이라는 점이 한국인을 더욱 기분나쁘게 만든다. (나도 물론 기분이 나쁠 때가 많다.) 한국, 중국, 일본은 같은 인종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 입장에서 볼 때 구별하기 쉽지 않고, 그 세 나라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이라는 문화적인 동질성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자꾸 비교되기 십상이다.

이 모든 것이 중첩이 된 불일치가 발생하고, 그런 불일치를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서 저런 '외국인 떡실신 시리즈' 와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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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십년대식

짤막한 거 2009. 4. 30. 12:00

1989년 여름, 문학사상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 국내 출판.
1990년 여름, [상실의 시대] 10만부 돌파.
1990년 초. 다케이코 이노우에의 만화 [슬램덩크], 잡지 [소년 챔프]에 연재 시작.
1991년 2월 모일 일본 캡콤사의 대전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2 출시.[각주:1]
1991년 여름 일본의 가라오케 부산을 통해 상륙, 이후 '노래방'이라는 이름으로 성업.
1992년 초, 만화가 이명진, 일본풍 만화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으로 데뷔.

1992년 초,,,,,,,,,  홍대앞에 '락카페' 생겨남.
1992년 2월 17일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 공연, 1명 사망, 70여 명 중경상.
1992년 4월 모일 [요! 태지]로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각주:2]

1992년 04월 29일 미국 LA 폭동 일어남.
1992년 06월 01일 MBC에서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 [질투] 방영. 1달 반 간 지속 됨.
1992년 10월 28일 사이비 종말론 거짓으로 밝혀 짐.

1993년 02월 25일 김영삼 정부 출범.
1993년 08월 07일 대전엑스포 개최.
1993년 겨울. 93-94 농구 대잔치 최절정 인기를 구가.

1994년 04월 05일 그룹 Nirvana의 리드 보컬, 리드 기타, 커트 코베인 자살.

1994년 05월 26일 존속살해범 미 유학생 박한상 체포.

1994년 07월 10일 여름그룹, 쿨 데뷔.

1994년 09월 21일 5명을 살해한 지존파 일당 7명 체포.[각주:3]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32명 사망, 17명 부상
1995년 새해 벽두 김영삼 정부 세계화 선언.

1995년 01월 09일 SBS 드라마 [모래시계] 방영. 6개월 간 지속 됨.[각주:4]

1995년 04월 05일 홍대앞 바 '드럭'에서 커트 코베인 사망 1주년 추모 공연 열림.[각주:5]
  
1995년 4월 14일 영화주간지 [씨네21] 창간.
1995년 5월 모일 영화월간지 [키노] 창간.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망 502명, 부상 937명, 실종 6명

1995년 9월 2일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개봉.
1995년 12월 23일 [타락천사] 개봉.[각주:6]

1996년 01월 31일 서태지 은퇴선언.

1996년 03월 18일 홍상수 감독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개봉.[각주:7]

1996년 09월 07일 H.O.T 데뷔. MBC TV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토토즐, 이라고도 함)

1996년 10월 11일 대한민국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1997년 03월 03일 영화 [비트] 개봉.[각주:8]

1997년 12월 05일 IMF 구제금융 신청
1997년 12월 모일 NAVER 검색 서비스 시작
1998년 02월 25일 김대중 정부 출범, 정보화 선언.
1998년 04월 09일 미국 블리자드사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스타크래프트 대한민국 출시.[각주:9]

1999년 02월 13일 영화 [쉬리] 개봉. [각주:10]
1999년 03월17일 '오양 비디오' 논란.[각주:11]


(계속)

  1. 짧은 경기 시간으로 오락실 업주에게도 이익을 극대화 시켜주는 게임. 이내 오락실은 스트리트 파이터2 로 가득 찼으며 아이들에겐 실력은 곧 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혁신적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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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MBC TV <특종! TV연예>, 당시 생소한 '본토' 카피 음악을 들은 전영록은 대단히 벙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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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존파, 라는 이름은 홍콩영화 [지존무상]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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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최초로 광주 민주화 항쟁을 다룬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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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홍대 클럽씬, 인디씬의 출발이라고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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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당시 키노 편집장 정성일의 강력한 옹호와 함께 90년대 중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음.
    [본문으로]
  7. 평론가, 기자, 영화 잡지에 힘입어 독특한 작가로 자리 매김함.
    [본문으로]
  8. 한국영화가 방화 라는 딱지를 떼어버린 결정적인 분수령. 물론 이 것에는 미국 AFI에서 유학했던 김형구 촬영 감독의 세련된, 왕가위 영화 풍의, 촬영이 한 몫 했다.
    [본문으로]
  9. 가장 초자본주의에 어울리는 게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옴. 그 이전까지 당구를 치던 아이들 이 모두 게임방으로 몰려 가는 계기가 됨. 10대-20대 인터넷 사용 확산에 기여.
    [본문으로]
  10. 한국형 블록버스터, 말하자면 헐리우드 영화가 아닌, 이제 한국 영화에서도 총격전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관객들의 성원에 힘입어 620만 명 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함. - 난 이 영화를 어찌하다 극장에서 세 번을 보았고, 매 번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김윤진, 등 출연 함. 삼성, 영상 사업단의 마지막 작품이었음.
    [본문으로]
  11. 30대-50대 인터넷 사용 확산에 기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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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

짤막한 거 2009. 4. 29. 21:30

왜 '노동자'가 될 사람들이 '경영학'을 공부 할까? 대학교 때 '조직관리론'을 열심히 공부한 다음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조직관리'를 당하게 되는 것. 정말 아이러니, 하다. 게다가 '조직관리론'에서 공부한 것 처럼 만 '조직관리' 당한다면 평생 직장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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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과 홍상수

에세이 2009. 4. 21. 05:40


영화 감독 박찬욱.

박찬욱의 영화를 대부분 좋아하는 편이다. 그 중에서도 [올드보이]를 가장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 영화는 내게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보통 영화를 볼 때 스크린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재곤 하는데, [올드보이]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본 영화 중에서 내가 스크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본 영화다. 

그 이후에 만들어진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대 실망이었다. 너무나 실망스러워서 내가 지금까지 그의 영화를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니 그래도 그의 다음 영화가 여전히 궁금, 하다. 한국에서 그의 새 영화 [박쥐]가 개봉한다고 한다. 헐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의 투자를 받은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모양인데, 예전에 어디선가 얼핏 접한 바로는 그의 새 영화가 헐리우드의 투자를 받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국에서 투자 금액을 다 채우지 못한 결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선택'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그의 새 영화 [박쥐]가 궁금, 하다. 언제 어디서 보게 될 른지.


영화 감독 홍상수.

예전에 영화 감상 노트를 세 권 정도 작성한 적이 있다. 첫 째 권의 이름은 Dream, 둘 째 권의 이름은 Reality, 그리고 마지막 셋 째 권의 이름은 KINO[각주:1]였다. 제목이 유치한 까닭은 모두 스무 살 이전에 채웠던 노트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과 영화에 관한 정보, 그리고 영화에 관한 간략한 감상으로 한 쪽 씩을 채웠다. 영화에 대한 별 다섯 개 짜리 별점도 어줍잖게 매겼다.

들쭉날쭉 내 편견대로 재미삼아 매기던 영화에 대한 별점을,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처음 보고 나선 '?'로 매겼다. 참 묘한 영화고, 영화가 좋았다고도, 좋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서른 살이 넘어서야 좀 이해가 가능할 것 같은 영화다, 라고 적었다. 

최근 작 [밤과 낮][각주:2]을 제외한 그의 모든 영화를, 적어도 세 네 번씩 반복해서 본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모든 인터뷰와, 그의 영화와 관련해서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영화 평론을 읽었던 것 같다. 아마 이창동을 제외하곤 한국의 유명 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일 것이다. 

이상하게 그의 영화에선 아무런 희망도 찾아 볼 수 없고, 인물들은 바닥의 끝을 드러 내며, 영화의 엔딩은 그야 말로 갑자기 불현듯 찾아 오는 데다가 아무런 결론도 주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모호하고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의 영화에 대해서 강한 적의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오히려 내가 혼란스러울 때 그의 영화를 보면서 도리어 위로를 받거나 머리가 맑아지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건 취향, 일 따름 이다. 아무튼, 보고 싶었던 [밤과 낮]도 아직 못 봤는데, 그의 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개봉한다고 한다. 두 영화 다 언제 어디서 보게 될 른지 원.


평론가 정성일의 두 사람 비교. 

예전에 영화 평론가 정성일[각주:3],이 두 감독에 대한 을 쓴 적이 있다. 평론가 정성일은 2005년 7월에 [The DVD]라는 잡지에 기고된 이 글에서 박찬욱과 홍상수 감독의 영화 취향에서 풍겨 나오는 의문스러운 점에 관해서 논하고 난 뒤, 그 두 감독의 영화 취향에 한국 영화의 영향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나서 결국 그 들은 앞선 세대 한국 영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일종의 '아버지'가 없는 정신적 고아 신세라고 지적한 뒤, 그 결과 그들의 '한국 영화' 속에서도 정작 '한국'이 빠져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에서 '작가주의' 영화를 만드는 한국 영화 감독 들의 영화에 한국의 냄새가 나지 않는 다는 점을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나는 앞선 세대 한국 영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영화 감독이 그 둘 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 영화를 만드는 거의 대부분의 영화 감독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유현목 감독을 제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감독, 하길종 감독을 제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젋은 세대 감독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영향, 이라는 것은 그냥 이것저것 보다가 받게 되는 것이지, '한국 영화사'의 맥락을 공부한 다음 일부러, 찾아 가면서 본 영화, 고전, 들은 사실 영향, 과는 별 관련이 없게 마련이다.)

조금 확장 해서 이야기하자면, 예전에 불었던 김기영 감독 재발견과 그에 대한 열풍도 영화 감독들이 '성장하면서'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미 장성한 뒤에 애타게 '아버지'를 찾아 해맨 결과는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각주:4]

또한 평론가 정성일은 자신이 항상 되새김질 하던 프랑스 영화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의 그 유명한 말 -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영화에 관한 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이상은 없다. - 의 마지막 단계를 충실하게 실천 중이다. 어쩌면 그의 영화적 아버지도 결국 어느 '프랑스' 영화 감독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그가 만드는 영화 제목은 독일 작가 괴테의 소설 제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다. (물론 그는 서른도 되기 전에 임권택 감독을 인터뷰 했고, 그에 관한 책을 내기도 했다. 하여간 좀 아이러니. 하다.)

하여간, 그의 글의 논조와는 별개로, 내 주목을 끈 부분이 한 군데 있다. 평론가 정성일의 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렇게 대담을 좋아하는 저널 중에서 어떤 저널도 홍상수와 박찬욱의 대담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두 사람이 함께 칸에 있었던 2004년 실제로 수많은 저널들이 두 사람의 대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뛰었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말뜻은 서로 상대를 만나기 싫다는 것이다...


애초에 하고 싶었던 말.

보통 서로에게 무심하거나 관심 없다라는 것을 넘어서 싫다, 까지 가려면 비슷한 면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혀 겹치는 부분이 없는 사람들끼리는 싫어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무심하게 될 뿐이다. 두 감독의 경우, 모두 삶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부조리함[각주:5], 을 다룬 다는 점에서 두 감독은 대단히 닮아 있다. 

박찬욱의 영화들을 살펴 보면, 영화사에서 기획한 작품에 고용 되어 남북 정상 회담이라는 시대적 조류와 만나 대박을 터트렸던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의 흥행 실패로 인해서 보다 더 흥행에 신경을 썼고 흥행에서도 성공한 [올드보이]와 같은 경우에는 물론 부조리함 뿐 만 아니라 비극적인 요소가 많이 첨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좀 더 자유롭게 만든 영화들, ([달은 해가 꾸는 꿈], [삼인조]는 보지 않아서 언급을 하지 못하겠다) [복수는 나의 것], [심판], [컷], [친절한 금자씨],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경우엔 부조리가 장면장면 그득그득하고 구조 상으로도 부조리극, 으로 분류 될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들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의 모든 작품이 한 마디로 말해서 부조리, 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공통된 냉소적인 정서와 부조리함, 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감독의 차이점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박찬욱 감독의 경우엔 부자연스러운 상황과 부자연스러운 대사와 부자연스러운 공간에서 부조리함을 만들어 내는 반면, 홍상수 감독은 자연스러운[각주:6] 상황과 자연스러운 대사와 자연스러운 공간에서 부조리함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복수는 나의 것]에 등장하는 인물 들, [올드보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하학적 무늬의 벽지, [심판]의 상황 설정, [컷]의 (너무나도 인위적으로 서구적이어서 조금 역겨운) 미장센, [친절한 금자씨]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교실 단체 살인이라는 상황 설정과 금자씨라는 인물, 그리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모든 설정들, 이 그러하다. 또한 그의 영화들에 사용되는 대사들은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들이 아니라 좀 극적인 나머지 때로는 연극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한 마디로 많은 것이 부자연스럽다. 

그에 반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흔히 그의 영화들을 수식하는 '일상적인' 이라는 형용사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단히 일상적인 장면들로 채워져 있고, 별 다른 극적인 상황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한국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상황들을 현미경을 가져다 대고 본 다음 그의 방식대로 재조립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감독의 차이가 형식의 차이로도 이어진다. 박찬욱의 영화들은 보다 더 장르적이고, 대단히 스타일리쉬하고, 영상 자체에서 오는 쾌락을 다루는 것에 매우 능숙하고, 비비 꼬더라도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를 따르면서 극적인 구조를 포기하지는 않는 편이다. 반면 홍상수의 영화들은 뭐라고 딱히 규정할 수도 없고, 화면은 대단히 사실적이며, 영상 자체에서 나오는 쾌락을 다루는 것에도 무심한 편이다. (심지어,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영화 [강원도의 힘] DVD에선 끊임없이 마이크가 등장한다.)

좀 잡스럽게 늘어 놓은 것 같은데, 이 생각들은 예전에 어떤 녀석, 이 나보고 어떻게 박찬욱과 홍상수의 영화를 둘 다 좋아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듣고 꾸준히 생각했던 것들이 뭉쳐져서 나왔다. 지금은 그 때와는 달리 점점 더 홍상수의 영화 들에 좀 더 애착이 간다. 어쨌든, 아무래도 그 두 감독의 신작, 을 보아야지만 이 모든 것들이 좀 더 확실해 질 것 같아 보인다. 


  1. 러시아어다. 키노라고 읽는다. 극장, 영화라는 뜻이다. 물론 95년에 창간 된 영화 잡지[KINO]에서 따온 것이다. [본문으로]
  2. 한국 DVD 시장의 붕괴로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본문으로]
  3. 솔직히 평론가 정성일이 쓴 많은 글들 중에서 현학적이면서 프랑스 철학 서적 번역체로 뒤범벅이 된 글들은 별로 읽을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가끔씩은 너무 홀로 멀리 나아가서 혼자 만의 독백을 하기도 한다. 허나, 난 그가 영화에 대해서 매우 절실하고 치열하고 강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새 영화를 결국은 궁금해서라도 보게 될 것 같다. 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평론가는 김영진.
    [본문으로]
  4. 하지만, 그렇게 찾아 낸 '아버지'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 [하녀]는 대단히 세련된 '서구적인' 공간과 소도구를 통한 미장센을 보여준다. 보고 싶다면 여기, 덧붙이자면, 소위, '상업 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공간과 소도구를 통한 미장센을 잘 다루는 감독은 봉준호고, 소위, '예술 영화' 감독 중에선 홍상수, 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5. 비극과 부조리극은 엄연히 다르다. 예컨데 주인공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아 마침내 모랫 바람이 이는 절벽 위에서 원수를 만나 싸우다 그만 원수의 칼끝에 맞아 장렬히 죽게 되면 그건 비극, 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마침내 모랫 바람이 이는 절벽 위에서 원수를 만나 싸우다가 원수의 칼을 쳐서 떨어 뜨리고 난 뒤 그의 목에 복수의 칼끝을 겨누자, 그 원수가 "사실은, 내가 니 아비다." 라고 말하면서 끝나게 되면 그건 부조리극, 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그렇다고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자연스럽게' 찍는 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 현장 관찰기에 따르면, 홍상수 감독은 배우들이 자존심을 상할 수도 있을 만치, 동작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연출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그의 영화 속 상황들은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그의 의도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소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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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애들

짤막한 거 2009. 4. 18. 13:54

미국 애들이 개인주의, 적이라는 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개인주의, 가 그야 말로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미국 애들이 장착하고 있는 개인주의, 는 적어도 나에겐, 부정적인 모습 보단 긍정적인 모습으로 더 다가 온다. 단지 하나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미국 애들이 개인주의, 적이라고 해서 그 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나라이고, 미국 애들은 그런 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미국이 그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강력한 나라라는 것이 미국 애들의 개인주의, 를 뒷받침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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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어알유프롬?

에세이 2009. 4. 8. 08:23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한 바 BAR 에 앉아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술에 취한 녀석이 옷깃을 스치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하더니만, 내 생김새를 보고 말을 걸어 왔다. "어디서 왔나? 일본인인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녀석과는 생김새가 다른 것이 가장 큰 화젯거리가 되는 거다. "아니, 한국인인데?" 한국에 있으면서 내가 한국인임을 상기시켜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외국에 나오면 내가 자꾸 한국인임을 상기시키게 된다. "그래. 북한은 좀 심각하지?" "응. 북한이 좀 심각하지." 비꼬는 감정을 담아 실어 보냈는데, 잘 전달은 안 됐을것 같다. 

너 '원래'는 어디서 왔니? Where are you 'ORIGINALLY' from? 나는 이 질문을 받아도 별 느낌이 없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양계 미국인'들은 이 질문을 지속적으로 받는 것에 지쳐있을 듯 하다.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 가 내 앞에서 북한에서 미사일 발사를 했다는 '타임'지 기사를 펄럭이며 흔들어 댔다. 그러더니 '김정일'에 대해서 장난스레 묻는다. 내가 '김정일'을 어찌 아나. 그리고 난 '싸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그런데 그 가장 가까운 사람 하나, 에 대해서 내 주변에 이야기 하면 전부 나중엔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러니까, 그 '중국애' 말야,,,' 아무리 대만, 에서 왔다고 말해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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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추어 본 도쿄 관광기

에세이 2009. 4. 7. 15:46

2008년 팔 월, 일본 동경에 오일 간 머물렀다.





내게 자신이 묵고 있던 기숙사 방을 제공해준 친구는 한국에서 논문 심사 준비를 해야 해서 같이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과 달리 난 그 도시에 홀로 머무르게 되었다. 일본의 첫 번째 인상은 친구가 살고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공간들이 구석 구석 낭비 없이 잘 활용 되고 있었다. 화장실의 욕조는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었는데, 그 것 또한 화장실의 공간을 최대한 활용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있었고, 한 개의 수도꼭지로 세면대와 욕조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또한 공중 화장실에는 남성용 소변기 옆 마다 우산 걸이가 장착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디테일'했다. 순간 디자이너들이 일본에 와서 열광하고 간다는 소리가 생각 났다.

동경의 지하철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아니 조용하다는 것을 넘어서 산 골짜기의 선사 마냥 정적이 흘렀다. 샌프란시스코의 버스 안은 곳곳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음악 소리로 난리 법석인데, 동경의 지하철은 정적이 흘렀다. 내 이어폰은 싸구려여서 음악들이 바깥으로 대부분 새어 나왔는데, 그 때 마다 친절한 일본인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소리를 줄여 달라고 요청하고 갔다. 나중엔 지하철에서 음악 듣는 것을 포기 했다. 



시부야에는 사람이 많았다. 담배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피울 수 있었다. 처음엔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만 그 지정된 장소를 찾았다. 나중엔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정말 외로워질 때면 그 장소에 기어 들어 갔다. 한 무리의 사람 들이 잠시 같은 곳에 모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연기를 내뿜다가 다시 제 갈길 가는 느낌이 좋았다. 



메이지 신궁은 일본이 우리 나라와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전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근대화'를 시켰던 메이지 천황과 그 부인의 시체가 썩어 있는 곳이다. 그 곳을 방문하면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스스로 애써 지우자, 하늘 천, 자를 형상화 시킨 간결한 도리이의 미학이 나를 반겼다. 



관광지이지만 휴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은 별로 없었고, 관광지이지만 관광지 특유의 요란하고 상업적인 분위기가 다소 덜했다. 약간의 경건함이 느껴졌고, 그 곳에서 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다. 동전을 함에다가 던져 집어 넣고, 박수를 두 번 딱딱 치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 별 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고, 오랫 동안 눈을 감고 있으려니 눈꺼풀만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참배 방법을 한 녀석에게 배웠다. 그 녀석은 내가 메이지 신궁에 들어 갈 때 부터 내 앞에서 줄곧 혼자 걸어갔다. 머리는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고 샤기 컷을 했고, 허리에는 체크 무늬 웃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시부야를 배회할 법한 녀석이었고, 펑크 락도 좀 좋아 할 것 만 같은 녀석이었다. 그 녀석의 일상에 메이지 신궁이라는 공간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신주꾸로 향했다. 가부키초 1번가. 쾨쾨한 냄새를 벗삼아 보았던 많은 일본 만화들이 그 곳을 무대로 하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왠 흑인이 한국말로 말을 걸어 왔다. 업소 삐끼였다. 아무리 다소 불안하고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관광객의 행색이었다고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느 락 음악 공연이 열리는 곳에 도착 했다. 관객은 대부분이 이십 대 초반의 앳된 여자 애들이었고, 음악이 시작 되자 그 들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한 켠에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 되어 있었다.  

                                     
동경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샌프란시스코에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들은 하나 같이 운동복에 가까운 복장을 하거나 자전거 택배일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복장들을 따라 가고 있는 데 반해 동경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패션에도 신경들을 쓰고 있었다. 동경은 대도시였다. 

셋째 날이 되자 문득 패션에 신경 쓰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젠 체 하느라고, '세계로 간다' 류의 책이 싫어서, 정보가 보다 다양해서, 샌프란시스코 시립 도서관에서 빌린 '론리 플래닛' 영문판을 들고 다녔다. 슬슬 그 책에서 찾은 바 Bar 몇 군데를 들리기 시작했다. 맥주 값은 턱없이, 너무나 턱없이 비쌌다. 비싼 맥주를 먹고 나와 충동적으로 길거리에 놓여져 있는 자전거 몇 개를 잡아 당겼다. 세 번째 자전거는 중심이 약간 어긋나 있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넷째 날부턴 그 자전거를 타고 동경 시내를 돌아 다녔다. 마치 내가 이 곳에 오랫 동안 살아 왔던 사람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런 착각 속에 길을 잃었다. 그리고 펼쳐지는 서민적 풍경들. 그런데 그 서민적 풍경들이 구질구질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그 곳에서 외국인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 서민적 풍경들 마저도 나에겐 이국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여행의 해악이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며칠 간 어딘 가에 머문다. 원래 들었던 풍문과, 보았던 영화와 사진들과 만화들이 여행의 들뜬 마음과 결합해서 현지에 대한 판타지를 마구마구 생산한다. 

어쨌든 정말로 멋진 바 Bar 하나를 발견해서 이틀 연속으로 갔다. 이름은 4, 일본어 발음으로 시-. 첫 번째 날엔 머리 색깔만 검고 이외수를 닮은 주인 홀로 있었다. 시부야역 바로 옆에 위치한, 기찻길 옆 바 Bar는 전철이 지나갈 때 마다 조금씩 떨었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로 조금씩 더 떨었다. 주인에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 보자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디제잉에 열중했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틀어 주는 바였다. 오 미터 길이의 나무로 된 바와 조그만 나무 테이블이 네 개, 조금 커다란 단체 손님용 테이블에 하나 있는 바였다. 주인이 손수 서빙을 하고 손수 음악을 섞었다. 두 번째 날엔 프랑스계 일본인 여자 바텐더가 있었고 여자 한 명이 바에 앉아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바 안으로 들어 갔다. 



                                        
그녀 옆의 옆 자리에 앉았다. 맥주를 시키고, 먼저 바텐더에게 말을 건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여자 손님 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눈썹이 가늘었던 그녀는 화장기가 전연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치 허연 가부키 분장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평범한 오-에르, O.L, Office Lady, - 사무직에 종사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 - 라고 소개한 그녀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샌프란시스코에 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첫 대화는 쉽게 풀려 나갔다. 그리고 난 그녀 바로 옆 자리로 옮겨 갔다. 

그녀는 힙-홉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힙-합 아닌가요? 힙-홉, 홉, 홉. 끝내 힙-합을 힙-홉으로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그녀가 순간 귀여워 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내가 머리 속에 품고 있었던 귀여운 일본 여자, 라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딱 맞은 얼굴 이었다. 

난 일본식 서민 술집에 가서 꼬치 구이 냄새를 맡으면서 사케를 마시고 싶었지만, 멍청하게도 난 그 전에 그녀에게 나이를 물어 보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녀는 삼십 대 중반이었고, -얼굴은 분명 이십 대 중반인데- 애가 있는 이혼녀였다. 그래, 큰 상관은 없었지만,,, 조금 있으니 그녀에게 전화가 왔고, 그 전화는 집에서 애를 대신 봐주고 있는 자기 어머니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뒤에 내가 먼저 일어 났는지, 그녀가 먼저 일어 났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이름은 까먹은지 오래다. 단지 힙-홉, 홉, 홉, 을 힙-합으로 발음 하려고 노력하다가 관두었던 때의 귀여운 표정만이 생생하다. 

내심 마지막으로 생각해 두었던 어느 곳으로 향했다. 파티도 하고 분위기도 왁자하고 소위 '인터내셔널'들이 많이 들락거린다는 곳이었다. 들어가자 백인 남자 바텐더가 나를 반겼다. 사람들 중 십 중 팔구는 서구인이었다. 바텐더는 나에게 어떤 질문을 했는데, 나는 젠 체 하느라고 나는 여행자요, I'm a traveler - 끽해야 동경 밤거리 방황하는 주제에 - 라고 말했다. 녀석은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 발음은 그에게 troubler로 들렸다. 자전거를 하나 훔쳤으니 troubler 일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I'm a stranger, 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보다. 어쨌든 그 담에 날 반긴 건,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살았다고 하니 과도한 반가움을 표시하던, 자신을 캘리(포니아) 걸 Cali-girl 이라고 소개하던 바텐더였고, 나는 비싼 맥주를 몇 잔 또 주문하고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들을 자리를 옮겨 다니며 나누기 시작했다. 

영어로 대화를 나눌 땐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에 대한 강박이 스스로에게 조금 줄어 든다. 익숙치 않은 외국어라서 그럴 것이다. 

마지막 날이 마침 [인간 실격]을 쓴 다자이 오사무의 생일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묘는 동경 근처에 있었다. [인간 실격]은 지금까지 읽었던 중에 가장 강렬하게 읽었던 책 중의 하나다. 그 책은 내 속에 쇠꼬챙이를 쑤셔 넣고 휘젓는 듯한 충격을 주었고, 나는 십년 쯤 늦게 그 책을 발견하고, 읽은 것에 대해 분노 했다. 

누군가가 프랑스에 여행 갔을 때 고흐 무덤에 찾아가서 자신이 쓴 편지를 그 무덤 위에 올려 놓고 눈물기가 가시지 않은 촉촉한 자신의 눈을 담은 플라로이드 사진을 보여 준 일이 있었다. 나도 다자이 오사무의 묘에 가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지 않았다. 먼저 이미 누가 한 일을 내가 그대로 따라 하기 싫다는 유치한 어린 아이의 본능이 발동했다. (그 누군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고흐를 좋아하고, 하루끼를 좋아해서 한 때 고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쨌든 내가 좋으면 된거지, 라고 생각하면서 고민을 그쳤다고 했다. 여자라 그런지, 나보다 더 성숙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미 [인간 실격]에 대한 기억이 좀 가물가물 했다. [인간 실격]을 읽었던 기억은 십 대에 책을 접하고, 반복해서 읽고, 의지하고, 위로 받고, 그런 종류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 책에 매혹 되었던 기간은 강렬했지만 짧았고, 다시 또 다른 책과 또다른 영화와 또 다른, 또 다른 무엇에 매혹 되어 있었다. 

근데 실은, 무엇 보다 귀찮았던 거다. 굳이 그 먼길을 찾아가서 자살해 버린 일본인 묘 앞에 서기가 싫었던 거다. 그리고, 그때 엉뚱하게도 왜 김승옥은 그런 글들을 써제꼈으면서 80년 광주 이후에 충격을 받고 재미없게시리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버린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각주:1] 

샌프란시스코로 돌아 와서 동경을 배경으로 한 영화, [Lost in Translation]을 보았다. AIR의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화면도 예쁘고, 빌 머레이의 감정 없는 얼굴 표정도 맘에 들고, 스칼렛 요한슨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는데, 문득 영화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어떤 일본인(아시아인)에 대한 비하적인 시선이 느껴져서 끝까지 보지 못했다.

이하 사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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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생각이 엉뚱한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 [르네상스인 김승옥] 에서 확인 한 바, 김승옥의 연표에 따르면 1960년, 그러니까 그가 20세 때, 4.19 이후 일본문화 개방정책으로 출판된 일본의 전후소설을 읽고 "일본 작가들의 허무주의에 입각한 탐미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다자이 오사무에게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사실은 대학생 때부터 소설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는 그때 번역되기 시작하는 일본 소설을 읽고 받은 충격이랄까 자극 때문이었어요... 내가 과거에 막연하게 헤르만 헤세 읽고 앙드레 지드 읽고 하면서 서양 문학에서 받았던 느낌과는 다르게 훨씬 실감나고 피부로 느껴지더라고요. 아, 소설이란 이런 것이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렇게 아프고 절실하게 쓸 수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느낌을 충격적으로 받았죠." 라고 말하고 있다. 참조, [르네상스인 김승옥] 65쪽. (2009/04/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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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에세이 2009. 4. 4. 14:24

그를 어어부 밴드, 니 뭐니 하면서 잠깐 잠깐 접한 적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마도 황신혜 밴드, 하고 좀 헷갈렸고, 난 저런 풍의 밴드 이름에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에 아예 음악을 찾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홍대를 기반으로 뻘소리가 들어 있지 않는 음악 평론을 쓰는 분, 의 글을 접하고는 백현진, 의 음악을 들어 볼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주문한 앨범을 뜯고 나서 음악을 쭈욱 듣고 나니 이 백현진이라는 사람의 음악은 규정 지을 수 없다, 어떤 카테고리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느꼈다. 날 것. 적나라함. 이런 표현이 이 앨범에 가장 잘 어울린다. 가사로 말할 것 같으면 시적이면서도 서사적임과 동시에 사회성까지 두루 갖추었으며, 멜로디와 연주 또한 범상하진 않다. (물론, 어어부 밴드에 비해서는 많이 약해 진 것이라고들 한다.) 무엇보다 백현진의 창법. 죽여 준다.

규정지을 수 없음, 과 창법에서 언뜻 톰 웨이츠 Tom Waits , 와도 닮아 있다는 생각도 났다. 하지만, 톰 웨이츠의 음악이 철저하게 미국의 이야기가 담긴, 미국적인 음악이라면, 백현진의 음악은 진짜 한국적인 냄새가 흠씬 풍기는 음악이다. 무엇보다 한국, 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물경 그 것들이 서울, 의 어느 지역, 에 한한 이야기라고 할 지라도. 결국 백현진,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친숙한 지역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니깐.

아무튼, 음악에서 순대국맛, 도 나고 옛날 떡볶이 맛, 도 난다. 그러면서도 촌스럽거나 싼티나지 않는다. 

앨범에는 박찬욱, 김지운,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추천사 들이 있다. 하지만, 박찬욱, 김지운 감독의 영화 보다는 김기덕, 이창동,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좀 더 어울린다. 또한 유튜브에 내가 이 앨범을 사게 만든 결정적인 뮤직 비디오, [학수 고대했던 날]이 있다. 백현진 본인, 이 출연 했으며, 캠코더로 대충 찍은 듯 하지만 역시 범상치 않은 뮤직 비디오다. 

한 가지 더, 앨범 [반성의 시간] 에는 총 열 두 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두 곡에 외국인이 등장한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 '북미인/앵글로색슨인' 이다. 한 명은 캐나다 남성 배낭 여행객이고, 다른 한 명은 미국 남성 주둔 군인이다. (또한 둘 다 '백인'인 듯 하다) 각각 한국 남성과, 한국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것으로 표현 된다. 열 두 곡 중 두 곡, 1/6, 꽤 적지 않은 비율이다. (2008/09/04)


덧. 백현진의 노래를 다시금 들으니, 이번엔 당구장에서 '사구'를 치다가 시켜 먹는 짱깨맛이 나는 구나. 당구장에서 '사구'를 치다가 시켜 먹는 짱깨맛, 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제는 흘러간 구십 년대의 풍경/취향, 일지도. 그 것들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예전 한국 영화 [품행제로]가 팔십 년대를 형상화 했던 것 처럼, 내 십대를 규정한 구십 년대를 형상화 하는 영화가 나오겠지. 누군가가 슬슬 지금 부터 기획해서 수년 뒤에 시기를 잘 맞춰 개봉하면 잘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2009/01/09)

덧덧. 백현진의 [반성의 시간]에 대한 또 다른 좋은 글.

덧덧덧. 사분 오십 오초 부근 부터 그가 눈이 빠지도록,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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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추어 본 촛불 시위 관광기

에세이 2009. 3. 29. 03:00

하나,

대한민국 제17대 대통의 당선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그 동안 간헐적으로 드러났던 '시대 정신'이 구체적인 실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등장한 모습에 몸서리 쳤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정책이고 뭐고 간에 그냥 저 한 사람, 저 대표자, 가 싫다는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한국 땅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선거 과정, 당선, 그 이후에 전개된 별의 별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미국 땅의 현실에 좀 더 신경을 쓰기로 마음 먹게 한 계기도 되었다. 앞으론 저 현실, 에 몸을 담그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 까, 하는 몽상을 하면서. 어차피, 2007년 팔월 말에 미국에 건너 오면서 몇몇 이들에게, 농담 삼아, '누군가,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미국 간다.' 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미국 '광우병' 쇠고기 수입 파문과 촛불 시위 소식, 을 전해 들은 것은 것은 2008년 오월 쯤이었던 것 같다. 그 파문, 을 접하면서 다소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나는 미국 쇠고기를 아주, 잘,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쇠고기가 한국에 수입되는 것에 대해 특별히 내가 발언할 이유가 없었다. '광우병' 쇠고기, 라는 수식어는 과장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 위험을 과장하고 있는 듯한 각종 선전물들이 거슬렸다. 미국 쇠고기가 그 미국 내 검역 기준 그대로 수입 된다면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농촌의 피폐함과 농민에 대한 걱정? 글쎄다. 아무튼 지금까지도 아직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오히려 주목했던 것은 그 이야기, 를 처음 한 어느 유학생 녀석이 그간 난 대통령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 이 없었는데 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을 때였다. 그 녀석과 쇠고기를 사다가 구워먹은 적이 있었고, 문득 그 왠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표현에서 예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생각났다. 

2008년 유 월 초, 대략 십 개월 만에 한국땅을 밟았다. 때맞춰서 촛불 시위가 좀 더 격렬해져 있었다. 나는 그 촛불 시위에 가고 싶었다. 가서 보고 싶었고, 가서 느껴 보고 싶었고, 가서 동참, 하고 싶었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대한 내 혐오감, 과 내 반대 의식을 가서 표출 하고 싶었다. 내 개인과는 특별히 관계가 없어 보이는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라는 이유, 는 아무래도 좋았다. 보다 더 적합한 구호나 이유가 있었더라면 나는 더욱 더 좋아했겠지만. 


두울,

촛불 시위에는 나와 내 친구 두 명이 함께 했다. 우리의 그 촛불 시위 참가, 가 관광, 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했다. 우리는 오랜 만에 만난 기념으로 홍대에서 술을 먹었다. 촛불 시위, 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광화문, 으로 향했다. 싸우러 간다거나, 비장한 각오, 이런 것은 없었다. 솔직히 나와 내 친구 두 명을 이끈 가장 강한 동인은 호기심,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내 분노, 를 과연 이 촛불 시위, 를 통해서 표출 할 수 있기는 할까, 를 고민했다. 

시청 역에 내리니 가장 먼저 나를 반겼던 풍경은 아스팔트 포장 도로 곳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잡상인' 들이었다. 종로 거리에 죽 늘어선 갖가지 길거리 음식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어쩌면 그 촛불 시위, 의 숭고함, 을 저 '잡상인'들이 망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내겐 그 잡상인, 들을 비난할 권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각주:1]

광화문 사거리에 가까이 갈 수록 열기가 느껴졌다. 함성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앞으로 앞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가서 마침내 이순신 장군 동산 밑에 전경 버스가 일렬 횡대로 앞 길을 탁 가로 막고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곳에 이르자, 문득 밤하늘이 붉게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일렬로 늘어선 전경 버스는 왠지 이 모든 거대한 부조리, 를 상징하는 것 처럼 느껴졌다. 전경 버스 위에는 젼경 들이 마치 개미떼 처럼 포진해 있었다. 머리 속은 하얘지고,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나를 휘감았다. 저걸 뚫어야 한다. 저걸 뚫고 지나가서 청와대로 가야 한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왠지 청와대로 진격해서 그 대표자, 를 끌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이 들기 시작했다. 




깃발 들이 나부꼈고, 마이크에서는 열렬한 구호가 터져 나왔다. 다들 흥분해 있었고, 나 또한 흥분했다. 좀 더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싶어서 우회 했다. 일행 들과 삼청동 쪽으로 향했다. 교보문고 앞을 지나 우회하는 길은 좀 더 다른 풍경 이었다. 소위, 문화 시위, 답게 어느 인디 락 밴드의 공연이 한 켠에선 한창 이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종각역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안주와 맥주 캔이 눈에 띄었다. 서울 한강 고수 부지의 휴일, 같았다. 

삼청동으로 항하는 길에 군복을 차려 입은 예비역, 들의 무리가 눈에 띄었다. 군대에서 배운 대로 이열 종대로 열을 맞추어 행진, 하고 있었고, 그 오른 쪽 옆에는 소대장 역할을 맡고 있어 보이는 어느 해병 예비역, 이 인솔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친구 녀석이 장난 삼아 그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말없이 따라 갔다. 반대편에서 걸어 오던 한 무리 중에서 어떤 여자 분께서 "군인 아저씨들, 수고 하시네요. ^^" 라고 말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환호를 보냈다. 군대 생활이 조금이나마 보상, 을 받는 순간이었다. 조금 더 길을 가는데 어느 외국인 남성, 이 어느 한국인 여성, 에게 뭔가 영어, 로 말을 걸고 있었다. 이열 종대 속의 한 녀석이 그 외국인 남성, 에게 잠시 눈길을 주자, 그 소대장 역할을 맡고 있던 녀석이 그 녀석에게 타박을 주었다. "야, 뭐 들으면 뭔 소린지 아나?" 

삼청동 앞의 상황은 이순신 장군 동상 밑과는 달리 좀 더 격렬했다. 시위대와 전경 사이의 간극은 좀 더 좁았기 때문이었다. 격렬한 욕설이 오갔다. 전경 버스의 철망을 뜯어내려는 움직임이 한창이었다. 한 시위자는 전경 부대의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과 계속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니, 왜 못 지나가게 하는 거예요?" "좀 지나가자구요." "말을 안 들으니깐, 청와대 앞에 가서 얘기를 좀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세엣,

다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향했다. 이 곳도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더 격렬해져 있었다. 문득 홍대 입구를 배회할 만한 옷차림을 한 몇몇이 눈에 들어 왔다. 녀석들은 정확히 내가 한 때 생각했던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프랑스 68혁명 때는 말이야.."

어디 선가 밧줄이 등장했다. 그 밧줄은 전경 버스에 묶였고 사람들은 그 밧줄에 매달렸다. 나 또한 그 밧줄에 매달렸다. 그리고 밧줄을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전경 버스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뚫리는 건가. 우회하면서 본 바로는 일렬 횡대로 늘어선 전경 버스 뒤에는 다른 전경 버스들이 늘어 서 있었고, 더 많은 숫자의 전경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 밧줄을 잡아 당겨서 저 일차 벽을 무너 뜨리는 거다. 그러는 거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경 버스가 조금씩 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경 버스는 마치 연환계에 걸린 위나라 조조의 선단 처럼 굳게 서로서로 연결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힘들어 보였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더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울부짓기 시작했다. 때맞춰 노숙자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전경 버스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와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침내 버스 위로 올라간 그 아저씨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몇 박자 지나지 않아서, 전경 들에 의해서 그는 버스 밑으로 끌려 내려 갔다. 

생각을 좀 해보기 시작했다. 결국 이 촛불 시위의 궁극의 목적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탄핵, 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라는 이유보다 나에겐 그 이유, 목적이 훨씬 더 설득력 있었고, 훨씬 더 와닿았다. 그때 스친 생각은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내 스스로 그런 결론이 나자, 저 마이크를 잠시 빌려서 사람들를 선동하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네엣, 

조금 씩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지쳐갔다. 문득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좀 휑하게 느껴질 무렵, 친구 녀석이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기분이 슬슬 나빠지고 있다면서. 기분이 슬슬 나빠지고 있다면서. 이대로 여기 계속 있다면, 결론은 이미 인터넷 방송, 들을 통해서 본 것 처럼 날이 밝게 되면 전경 들은 이제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몇 몇 사람들은 연행 되고 시위대는 뿔뿔히 흩어지게 될 예정이었다. 그 때 까지 버틸 여력이, 그리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종각역에서 택시를 잡았는데, 우리 보고 촛불 시위에 참가 했다 오는 길이냐고 묻더니만, 자기는 촛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태우지 않는다며 그냥 가버렸다. 겨우겨우 택시를 잡고 친구 집으로 향해 주린 배를 채우고 술을 좀 더 먹은 다음 잠을 청했다. 

이상이다. 


덧.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은 쿠데타, 나 체육관 선거, 를 통해서 권좌에 오른 것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투표자 중 49%의 지지를 업고 당선이 되었다. 실은 이 사실이 가장 끔찍하다. 그리고 그를 당선 시켰던 '문화적인' 환경, 은 아직도 크게 변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1.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사, 라는 것을 친구와 해 보았다. 나와 그 친구는 정든 서울, 을 떠나 멀리 지방, 으로 '유학'을 가 이제 바햐으로 산과 바다를 벗삼을 예정이었다.

    그 친구의 장사 아이디어, 는 대학 졸업식 시즌에 맞춰서 졸업식장을 돌아다니면서 셀룰로이드 필름을 팔자는 거였다. 충무로에서 필름을 싸게 도매가에 살 수 있는 곳도 이미 알아 놓았다는 말도 했다. 나보곤 자본금만 좀 투자하면 된다고 말했다. 녀석이 나를 꼬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 우리는 지방, 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울, 여자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여자들을 앞으로 만나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대충 그 여자들이 다니는 대학들과 그 주변 환경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는 것은 꽤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연대 독수리 빌딩, 하면 아, 거기요, 하면서 아는 척을 한다든지 말이다. 왠지 몰라도 당시 내겐 꽤 설득력이 있게 들렸다.

    그리하여 우리, 는 일 월 과 이 월 대략 이 개월에 걸쳐서 대학 졸업식장 들을 배회하면서 기념 사진을 기필코 찍어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상가 이상으로 필름을 팔면서 폭리를 취했다. 곳곳에서 필름, 과 각종 먹을 거리, 를 파는 사람들에 섞여 우리도 필름, 깃발을 높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숭고한 졸업식장, 을 개판 오분 전 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를 했다.

    그렇게 해서 구경하게 되었던 소위, 대학가, 라는 곳은 참으로 놀라운 곳이었다. 내가 살았던 강남역, 부근이야 어차피 유흥가, 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가, 주변에 서점이 즐비 하다던지, 고즈넉하다든지,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마구마구 샘 솟는다든지, 하는 내 환상은 정말이지 순진무구한 착각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어떤 여대, 옆 풍경이 가장 놀라웠는데, 그 곳은 모델 학원, 성형 외과, 코스메틱, 옷 가게, 화장품 가게, 로 즐비했다.

    물론 맘에 드는 대학가, 도 있긴 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쏠쏠한 수익을 남겼던 장사, 경험을 기억 하면서, 나는 그 이후로 대략 반경 오 킬로미터 이내에 논과 밭과 산과 바다 밖에 없었던 내가 다녔던 대학을 좀 더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 그리고 요즘은 다들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니까 더 이상 필름, 깃발이 졸업식장, 을 어지럽히는 일은 없을 듯 하다. [본문으로]
:

다자이 오사무 太宰治

인용과 링크 2009. 3. 28. 16:04

"창작에서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은 정확을 기하는 일이다. 그 뿐 이다. 풍차가 악마로 보이거든 주저말고 악마로 묘사해야 한다. 풍차가 풍차 이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때에는 그대로 풍차를 묘사하는 것이 좋다. 실은 풍차가 풍차로 보이지만,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으면 예술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뻔한 궁리를 이리저리 하여 낭만적임을 자처하는 멍청한 작가도 있다. 그런 자는 평생 가도 무엇 하나 포착하지 못한다."

[나의 소소한 일상] 中.


생활

만족스런 일을 끝내고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차 거품에
아름다운 내 얼굴이
수도 없이 
비춰져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

[잎]  中.


:

감정의 과잉

짤막한 거 2009. 3. 27. 18:02

'일반적인 한국 영화'를 보면서 가장 싫었던 것은 바로 감정의 과잉이다. 영사막에 감정의 과잉이 넘쳐 날 수록 관객인 나는 영사막에서 소외된다. 감정의 과잉이 있는 영화들은 하나 같이 배우 지들 끼리 공감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추측하건데, 영화 촬영 현장에선 현장 사람들끼리 역시 공감하고 넘어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들끼리 공감을 하고 넘어갈 수록 대체로 관객은 공감을 하기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연장해서 생각해 보면, 소설이든, 칼럼이든, 에세이든, 주장이든, 논평이든 간에, 글에서 감정의 과잉이 있을 수록 읽는 이인 나는 오히려 더더욱 차가워 진다. 영화이든, 글이든, 그 속에 넘쳐나는 감정의 과잉이 보는 이, 읽는 이, 인 나의 감정의 과잉을 보장해 주진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 언뜻 무덤덤한 듯 하지만 나를 감정적으로 뒤 흔드는 그런 걸 보고,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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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X소리

짤막한 거 2009. 3. 26. 09:05
하나,

놈들, 은 어쨌든 지금 껏 이겨온 놈들이다. 깨끗하건 더럽건 그 동안 게임의 규칙이 엉망이었건 어쨌든 간에 이겨왔기 때문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거다. 그래서 놈들, 과 싸우게 되면 더욱 더 철저하게 전략적인 측면을 고민해야 한다. 더 똑똑 해져야 한다. 한데 정말로 궁금한 것은, 전략을 고민하게 되면서 놈들, 을 닮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물음이다.


두울,

민간 의료 보험 제도를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돈,돈,돈 한다. 그 돈,돈,돈은 만약 자기가 뭔가를 하고 싶어 한다면, 그에 따르는 비용을 (그리고 시간을) 항상 계산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꿈, 을 말할 때 돈,돈,돈을 까먹어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다 더 현실적, 이다. 여기서 현실적, 이라는 말은 시민권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서 한인 교회를 순례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참, 현실적, 이군, 이라는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말과는 달리 구체적, 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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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관련된 두 가지 X소리

짤막한 거 2009. 3. 25. 15:00

하나,

경험은 오감에 의존한다. 오감은 눈, 코, 귀, 입, 손(으로 상징되는 촉각) 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경험이 모든 오감을 모두 사용하면서 기억으로 머리 속에 저장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은 오감 중에 일부분만 사용하는 경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눈, 귀, 이렇게 이감에 의존한다. 꿈은 눈, 이렇게 일감에 의존한다. 이렇게 감각들을 통해 들어와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소위 기억, 이라는 것들은 혹시 실제로 경험한 것, 영화에서 보고 들은 것, 꿈에서 본 것, 이 뒤죽박죽 제 멋대로 뒤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다시 뒤죽박죽 제 멋대로 뒤섞여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두울,

기독교에서는 죽은 뒤에 심판이 있다고 말한다. 성경의 어느 구절인가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어구가 있다, 고 기억한다. 예전에 문득 그 심판이라는 것이 있다면, 대체 어떤 방식일까, 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 간다.'라는 표현에서 영감을 얻은 내 상상은 이러 했다. 죽은 뒤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은 영화관이다. 의자는 달랑 하나. 그리고 영사막. 영사막에서 영사 되는 것은 그 동안 살아온 내 인생이다. 태어 난 이후 부터 죽기까지의 내 인생. 그 기간이 몇 년이 되었든 간에 하여간 처음 부터 끝 까지 주욱 지켜 보는 것이다. 내 생각엔 그 보다 더 가혹한 심판은 없을 것 같았다. 혹은 내가 그러한 심판을 원하고 있는지도.


덧. 쓰고 보니 정말 X소리다. 어느 정도로 X소리냐면, 딱 블로그에 써서 발행할 정도의 X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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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sense, Ple-ee-ase

구라 2009. 3. 25. 14:30

A short conversation among Americans.

A: Blah blah blah blah blah blah. Does it make sense?
B: What's your point?
A: I mean, blah blah blah blah blah blah. Does it make sense?
B: I still don't get it. what's your point?
A: What's your point?
B: It doesn't make sense.
A: That doesn't make sense ei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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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한국 음식점 기획안

구라 2009. 3. 24. 15:06

미국 내 한국 음식점의 문제점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제대로 '현지화' 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미국 내 한국 음식점에 드나 드는 손님들은 한국인들이 대부분 입니다. (이를테면 원더걸즈의 Tell Me 열풍이 한국에 불었을 때는 한국 음식점에서 밥을 먹으면서 텔미 텔미 테테레테테 텔 미, 를 들어야 한다, 이 말씀입니다.) 음식 또한 너무나 한국적이라서 중국 음식, 베트남 음식, 타이 음식, 일본 음식 처럼 제대로 미국화 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미국 내에서 한국 음식의 '지위'는 우리가 우습게 여기는 '동남아' 에도 못 미칩니다.

두 번째로는 메뉴가 너무 다양하다 보니까 '한국 음식'하면 떠오르는 그 무언가 - 전문 용어로는 '브랜드'라고 하죠. -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 불고기요? 그러니까 코리안 바베큐, 말씀이신가요? 잉글리쉬 잖아요. 딤섬 Dim Sum , 이나 스시 Sushi, 처럼 그 원래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제대로 '브랜드'화 된 것이라 볼 수 있죠. 아, 김치요? 물론 김치는 한국 고유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영어로도 Kimchi 라고 하지요. 하지만 어디 가서 김치 한 사발 주세요, 라고 주문하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어디까지나 김치는 반찬, Side Dish 일 따름입니다.

세 번째로는 고급화 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중국 음식 같은 경우에는 다소 싸구려 음식으로 치부되는 경향도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고급스러운 차이니즈 레스토랑, 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중국 음식은 '짱깨집'과 '차이니즈 레스토랑'으로 양분되어 있지요.) 이건 베트남, 타이 음식도 마찬 가지 입니다. 일본 음식이요? 이것 보세요. 백인들이 그러는데요. 일본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은 고급스럽고 정갈한 것들이래요. 예외란 없어요. 

자, 이렇게 문제점이 파악 되었으니 이제 해결 방안을 모색해 봅시다. 문제파악(Problem)-문제해결(Solution). (벌써 제가 말하는 품새에서 미국 실용주의 Pragmatism의 내음이 물씬 풍겨오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 음식의 '현지화'를 위해서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대상이 되는 고객입니다.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인종의 전시장, 문화의 용광로, 니 어쩌니 하는 말이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미국은 이 백여 년 전 즈음에 백인들이 세운, 백인 들의 나라, 인 것입니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백인이지요. 물론 이후 아프리카에서 엄하게 흑인 들을 끌어와서 이후 그 들은 농장에서는 노예로, 공장에서는 노동자로 일했고, 이어서 히스패닉인들이 이 나라에 들어 와서 갖가지 일들을 했고, 대락 백 오십 년 전 부터는 중국인을 위시로 아시아인들이 미국에 들어 와서 험한 세상에 다리도 놓고 철도도 만들었고 사탕수수도 재배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 이라는 나라의 '아이디어'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원래 예로부터, 노동, 보다는 생각, 을 높게 쳐주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진리인 것 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소개할 한국 음식점의 주 고객은 백인입니다. 

아, 백인에도 두 가지 종류의 백인이 있습니다. 그 음식점에서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미국 산 자동차가 아직도 세계에서 최고인 줄 알고 있다거나 혹은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 Bible Belt' 지방에 살면서 '창조론', 혹은 '지적 설계론'을 과학 교과서에 집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백인들이 아니라, 민주당을 지지하며 버락 오바마를 당선 시킨 다음 미국이 전 세계에 팔고 있는 잘 포장 된 수출품, '자유'와 '민주주의' 가 살아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곤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잘 교육받고-진보적이며-도심지에 사는-백인들 Well-educated liberal urban white folks 을 주 고객 대상으로 합니다. 아무래도 이 두 번째 백인들은 '문화적 다양성' 이라는 가치를 '다양한 음식점'을 순례하는 것으로 실현하고, '젠 ZEN'으로 대충 뭉뚱그릴 수 있는 '동양 종교/문화'에 일정한 호기심을 보이는 둥, (동양인, 이 아닙니다) 앞으로 소개할 한국 음식점의 잠재 고객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한국 음식점의 개요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새로운' 한국 음식점의 이름은 '음(陰)과 양(陽)' , 영어로는 'Yin and Yang'  이라 합니다. 주로 도가 사상 Taoism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음양사상, 만물의 조화를 뜻하는 음양사상은, 'Yin and Yang' 이라는 어구가 미국 어느 지역 신문에서 '형용사'로 이용될 정도로 미국 내에서 알게 모르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 쯤에서 중국에서 시작되고 발전 된 음양사상, 과 도교, 가 어떻게 한국 음식점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있느냐, 라는 의구심을 품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음과 양, 혹은 도교 Taoism의 상징은, 




그리고 대한민국을 상징 하는 국기, 태극기는, 


이므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음식점 간판의 맨 왼쪽에 최대한 '미니멀'하게 'YIN & YANG' 을, 그리고 그 오른 쪽 옆에는 '태극 마크'를 삽입하면 좋을 듯 합니다. 다만 태극 마크의 색상이 빨강, 파랑, 의 원색이므로 촌스럽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군요. 간판의 맨 오른 쪽에는 음식의 '컨셉'을 설명하는 문구가 들어가야 하겠지요. 

'음과 양 YIN & YANG' 의 음식 '컨셉'은 다음과 같습니다. Organic-Authentic-Vegetarian Korean Food Restaurant.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의 세 단어 입니다. 

Organic(유기농). 
특히 백인 여자들에게 신선한 오르르가닉, 한 음식을 먹는 것은 오르르가즘, 이나 진배 없습니다. 

Authentic(진짜의/진정한)  
스시 Sushi 의 본 고장인 일본에는 정작 '캘리포니아 롤'이 없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메리카, 에는 진짜, 가 아닌 것들이 넘쳐 납니다. 따라서 '잘 교육 받은' 아메리칸, 들은 진짜(로 여겨지는 것)들에게는 무지하게 열광을 보냅니다. 

Vegetarian(채식주의자) 
이건 따로 언급하진 않겠습니다. 

그럼, 대체 이 음식점에서는 '음과 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어떤 음식을 파느냐, 하면 말입니다. 간단합니다.

음, 의 음식으로 '차가운 물냉면'을 취급합니다. 종류를 다양하게 하여 최소한 여섯 가짓 수 이상은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양, 의 음식으로 '뜨거운 돌솥 비빔밥'을 취급합니다. 안에 들어가는 야채는 최대한 손님의 선택에 맡깁니다.

'음과 양 YIN & YANG' 에서는 간결하고도 알기 쉽고 음양, 의 조화를 느낄 수 있도록 딱 저 두 가지 종류의 음식만 취급합니다. 절대로 여느 미국 내 한국 음식점 처럼 이것저것 취급하지 않습니다. 음료는 '식혜'와 '수정과'. 딱 이렇게 두 종류를 취급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식혜'는 '백색'이고 '수정과'는 '흑색', 에 가깝기 때문이죠. '음과 양 YIN & YANG' 에서는 모든 것은 음과 양의 조화로 이루어집니다. 

내부 인테리어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바는 없으나 전체적으로 '흑'과 '백'의 '바둑알'과 '바둑판'의 '컨셉'을 잘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예컨데 테이블을 '바둑판' 모양으로 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아예 '홀'에서 일하는 '웨이터/웨이트리스'도 알맞은 비율로 '남'과 '여', '흑인'과 '백인'을 섞어 역시 '음과 양'의 조화를 느낄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예전에 어떤 의류 회사 광고가 그랬던 것 처럼 말이죠.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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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에세이 2009. 3. 17. 08:02

무라카미 하루키.

1989년에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는 어떤 면에서 한국의 구십 년대 식, 을 정의한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불었던 하루키 열풍에서 나는 한 발 비껴 나가 있었다. 당시 [상실의 시대]를 한 번 슥 읽어 보았는데 반 쯤 읽다가 덮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2005년에서 2006년 사이, 하루키를 너무나도 좋아하던, 어떤 이, 의 영향으로 다시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고, 꽤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쳐 [해변의 카프카]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남은 문제라면, 그 두 권의 책 내용이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스를 타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하루키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예외 없이 전부 여자였다. 내가 주로 여자, 들을 관찰해서 인지, 아니면 여자, 들이 하루키를 남자들에 비해서 좀 더 좋아하기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예전에 잠깐 몸 담았던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 안내일을 하고 있는 여자에게 학생증을 제시하고 있노라니 마침 그 여자가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었는데, 나도 그 책을 읽었노라며 척, 을 했더니 한국에서도 하루키가 번역이 되었냐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새삼스럽게 하루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한 달 전에 하루끼가 '예루살렘상' 을 받은 것을 언급하고 싶어서다. '예루살렘상'은 이스라엘에서 2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북페어'의 실행 위원회가 개인의 자유와 존엄 등을 테마로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게 주는 상, 이라고 한다. 2008년 12월 27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침공했고, 위키 백과에 따르면, 2009년 1월 7일 까지 12일 동안 이스라엘인은 총 13명 사망, 523명 부상. 팔레스타인인은 총 1380명이 사망하고 5380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일본에 있는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체는 이스라엘의 침공을 문제 삼고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그 상을 거부해 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팔레스타인 포럼'이라는 단체로부터 그런 공개 서한을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궁금했다. 다들 알 다시피, 결국, 하루키는 그 상을 받는 것을 선택했다. 이제, 하루키가 과연 예루살렘에 날아 가서 상을 받으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 보았다. 가디언지에 따르면, 그리고 그가 한 말을 뽑아 대강 내 식대로 번역을 해 보자면,

"When I was asked to accept this award I was warned from coming here because of the fighting in Gaza. I asked myself: Is visiting Israel the proper thing to do? Will I be supporting one side?" the Jerusalem Post quoted him as saying. "I gave it some thought. And I decided to come. Like most novelists, I like to do exactly the opposite of what I'm told. It's in my nature as a novelist. Novelists can't trust anything they haven't seen with their own eyes or touched with their own hands. So I chose to see. I chose to speak here rather than say nothing."

"내가 이 상을 받아 들일 것을 요청 받았을 때, 가자 지구에서의 '전쟁' 때문에 이 곳에 오는 것을 경고 받았다.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것이 적당한 건가? 한 쪽 편을 들게 되는 건 아닐까? ... 몇 가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다른 대부분의 소설가들처럼, 나는 내가 말한 것의 정확히 반대 쪽에 있는 것을 하기를 좋아한다. 소설가로써 그런게 내 안에 있다. 소설가들은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거나 손으로 직접 만지지 전까진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 와서) 보기로 선택했다.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보다 (뭔가) 말하기로 했다."

Murakami went on to compare humans to eggs. "If there is a hard, high wall and an egg that breaks against it, no matter how right the wall or how wrong the egg, I will stand on the side of the egg. Why? Because each of us is an egg, a unique soul enclosed in a fragile egg. Each of us is confronting a high wall. The high wall is the system which forces us to do the things we would not ordinarily see fit to do as individuals."

"단단하고 높은 벽과 계란이 서로 충돌하게 되면, 벽이 얼마나 옳고 계란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에 관계 없이, 나는 계란쪽 편을 들 것이다. 왜냐고? 왜냐면 우리 개개인은 모두 계란이기 때문이다. 독특한 영혼 하나하나가 깨지기 쉬운 계란 하나하나에 들어 있다. 우리 모두는 높은 벽을 마주하고 서 있다. 그 높은 벽은 우리에게 개인으로써 하기에는 잘 맞지 않은 어떤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시스템'이다."

We are all "human beings, individuals, fragile eggs", according to the author. "We have no hope against the wall: it's too high, too dark, too cold," he said. "To fight the wall, we must join our souls together for warmth, strength. We must not let the system control us – create who we are. It is we who created the system."

"우리는 모두 인간이고, 개인이고, 깨지기 쉬운 계란이다... 우리에겐 그 높고 어둡고 차가운 벽에 대항하는 희망이 없다. 그 벽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다같이 영혼을 따뜻하고, 강하게 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 '시스템'이 우리를 좌지우지하게 놓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자. 우리가 바로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다."


저 기사를 읽고 나서, 바로 즉각적인 반응 하나가 내 속에서 솟구쳤는데, 영어로 된 글을 읽어서인지 왠일로 영어로 된 문장 하나가 솟구쳤다. 다음과 같다. 별로 어려운 문장은 아니다.



What the HELL are you talking about?



나중에 그가 한 연설의 전문, 을 보게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읽어 보니 느낌은 또 달랐다. 확실히 그는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상을 받으러 갔다면 상을 주는 사람들 앞에서 답례 연설로써 뭘 더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 앞에서 말을 비비꼬는 것이 소설가가 가진 자질은 아닐 것이다.


덧. 어느 블로거가 번역한, 문예춘추 2009년 4월호에 실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제1부.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 (2009/04/10)


일본.

그의 소설에는 분명 국적없는 개인, 으로 다가오는 매혹이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결국, 일본인이다. 한국을 식민지 삼았던 일본,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원폭 피해자로써의 일본, 을 끊임없이 이야기 한다. 중동에서 지난 수십 년간 거의 깡패 짓을 하고 있는 유태인/이스라엘, 은 가해자로써 자신들을 말하기 보다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나치의 학살 당사자라는 피해자로써의 자신들을 끈질기게 이야기 한다. (물론 하루키 본인은 일본인, 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것을 대단히 혐오하겠지만) 하루키가 이스라엘에 대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예전에 동경을 여행 할 때 메이지 신궁을 구경하면서 소위, '신사 참배'를 했던 경험을 말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신사'와 '신궁'은 좀 다르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하면 할 수록 역시 그 곳은 단순히 '종교적이며 경건한' 공간만이 아닌 지극히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독일과 비교를 좀 해보자면, 

흔히 독일은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자신들의 과오. '나치'를 끊임없이 '반성'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고 그런 독일을 좀 일본이 본 받아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면 독일, 이라는 나라는 일본, 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고 도덕적이라서 그런 것일까? 

현대 독일, 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나치'와 철저하게 분리, 단절되어 있다. 그렇게 비록 '나치'는 자신의 '과거'이되 지금의 자신은 그 당시와 철저하게 다른 정체성을 지닌 나라다. 독일이 끊임 없이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나치' 시대를 철저하게 배격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대 독일에 대한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이에 반해 현대 일본, 은 '천황제'를 지금도 유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 제국'과 완전하게 정신적으로 분리, 단절 되지 않은 채로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일본 총리가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감수하고 매번 야스쿠니 신사에 존경을 표하는 것에는 저러한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고 본다. '천황'과 '야스쿠니 신사'를 부정하는 순간 그 것은 현대 독일과 달리 자기 자신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일본 공산당'도 일본의 현실에 맞게 변형이 되어 천황제 자체를 반대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이 완전한, 소위 '반성'을 지금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어느 나라가 더 '도덕적'이냐라는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라인홀드 니버가 이미 1934년에 이야기 했다.) 각각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천황'과 '신사'를 넘는 새로운 일본, 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일본에서 일어 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울러, '박정희'를 뛰어 넘는 새로운 한국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 지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 생각 들이 이어져서 글을 쓰긴 썼는데, 무슨 '국가'에 대해서 섣부른 일종의 '정신 분석'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원. 아, 그리고 링크 시킨 인용 출처 들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구글 검색을 해서 나오는 순서대로 인용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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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

에세이 2009. 3. 4. 18:37

오랜 만에 잠시 만난 어느 녀석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데, 녀석이 잠시 한국을 방문한 사이 '나이트'를 다니면서 많은 여자를 꼬셨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 바람에 슬슬 지겨워질 찰나, 마지막에 만난 어떤 여자는 일종의 '보험'이라는 말을 듣고 오랜 만이라도 잠시 만난 것을 후회했다. 

'보험'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볼 때 나이는 찼으되 결혼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보험'이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참 거시기했다. '보험'이라니, '보험'이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녀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을 한다는 것을 여자 꼬시는 데 십분 활용했으리라.

자신이 얼마나 '찌질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국에 놀러간 유학생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유학'이라는 단어 또한 한국에선 일종의 '형용사'로 기능한다. 한국에는 본래의 단어 뜻과 달리 이상한 용도로 사용되는 형용사가 참 많다. '뉴욕' , '동남아' , '서울대' , '유학' . 언젠가 형용사 사전을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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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消費

2009. 3. 2. 09:01

소비


사라지다 소
쓰다 비

써서 사라지다

음미할 수록
풍겨오는
허무한 매력

이렇게 
심오한 짓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지 뭐야


:

다시 들추어 본 뉴욕 관광기

카테고리 없음 2009. 3. 1. 05:00

2004년 겨울,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보스턴, 그리고 마침내 뉴욕.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일기장을 들고 다니면서 대강대강 적고 나서, 관광을 끝낸 직후 한국에 돌아와 정리했던 글이다.


첫째 날.

뉴욕에 입성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911 테러를 맞은 그들의 경비는 매우 삼엄했다. 국제선 이상으로 뒤지고 또 뒤졌다. 신발까지 벗어서 검사를 그 속을 뒤지는데, 아마도 계속해서 걸었기 때문에 냄새가 지독했을 텐데, 조금 미안했다.[각주:1]

아무튼 이제 맨하탄으로 간다.

맨하탄 한 복판, 정확히 말해서 타임 스퀘어 지하철 역에서 지상으로 막 올라 왔을 때의 그 느낌. 그 느낌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그 때의 찌릿찌릿함은 헐리우드에 막 도착 했을 때의 그 느낌과는 비교가 안 됐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빌딩 벽을 가득 메운 광고판들. 아, 저기 삼성과 엘지도 보이는군. 보스턴의 한가로움과는 – 물론 보스턴 시내를 거닌 날이 일요일이긴 하나 – 정말 대비되는 바쁜 분위기. 게다가 건널목을 건너다가 차에 치일 뻔 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것과 같은 느낌. 

34th Street에서 OO이 만나다. 여전하군. Saigon Grill에서 베트남 음식 먹어 주시다. 역시 맛있다. 에드가 앨런 포 생가를 카페로 만든 곳에서 커피를 마시다. 분위기 있으셔. 거창하지만, 어줍잖게 삶과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미국 여행 중 느낀 점, 안부를 주고 받고. 지금의 이 느낌을 최대한 즐겨 주시다. 


둘째 날.

본격적인 뉴욕 시내 관광. 자유의 여신상은 먼 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함. 그나마 안개가 껴서 잘 안보였지만. WTC가 있던 곳으로 가다. 폐허가 된 그곳은 여기저기에 기념물과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Reconstructing! , Rebuild! , Remember! [각주:2] 아무튼 그 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다시 세운다. 다시 일으킨다. 그리고 이 것을 기억하겠다. 결국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졌지. 뭐, 그 폐허를 보며서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어쨌든 미국 본토에 대한 첫 공격이 아니었던가.

American Stock Exchange에 들어가려고 시도하지만 거부당함. 9.11 이후로 견학이 금지 되었다는 가드 아저씨의 설명. Wall Street는 출근 시간이 아니어서 그런지 사람들도 별로 없고, 빌딩 숲은 이미 샌프란시스코에서 경험했고. East Village는 분위기 암울했고, 때맞춰 눈까지 내려 주시다. 근데 왜 눈이 내리는 데 우울하지? 암울한 이 곳을 벗어나서 다시 China Town으로 갔다. Dim Sum으로 점심을 때움. 맛있다. 

Soho에 가다. 옷, 빈티지, 뉴욕 스타일? (뉴욕 스타일이 있을까) Mac Center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니치 빌리지와 뉴욕대학교 그리고 필름 센터. 대학가, 옷가게들. 지나가다 Chicken Faita를 먹음. 구워서 주는데 맛있었다.

유스호스텔에서 잠시 쉬다가 그래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야경은 봐야겠고, 해서 나갔다. 11불이나 주고 올라가서 맨하탄 야경을 봤지만, 춥고 게다가 혼자라는 사실이 왠지 이건 청승이라는 생각만 자꾸 솟아오르게 했다. 담배 한 대 피고 바로 내려 왔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유스호스텔로 오는 길에 – 유스호스텔은 타임 스퀘어 한 복판에 위치함 – 42nd Street 지하철역에서 거리 공연을 보았다. 와우, 수준급인데? 멋진 Modern Rock 밴드.

유스호스텔에 돌아 오니 역시 일본애들이 한 바가지. 이래저래 이야기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그네들 봄방학이 3월 까지라는 사실. 그래서 이렇게 많았구만. 그 중에 키 150 센치미터 쯤 될까 말까 한 두 명의 여자 아이는 힙합 댄스를 배우러 뉴욕에 왔단다. 할렘에 있는 댄스 스쿨에 매일 출근 하신단다. 대단하다. 영어는 엉망인데, 넉살이 너무나도 좋으시다. 뮤양~. 그리고 일본어과를 다닌 다는 한국 여자애 한 명.


셋째 날.

늦게 일어 났다. 라이온 킹은 매진이라 결국 오페라의 유령을 예매했다. 차이나 타운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시내 관광. 성 패트릭 성당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그리고 돌아 다니는 것을 봤다. 여기 오는 길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달고 돌아 다녔다. 뭔데? Ashes Wednesday란다. 이마에 까만 십자가를 그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Sony Plaza에 가다. 역시 소니. 삼성이 타임 스퀘어에 있는 소니 광고판 자리에 들어 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소니는 아예 이런 플라자를 가지고 있었군. – 지금 생각해보면 소니는 어쩌면 경영 악화로 광고판을 철수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 뭐, 그다지 즐길 거린 없었다. 초등, 중학생 정도라면 모를까.

UN빌딩은 포기하고 다시 타임 스퀘어로 왔다. 타임 스퀘어를 거닐다가 Toy’s R us에 들어 갔다. 장난감 천국에 역시 캐릭터. 캐릭터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갑자기 해버림.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봐두었던 니트를 결국 사버림. 젠장 87불이나 하는데!

OO이는 오늘 바쁘고, ㅁㅁ이는 내일 뉴욕에 오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유스호스텔에서 좀 쉬어야지. 그러나. 유스호스텔에서의 마지막 날. 우울함에 퐁당 빠져버렸다. 여행 중 최대의 위기로 외로움을 느꼈다. 갑자기, 왜 내가 미국에 왔을까? 무얼 얻었는가?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그런 생각들이 이어졌다. 미국이란 나라를 짧은 시간이지만 보려고 간 것이다. 2주 밖에 안 되는 시간이긴 하다. 근데 생각해 보면 그냥 놀러 온 거라고 편하게 생각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도 무언가를 꼭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을 들여서 온 것이긴 하지만. 

룸메이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녀석은 독일에서 DJ를 하는 녀석인데, 힙합 LP를 사기 위해 뉴욕에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 백장의 LP를 보여줬다. 각각의 LP가 중고가 많아서 싸게는 1불에도 샀다고 자랑했다. 음, 그렇군. 다른 한 녀석은 일본녀석인데 그 녀석 또한 Dance를 배우기 위해 온 녀석이었다. Jazz Dance. OO이는 XX 인스티튜드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있고. 

무엇을 할 것인가? 누구와 삶을 나눌 것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어차피 결론도 안나는 생각. 갑자기 한 발자국 더 나아갈 때 한 가지를 더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1층 로비에 내려 갔다. 뭐, 특별한 거 없지. 일단 나가자. 나가는 길에 들어오는 뮤를 보고. 클럽에 가지 않겠냐고 물음. 오케이.

클럽 Lauahn으로. Party를 기대했지만 역시 수요일. 10명도 없었다. 썰렁하기 그지 없군. 너무나 늘씬하고 예쁜 바텐더를 흘낏 흘낏 훔쳐 보면서 맥주 한 병을 다 비웠다. 앞에 앉은 뮤는 그냥 그런 표정. 결국 나왔다. 나오다가 그리스 애하고 어쩌다가 이야기함.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그 녀석 삼성 이재용 상무하고 골프를 쳤다고 자랑함.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무튼.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이라 조금 긴장이 되었는데, 생각 보다 안전하다고 느꼈다. 아무튼, 기분 전환이 되었다. 그나저나 힙합 클럽을 가야 쬐그만 뮤 녀석의 춤을 좀 봤을 텐데. 


넷째 날.

오랜만에 미국식으로 아침을 먹어 주시고.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가다. 젠장 왜 또 일본이야. Japan! Japan! Japan! 왜 항상 일본 미술 전시 해 놓은 곳이 항상 클까? 정답은 그 녀석들이 돈이 많으니깐. 

아무튼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은 정말 컸다. 한 시간 짜리 투어에 참가했다. 할머니가 나오셨네 그랴. 노인 들이 할 수 있는, 하기에 적합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서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당당하고 멋있어 보였다. 

학교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이 그룹. 근데 다 교복 입은 흑인들. Private School도 백인, 흑인 따로 있나? 미술관 여기 저기에서 Suit를 입고 앉아 있는 흑인들. 저녁이 되면 Suit를 벗고 할렘으로 돌아 가겠지. Express 전철 탐. 할렘 바로 전 역에서 내림. 내릴 때 흘깃 보니 90퍼센트 이상이 Black. 

자신이 하버드 대학을 다닌 다면 그 문화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집단에 들어간 이방인이다. 둘 중 하나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집단의 정체성을 받아들여 동화가 되던지. 아니면 떠나던지.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스쿨 타이], [죽은 시인의 사회], [여인의 향기] 등등.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생각을 더더욱 했던 것 같다. 분위기가 아무리 영국 귀족적 분위기건 어쩌건 간에, 거기에 다니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지 않은가. 어쨌든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하버드생 한 명 만나보지 못하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

그리스 미술. 검은색 바탕에 갈색. 다 같은 형식이다. 뭔가 기념하기 위한 것들로 보인다. 그때는 아마 실용품이었을 거다. 하우저가 말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작이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본다. 거리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뉴욕의 자랑스런 말. The Capital city of Culture & Art란다. 그래 니 잘났다. 정치, 경제를 잡고 있으니깐. 자연스레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구나. 

아프리칸 미술. 아기를 업고 있는 여자와 화살통을 메고 있는 남자를 형상화 한 나무로 된 조각상을 보았다. 가이드가 Western Art와 달리 다 실생활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먹고 살 만해야 예술을 위한 예술도 하는 법.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는? 그 분도 자본주의의 혜택을 입으셨다. 물감이 대량 생산되지 않았다면 그 분은 물감도 사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의 그림들을 우리가 볼 수 있었을까?

인상주의에서 발길을 멈추다. 르누아르. 이 분은 검은색을 절대 쓰지 않았다지. 잭슨 플롯, 렘브란트, 브뢰겔, 루벤스, 다비드. 클로드 모네! 환상! 피카소는 절대 이해 안 되는 큐비즘 보다는 오히려 ‘청색시대’라고 불리는 우울한 그림들이 더 맘에 와 닿았다. 

초등학생들.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예술을 가까이 하면서 자란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오가고 있다. 

OO이를 만나기 전에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들어갔던 중국식당에서 먹었던 이상한 면. 중국식 짜장면인가? 색깔은 비슷한데 발냄새 비슷한 냄새가 심하게 나서 거의 버렸다. OO이를 만나 타카피 주스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고급 중국 레스토랑에 갔다. ㅁㅁ이를 드디어 만났다. 여전하다. 뮤지컬 시간이 늦어서 OO이를 두고 둘이 먼저 나와서 타임 스퀘어를 열심히 뛰었다. 5분 정도 늦었지만 다행히도 들여 보내 주었다. 

오우. 10분 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샹젤리제. 마에스트로 바로 뒷 자리. 재수! 무대 장치가 예술임. 역시나 많이 알아 듣지는 못했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뮤지컬이 끝나고 OO이를 다시 만나 향한 곳은 한국식 술집. 이런 저런 이야기. 


다섯 째 날.

오늘은 우드버리 쇼핑센터에 가는 날. 그 동안 참고 참았던 쇼핑 욕구를 한 번에 터트릴 시간이다. 그런데, 늦잠을 잤다. 다시 타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옆에 게이들 등장. 남자 다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속닥거리면서 음식을 먹는데, 속눈썹이 유난히들 기시다. 저런. 역시 맛있는 타이 아이스티. 그런데, 노닥거리다가 버스를 놓쳐 버린다. 짜증 이빠이. 우왕좌왕하다가 어쨌든 우드버리 아울렛에 떨어지다.

여기는 파라다이스. 왜 이리 싼 것일까? 

밤이 되어서야 돌아 왔다. 타운 하우스 앞에서 산 중국 음식, 그리고 맥주. 그리고 이야기. 이런 저런 걱정들. 쓸데 없는. 


마지막 날.

아침부터 무지하게 정신 없었다. 간신히 공항으로 가는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이번엔 가방을 사러 헤맸다. 토요일 오전이라 연 상점이 안 보였다. 돈도 거의 떨어지고. 아무래도 그냥 봉지에 넣어 잔뜩 싸 들고 가기엔 세관원이 두려웠다. 돈. 쓸 때는 쓰자. 

거기에 버스까지 고장. (그런데 왜 항상 여행 마지막 날은 이런 일들이 몰아 닥치는 걸까. 서둘러서 그런가?) 시간이 늦어서 조마조마 했는데, 출국심사는 불과 10분도 안 걸려서 끝나서 조금 허탈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할 필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음. 차선을 찾자. 이거 가장 크게 배운 것. 


후기. 

아직도 비행기 삯을 기억한다. 서울-샌프란시스코-엘에이-보스턴-뉴욕-서울, 이라는 구간을 무식하게도 몽땅 비행기로 연결했고, 당시 정확히 109만원 (세금 포함) 지불했다. 항공사/여행사를 이잡듯이 뒤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별로 읽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 데다가 생각 보다 읽을 거리도 별로 없는 '다시 들추어 본-' 을 끝내고 나니 그때 당시와 지금 내가 어떤 면에선 참 많이도 변했고 어떤 부분에선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 보니 유치한 구석이 너무 많아서 우스웠는데, 저런 유치한 구석을 지금은 얼마나 탈피했을까, 자문해 보아도 별로 좋은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위 문장 들은 사실 하나 마나한 소리고 결론은, 순간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어서 나름 좋았다는 거다. 이 글에 정보 가치는 거의 없지만, 읽는 누군가도 순간 순간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면 좋을 것 같다. 


  1. 당시 난 일기장에서까지 착한 척을 하는 습성이 있었다. [본문으로]
  2. 첫 단어는 확실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확실하지 않다. [본문으로]
:

재미있던 별자리 여행

에세이 2009. 2. 25. 23:11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집에 굴러 다니던 김영사에서 출간 된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 이라는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책을 과연 내가 즐겼는지 즐기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뒤를 이어 (아마도 강원도에서 열렸던) '재미있는 별자리 캠프'라는 곳에도 따라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캠프를 과연 내가 가고 싶다고 어머니를 졸라서 가게 되었는지, 집에 그 책이 굴러다닐 수 있도록 해 주신 어머니가 나를 보낸 것인지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아무튼 난 쌍안경을 하나 챙겨 들고 비교적 흥분된 마음을 가지고 캠프에 따라 나섰는데 지금으로썬 딱 세 가지 기억이 남아 있다.

하나, 캠프 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오줌으로 가득 차 터질듯한 방광을 부여 잡으며 괴로워 했는데, 그 괴로움을 못이기고 제발, 빨리 캠프장에 도착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렸다. - 당시 주일학교에 열심히 참석을 하며 성경 퀴즈 대회에까지 나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오래 산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무드셀라라는 작자로, 구백 육십 구살까지 살았다, 고 성경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노아의 세 아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들에 열심히 외운 답을 말해 금상도 받고 당시 다녔던 교회의 이름도 빛냈던 개신교인, 이었기 때문이다. - 그 꼴을 보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별 이상한 놈 보겠다는 얼굴로 쳐다 봤던 기억이 난다.  

두울, 당일 저녁엔 저 책의 저자와 유명한 조경철 박사가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뭔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으로썬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시에 저 사람 들이 그렇게 별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왠지 모를 '어른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엣, 그 캠프는 KBS에서 동행 취재를 했었다. 아마도 [재미있는 별자리 여행]이라는 책이 당시에 히트를 쳤던 것 같고, 그래서 그 캠프도 취잿거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의'가 끝나고 밤이 되고 드디어 별자리 관찰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몇 개의 망원경이 설치 되어 있었고 나처럼 쌍안경을 들고 온 사람들도 몇 몇 있었다. 안타깝게도 날은 흐려서 별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별자리 캠프'에 왔으니 별을 관찰하겠다고 열심히 하늘을 들여다 보았는데, 순간 쌍안경을 들고 하늘을 보고 있던 내 앞에서 환한 빛이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그 빛은 천사 가브리엘의 반짝이는 날개에서 나는 불빛이 아니라, ENG 카메라를 맨 카메라맨 옆에서 조수가 들고 있었던 강렬한 조명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러니까 밤에 별을 관찰하는 사람을 찍기 위해선 조명 불빛이 필요한 것인데, 그 조명 불빛이 쌍안경을 통해 들어 오는 통에 나는 순간적으로 천사의 강림을 느꼈다가, 이내 촬영을 하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별을 관찰하는 꿈 많은 소년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어느 아침 프로그램에서 난 쌍안경에 얼굴이 반 쯤 가려진 내 모습을 한 일 초 정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아직까지는) TV 출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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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카테고리 없음 2009. 2. 24. 14:59

어느 게시판에서 그와 그의 신부 사진을 보고 그가 그의 신부에 대해 쓴 글을 읽었는데, 
그의 소설과 비슷한 냄새가 나서 좋았다.


[르네상스인 김승옥] 책 中. 김승옥과 그의 부인, 박혜욱.

"그 여자는 거의 완전무결할 정도의 에고이스트다. 동시에 그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변덕장이이다. 그 여자는 상식 이상도 이하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로 아주 작정한 사람 같다. 관습을 즐긴다. 이 여자의 문학에 대한 오해는 무지막지할 정도다.  문학이란 건전한 사람을 괜히 병들게 하는 것이며 문학인이란 괜히 술이나 마시고 바바리코트의 깃이나 세우고 다니는 사람들인 줄로 안다. 그러면서도 미에 대한 추구는 굉장하다. 하지만 그것도, 예를 들어 자기를 닮은 여자가 아니면 아무도 미인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독선적인 데가 있다. 

겉으로는 꽤 상냥하고 부드러운 것 같은데 차디찬 자기가 안에 도사리고 있다. 타인은 항상 타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순히 상식적인 여자가 아니라 철저히 너무나 철저히 상식적인 걸 사랑하는 여자이다. 내 글재주로는 아무리 써도 그 여자의 오만불손을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리 만나보아도 그 여자에게 있어서의 나는 항상 타인이었다. 타인치고는 약점을 빤히 알고 있어서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타인이었다고나 할까....

그런 식의 여자를 상대하는 방법이라고는 다만 두 가지밖에 없는데 하나는 그여자를 싹 무시해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여자와 얼른 결혼해 버리는 것으로서 나의 경우엔 당연히 뒤의 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여자를 통하여 구제되기를 바랐다는 얘기다....

밤만 되면 어린애처럼 자기 집에 가고 싶어 울먹울먹한다. 그래서 아내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지기 시작하면 아내를 웃길 말이나 재미있는 얘기를 준비해야 한다."


[뜬 세상 살기에], [햇볕과 먼지의 놀이터] 책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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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오래된 책 한 권

카테고리 없음 2009. 2. 20. 16:22

오랜 만에 샌프란시스코 시립 도서관 중앙 건물에 들렀다. 이런 저런 자료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예전에 반 쯤 읽다가 만 책을 다시 제대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님 웨일즈라는 미국 여성이, 김 산(본명 장지락)이라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혁명가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지은 책 [Song of Ariran]이다. 

1941년에 처음 출간 되었는데, 지금 미국에선 절판 되었고, 아마존에서 구하려고 해도 양장본도 아닌 보급판 중고책을 92불이나 주어야 한다. 한국에선 1984년에 처음 출판되고 2005년에 재출간 되었는데, 내가 이 책을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작년이다. 

사서가 서고에서 찾아온, 먼지가 쌓여 있던 삭아 버린 오래된 양장본을 펼치니 대출카드가 보인다. 대출카드 상으론, 이 책이 처음으로 대출된 날짜는 1945년 8월 18일로 기록 되어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 부터 해방 된 지 불과 삼 일 뒤인데, 그 대출자가 그 사실을 알고 대출한 것인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가장 최근은 1987년 9월 29일이다. 그 뒤로는 서고에서 쭈욱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나 보다. 

책을 휘리릭 넘기자 책 한 켠에 한자와 한글이 섞인 짧은 메모가 눈에 들어 온다. 

Chapter X(10)의 'From Tolstoy to Marx' 라는 부분이고 그 당시 아나키스트들이 무엇을 바랬는지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 담긴 73 쪽에 적혀 있던 메모다. 

'自由主義가 放任主義 이라는 見解."

문득 이 짧은 메모를 쓴 사람은 누군지 궁금해진다.


이 책의 맨 첫 페이지에는 'Song of Ariran 아리랑의 노래' 가 'Old Korean folksong of exile and prison and national humiliation 추방자와 감방과 국가적 수치에 대한 오래 된 한국 민요' 라는 부제를 달고 적혀 있다. 쉬운 영어로 적혀 있는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내가 알고 있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라는 '아리랑'과는 차이가 있다) 노래를 다 읽고 나니 슬프다, 가 아닌 비통하다, 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re are twelve hills of Ariran
And now I am crossing the last hill.

Many stars in the deep sky-
Many crimes in the life of ma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Ariran is the mountain of sorrow
And the path to Ariran has no returning.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Oh, twenty million countrymen-
      where are you now?
Alive are only three thousand li
      of mountains and rivers.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Now I am an exile crossing the Yalu[각주:1]River.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of three thousand 
      li are also lost.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1. 압록강 [본문으로]
:

숫자 사이에 쉼표 찍기

짤막한 거 2009. 2. 18. 10:15
영어에선 one thousand, ten thousand, one hundred thousand, 그리고 one million. 
one million, ten million, one hundred million, 그리고 one billion. 

이렇게 동그라미 세 개를 기준으로 단위가 바뀐다. 따라서 쉼 표는 동그라미 세 개 당 하나씩 찍어 주는 것이 읽는 데 더 효과적이다.
10,000 ten thousand / 1,000,000 one million / 100,000,000 one hundred million

한국어에선 일, 십, 백, 천, 그리고 만. 
만, 십만, 백만, 천만 그리고 억. 

이렇게 동그라미 네 개를 기준으로 단위가 바뀐다. 따라서 쉼 표는 동그라미 네 개 당 하나씩 찍어 주는 것이 읽는 데 더 효과적이다.
1,0000  만 / 100,0000  백만 / 1,0000,0000 일억

동그라미 세 개 당 찍혀 있는 쉼표를 보면서 (한국어로) 동그라미 네 개씩 끊어 읽는 것은 정말이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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